• [소설: 아름다운 구속] 아름다운 구속 112013.05.02 PM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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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악! 죽고 싶지 않아!”

내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눈을 떴을 땐. 베란다 난간에 절반이 걸쳐져 있어, 마치 나무 막대기에 묶인 돼지 바비큐 같은 자세로 누워 있는 모습이었다.

“뭐야 대체 이건. 자, 잠깐.”

한숨을 내 쉬며 난간에 걸린 팔과 다리를 빼냈을 즈음. 다리 사이에 뭔가 이상한 감촉이 느껴져 벨트를 풀고 바지를 살짝 들춰봤다. 안쪽에 끈적끈적한 액체가 듬뿍 묻어 있었다. 나는 상처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며 한마디 내뱉었다.

“씨발.”

이렇게 내 인생 최악의 OT첫날밤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작년에 졸업한 후배 한 명이 뒤늦게 OT에 합류했다. 작은 체구에 나긋나긋하고 다소곳한 모습이, 그 인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나는 그 인간의 눈치를 슬쩍 살펴봤다. 그 인간은 지금 영웅호걸이 간신들한테 호통 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 친구들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친구들끼리의 대화마저도 그렇게 보일 지경이라니, 나는 그 모습에 치를 떨면서도 그 인간이 날 감시하고 있는지를 더 살펴봤다. 물론 지금 그 인간은 친구들끼리의 잡담에 정신이 팔려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금이 기회다 싶어 얼른 그 후배에게 다가갔다. 내가 인사 겸 자기소개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 인사하려 했다. 그녀 쪽에서 먼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선배. 제 이름은 E입니다. 선배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이건 거의 신장개업한 백화점 직원을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대충 손을 들어 인사를 받았다.

“아 그래. 쌀쌀하지도 않고 딱 적당하네. 뭐 내 이름은 C야. 만나서 반갑다”

나는 E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곁눈질로 그 인간 쪽을 슬쩍 흘겨봤다. 다행히도 그 인간은 나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아직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러자 E는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생긋 웃었다.

“C 선배님은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나는 속으로 ‘횡재했다.’ 라는 생각에 절로 입 끝이 올라갔다. 물론 한편으로는 그 인간이 무섭기도 했고, E가 나와 별 접점도 없이 너무 살갑게 다가오는 것에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번에 새로 복학했거든. 그러고 보니 개강 때에는 얼굴을 못 봤는데 졸업한 거야?”

E는 공손하면서도 나긋나긋한 투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작년에 졸업했거든요.”

‘그래 이런 게 평범한 대학생의 OT지.’

나는 이제야 좀 멀쩡한 상황을 맞이한다는 것에 눈물이 흘러넘칠 것 같았지만, 괜히 이상하게 보이는 게 무서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킹콩’ ‘후레자식’ ‘마담 뚜’ 같은 쓰레기 후배들만 잔뜩 만나다가, 이제야 제정신이 박힌 후배를 만났다는 기쁨에 긴장의 끈이 확 풀어졌다. 하지만 나는 일부러 별 관심 없는 것처럼 한마디 던졌다.

“흐음 그렇구나.”

약간 무성의한 투로 던진 내 대답에, E는 소리죽여 웃었다. 나는 속으로 씩 웃으면서, 이제 슬슬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 E를 붙잡아둘까 마음먹었다. 그러나 또 어디서 냄새라도 맡고 온 건지, ‘킹콩’이 지진을 일으키며 나와 E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 선배. 잠깐 나랑 할 얘기가 있는데….”

아주 불행히도 나와 E가 미처 피하기도 전에 ‘킹콩’의 눈에 띄었고, 킹콩의 얼굴이 바위덩어리처럼 울퉁불퉁하게 변한 채. 마치 멧돼지 마냥 달려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C 선배! 왜 E랑 얘기하는 건데? E에 대해서 아무것도 안 들었어?”

그 인간은 E를 발로 차서 넘어트린 뒤, 코끼리 다리 같은 팔로 마치 뱀이 먹이를 죄듯 내 몸을 휘감았다. 그 다음 나와 E를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럼에도 다른 학생들. 심지어 교수님마저도 고개를 돌리며 본체만체했다.

오히려 지나가는 행인들이 E를 일으켜주려 했지만, ‘후레자식’이 눈알을 부라리며 행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촐싹이’가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투로 협박을 늘어놓는 탓에. E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탓인지 아니면 킹콩에게 너무 세게 얻어맞았는지, E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흐느껴 울기만 했다.

‘씨발 새끼들. 나는 둘째치더라도 사람이 발에 걷어 차여서 넘어져 있는데 이 새끼들은 다들 뭐 하는 거야?’

내가 남 일인 것처럼 눈치만 살피며 도망가는 놈들을 노려봤지만, 역시나 그것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후레자식’과 ‘촐싹이’는 행인들을 죄다 몰아낸 뒤,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낄낄거렸고. ‘마담 뚜’는 오히려 더욱 신이 나서,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E의 험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하긴 미친 놈 소굴에서 뭘 더 바라냐.’

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킹콩’의 팔을 쳐냈다. 킹콩이 다시 내 팔을 붙잡으려 하자, 나는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한마디 했다.

“손대지 마! 나한테 한번만 더 손대면 나부터 죽고 너도 죽여 버릴 거니까!”

그리고 E에게 손을 내밀며 비아냥거리는 투로 한마디 더 던졌다.

“야 니가 뭐라고 내가 누구하고 대화하건 말건 신경 쓸 거리나 있냐? 꼭 이렇게 사람 다치게 만들어야 해?”

“선배! E에 대해서 아무 말도 못 들었어? E랑 말도 섞지 말라고. 당장 그 손 놔! E 사이코인 거 몰라?”

나는 코웃음을 치며, 킹콩의 발길질에 넘어진 E를 안아 일으켰다. 어제에도 아무 이름이나 댔더니 그 후배를 사이코라고 까 내렸던 인간이다. 설령 그 인간의 말대로 E가 진짜 사이코라고 한들, 내가 그딴 걸 알 리도 없거니와. 그걸 안다손 치더라도 그 괴물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E는 ‘킹콩’의 발에 차인 충격이 컸는지, 내 어깨를 붙잡고도 곧 쓰러질 것처럼 후들후들 떨었다. 나는 모자를 벗어 그녀의 어깨 등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 줬다.

“선배! E하고 뭘 하는 거야!! 선배는 내 거라고!!”

그러자‘킹콩’은 눈을 새빨갛게 물들면서, 이번에는 E를 주먹으로 때리려 했다. 나는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킹콩’이 내 뻩는 주먹을 손으로 막아냈다. 그리고 바위만한 그 괴물의 주먹을 쳐낸 다음 목소리에 힘을 주면서 그의 행동을 질책했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사이코 같아. 네가 도대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데? 안 그래? 너랑 나는 아무 상관도 없잖아.”

그러자 ‘킹콩’은 내 멱살을 틀어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슨 소리야. 어제 선배하고 왕 게임 하면서 할 거 다 했잖아! 그래놓고도 날 버리고 E랑 그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을 거야 선배?”

다른 사람들. 특히 일반 관광객들도 전부 다 보는 앞에서, ‘킹콩’은 마치 만리장성이라도 쌓았다는 식으로 큰소리를 쳤다. 억지로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던 나는, 하마타면 킹콩의 그 한마디에 정신을 잃고 쓰러질 뻔 했다. 나는 우선 E를 내려놓은 뒤, 킹콩에게 다가가 잔뜩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기껏 해봤자 니 그 돼지 같은 몸뚱이로 나한테 매달린 것 밖에 없잖아? 그거 하나갖고 나한테 큰소리 칠 수 있냐? 어쨌건 더 말 걸지 말고 니 갈 길이나 가. 알았어!”

그러자 킹콩은 기가 죽기는 고사하고, 특유의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한마디 내뱉었다.

“왜? 베란다에서 같이 잤잖아.”

나는 아주 잠깐 동안 숨이 턱 막혀, 가슴을 마구 두들겨대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씨발.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말을 왜 하는데? 당장….”

나는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다. ‘킹콩’이 내 눈앞에서 사진 몇 장을 흔들면서 비뚤어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그 사진에 눈길을 주는 순간. 차가운 얼음이 내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것 같은 섬뜩함이 온 몸으로 퍼졌다.

얼핏 본 것이긴 하지만, 그 인간이 내민 사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그 인간이 홀라당 벗은 채 바지가 벗겨진 남자 몸뚱이 위에서 들썩거리고 비비적대는 장면을 연속으로 찍은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에 있는 바지의 상표와 벨트 버클은 내 것과 완전 똑같았다. 그리고 속옷 색깔까지 그 때 내가 입었던 속옷이었다. 이걸로 전날의 이상한 꿈과 아침의 몽정에 대한 의문이 이 사진 한방에 완전히 끼워 맞춰졌다. 그 인간은 사진을 다시 집어넣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오해라니, 엄연한 ‘사실’인데. 이래놓고도 도망갈 거야?”

하필이면 그 때 E가 눈치도 없이, 나와 ‘킹콩’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 K씨 C선배님한테 대체 뭘 보여주는 건가요?”

그러자 ‘킹콩’은 E에게 추악한 사진이 담긴 핸드폰을 보여주려 했고, E는 멋도 모르고 그 괴물이 내민 핸드폰을 받아들려 했다.

“당장 나가!”

결국 나는 E와 그 인간을 밀쳐내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당장에라도 주먹을 꽉 쥐고 그 인간을 노려봤다. 그러자 주변의 시선이 전부 나와 두 후배에게 쏠렸고, 나는 주먹을 풀면서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하지만 이가 시릴 정도로 바득바득 갈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전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부릅뜬 채 악 다문 이를 드러내며 킹콩을 노려봤다. 이쯤 되자. 그 인간도 더 밀어붙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물러날 때 킹콩의 입 끝이 살짝 올라갔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쓰지 않는 척을 했다.

“빠른 대답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배. 지금처럼 미적거리기만 하면….”

‘킹콩’은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한 번 휴대폰을 꺼내 내 앞에서 흔들어댔다.

“잘 알겠죠?”

그 인간은 끝끝내 한마디 던지고 지진이라도 일으킬 것 같은 기세로 물러났다. 그제야 사람들도 슬슬 제 길을 가고 나는 아직도 내 옆을 떠나지 않는 E를 쳐다봤다. E는 걱정 반 당황 반이 섞인 표정을 지으면서 날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아 미안. 너무 피곤해져서 그래. 며칠 전부터 내가 싫다고 하는데도 저 인간이 나한테 찰싹 달라붙더라고.”

나는 한숨을 크게 내 쉬며 신세 한탄을 했다.

“히, 힘들겠네요. C 선배.”

그러자 E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 내게 위로의 한마디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어항속의 금붕어마냥 헤엄치고 있었다.

“저, 저기 선배. 저는 일단 다른 곳에 가 있을게요. 나중에 저녁때 옆자리에서 술 한 잔 해요? 알았죠?”

E는 그 말을 끝으로 황급히 달아나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얼굴을 확 찌푸렸다.

“씨발.”

나는 ‘제법 괜찮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속으로 그 인간을 마구 욕하고 두들겨 팼다. 그럼에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괜히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발로 걷어찼다.

“선배! 아까는 미안했어. 나랑 같이 이거라도 먹으면서 저기 절벽 구경 가자!”

그리고 그 때 마침 아예 물러난 줄 알았던 그 인간이, 두 손에 먹을 것을 잔뜩 든 채. 주변이 크게 울릴 정도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멧돼지처럼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 각목이라도 주워들까 생각했지만, 다시 한 번 바닥에 침을 뱉으며 눈을 부라리는 걸로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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