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방백 (찌질한 첫사랑 이야기)2017.06.25 PM 10:38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방백

그녀를 처음 만난건 친구들 모임에 우연히 들렀을 때였다. 친구 놈의 생일날 20대의 생일이 늘 그렇듯 생일을 핑계로 거나하게 마시고 있을 때쯤 친구의 여자친구가 3명의 무리를 이끌고 우리테이블에 합석했던 것이 그 계기였다.

 

반하게 된 계기 따윈 잘 모르겠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몇 번 얼굴을 보게 되면서였는데 첫인상은 그냥 뭐 예쁘네 정도였다.

하얀 피부에 자신의 장점이 머릿결이기라도 하는듯한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꽤 매력 있다고 생각했다.

친구 생일파티를 계기로 친구의 여자친구와 그의 무리들은 가끔 우리가 모여있는 술자리에 참석하거나 중간에 합류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때마다 어설프게 표정관리 하느라 좀 힘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는 게 나쁘지 않았다. 어떤 날은 긴머리속에서 빛나는 핀이 예뻤고 어떤 날은 약간 짧은듯한 검은색 테니스 스커트가 예뻤고 어떤 날은 렌즈를 끼지 않아도 유난히 반짝이고 큰 검은색 눈동자가 예쁘다고 생각했다.

술을 매개체로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매우 친해져 있었고 처음 볼 때의 적은 말수를 가졌던 그녀는 웃으며 이야기를 할 정도로 우리의 무리 속에 빠르게 스며 들었다.

그녀는 이따금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었고 그녀도 꽤나 좋아하는 거 같다고 느꼈었다. 딱히 관심만 가는 정도였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따금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다 보면 가끔씩 그녀의 모습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에유 미친놈아.. 쓰잘데기 없는 생각 하고 있는 자조적인 혼잣말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몇차례정도였을 뿐이었다.

임자 있는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라는 가책.. 그런데 왜 자꾸 그녀가 생각 나는지..

그녀가 정말 어처구니 없이 고백하면 어쩔까.. 내가 먼저 고백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쓰잘데기 없고 실현 가능성은 0%에 수렴하는 상상을 하다 잠드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새 잠들기 전 망상은 그녀와 내가 열심히 사귀고 있는 것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으며 그 생각에 잠못이루다가 나도 모르게 잠드는 날이 다반사였다.

그렇게 잠들어 다음날 일어나면.. 내가 왜 이러나 싶기도 했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 알량한 자존심이 이따금 생각나는 그녀를 막긴 역부족이었음은 아직은 찌질한 내 청춘이기도 했다..

남자친구도 있고 내 친구들도 아는 그녀에게 섣불리 고백했다가는 아마 난 쓰레기 취급을 받을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하기 어려웠지만 어떠한 이유라도 짝사랑을 막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짝사랑이 아닐 거다.

어쨌든 친구들과의 모임이 아닌 단 둘이서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마땅한 핑계도 구실도 찾기 힘들었다. 친구들 모임 사이에서야 가끔 말을 하지만 그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였기도 했고..

이따금 주말에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혹시 그녀가 나오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았고 나온다 하더라도 30분 정도 잠시 머무르다 남자친구에게 가는 일이 더 잦았다.

그녀를 볼 때마다 말수는 줄어들고 의도적으로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도 해봤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속에 고민은 커져만 갈뿐 딱히 뭔가 나아지거나 진전이 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계절이 한번 바뀔 때쯤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이 찌질한 짝사랑은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쯤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나 수연인데 혹시 형태 맞니?

ㅇㅇ 수연이 맞아?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어?

항상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그 사랑을 포기해야 할 때 마다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희망이 주어진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더 짝사랑이 가슴아픈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연락은 논문준비를 위한 자료들이 필요한데 내 전공에 관련된 것이 있어 그에 대한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 연락 한 것이었다.

1주일만 더 빠르게 연락했어도 난 단숨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일 수 있었을 테지만.. 애써 그만하자고 생각한 내 시간들과 감정들이 승낙이라는 단어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다.

 

으음.. 지금은 조금 어려울 거 같은데? 이런저런 일들이 많이 있어서.

그래? 그럼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잠깐 시간을 내줄래 질문사항이나 궁금한 건 미리 메일로 보내줄 테니 잠깐 얼굴 보면서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너밖에 전공자가 없어서. 대신 내가 밥이랑 술 사줄게.

꽤 장문으로 보낸걸 보면 급하긴 급한 가보다.

짝사랑의 대상 이라는 것이 참 웃긴 게 알뜰살뜰하게 모아놓은 내 자존심 따위는 언제든지 한방에 무너뜨린다는 거다. 그리고 최소한의 자존심은 배려라는 미명을 달고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사뿐히 짓밟고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짓밟힌 자존심을 위로한다.

그래 그럼.. 이번 주 주말에 합정에서 만나.

메시지가 끝나고 나는 또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토록 몇 개월을 좋아하고 몇 개월 동안 포기하고자 했던 내 감정은 그녀의 메시지 하나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런 자괴감에도 불구하고 주말에 만날 기대감에 사로잡혀있는 정말 어찌 보면 반쯤 미쳐있는 감정 상태였다.

 

그렇게 오락가락한 정신상태로 나는 주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주말에 입을 옷을 사고 머리를 정리했다. 이럴 때마다 동물농장에서 나오는 구애를 하는 수컷이 어찌 보면 인간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동물농장에서 봐왔던 그 병신 같은 구애의 춤이 생각나서 더 괴롭기도 했다.

 

약속된 날이 다가오고 난 약속장소에서 30분전에 도착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질문지가 담긴 메일을 한번 다시 읽어봤으나 딱히 어렵거나 까다로운 질문은 없어서 망신당할 일은 없을 거 같았다.

 

그녀가 나타났다. 하지만 왠지 어두운 얼굴.. 간단히 인사만하고.. 질문지에 대한 답을 주었고 답이 끝나자 소름 끼치도록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혹시 내 마음을 들켜버린 건가 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있을 때쯤..

미안해..라는 그녀의 말을 들었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사실 남친과 어제 크게 다퉜고 그로 인해 잠을 별로 자지 못해 컨디션이 그닥 좋지 못하다는 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그딴 놈하고는 얼른 헤어져 버리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되도 않는 위로를 하고 있는 내가 정말 뭐 하는 놈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버렸다.

그녀는 애써 고맙다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살짝 눈물을 보았던 것 같다.

다음주에도 시간 괜찮아.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음주에 다시 만나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기도 하고.. 너 지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머릿속에 아무것도 안들어갔을거야.

술하고 밥은 다음주에 사고

그녀는 애써 간신히 눈물을 멈춘 듯 빨간 눈으로 나를 보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 모습에 그녀의 남자친구에 대한 분노와 동시에 그녀가 눈물을 흘릴 만큼 좋아하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 둘은 서로 다른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헤어졌다.

 

오늘 고마웠어. 그리고 정말 미안해 바쁜데 시간 뺏어서. 다음주 주말 말고 이번 주 수요일 날 만나서 확실히 정리했으면 하는데 수요일 시간 괜찮아?

응 수요일 날 수업 없는 날이야 괜찮아. 그럼 점심때?

아니 술도 사줘야 하는데 저녁때 만나야지. 저녁 6시에 다시 합정 역 5번 출구에서 만나.

 

그녀와의 두 번째 약속이 잡혔지만 오늘 그녀의 눈물을 봐서 인지 어쩐지 맘이 탐탁지 않다. 그리고 수요일까지 난 무척 많은 생각과 망상에 사로 잡혔다.

그녀가 헤어지기를 바라며 그녀가 헤어진다면 언제쯤 고백을 해야 하는지를 계산한다거나..

그녀가 다시 남자친구와 만날 가능성을 따져보기도 하고..

고백하고 거절당했을 때의 멘트와 상황을 정리해보기도 했다.

어쨌거나 결론은 그 동안 쌓아왔던 아니 쌓여졌던 내 감정을 한번 정도는 표현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수요일 다행히 그녀의 표정은 이전보단 나아져 있었고 그녀의 질문에 대해 난 최대한 자세하고 쉽게 설명했으며 그녀는 즉시 노트북에 그 내용을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꽤나 골치 아픈 문제였는지 하나하나 개념이 이해될수록 그녀는 표정이 더욱더 밝아지고 모든 설명이 끝났을 쯤엔 그녀의 입가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다!! 진짜 고마워 너 아니였으면 한달 동안 도서관에서 책 뒤적이고 있었을 거야. 약속대로 주안상을 대접해 드릴께요! 오늘 엄마카드 들고 왔지롱!!! 그녀는 특유의 발랄함을 뽐내고 있었고 카페 조명에 반짝이는 그녀의 머릿결은 그녀의 화사한 기분을 대변해주기라도 하듯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골목길 어딘가에 꽤나 조용해 보이는 이자카야였다. 테이블은 5개정도로 굉장히 소규모였지만 다찌에 서있는 사장님의 표정이 왠지 여기는 소수만 들어올 수 있는 특별한 곳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앉아 메뉴 판을 보지도 않고 사시미 셋트와 그리 비싸지도 저렴하지도 않은 적당한 가격대에 정종을 시켰다. 아마도 가끔 오는 곳인지 편하고 능숙하게 메뉴를 주문했다.

 

그리고는 그녀는 과제에 대한이야기 그리고 친구 놈 여자친구의 이야기 등등을 무척 재미있게 쏟아 냈다. 적어도 내가 봐왔던 표정 중 가장 밝은 표정인 듯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웃으며 경청했지만 사실 어떤 내용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순히 내 머릿속에는 언제쯤 고백을 해야 하는지 타이밍만 재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점점 심장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입술은 살짝 떨리기까지 할 지경이었으니까.

 

갑자기 가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출입문 쪽을 향해있었다.

여기야~!!!

그녀의 말에 내가 출입문을 돌아보자 네이비색 정장을 깔끔하게 입은 누가 봐도 꽤나 잘생긴 남자가 웃으면서 들어왔다.

어 인사해 형태야 내 남친!

~ 안녕하세요 선형태 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수연이 남자친구입니다. 이기홍입니다.

오늘 너랑 술 마신다고 하니까 데려다 준다고 일 끝나고 들린 거야. 자기야 오늘 형태가 진짜 많이 도와줬어. 전에 얘기했었지? 선예 남친의 친구.

그녀는 남자친구가 오자 더 기쁜 듯 더 환한 표정으로 재잘 거리고 있었다.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난 그 모습을 보며 어색한 미소로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 남자와 상대도 안될 거 같은 나의 모습에 처참함까지 느꼈다. 낮부터 그렇게 거울을 봤던 내 존재는 말 그대로 병신이란 말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는 능숙하게 나에게 건배를 제의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만나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했고 아까와는 또 다른 의미로 나에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난 당신의 여친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라는 연기를 필사적으로 해야 했다.

적어도 남자랑 둘이 술을 마시는 여친을 데리러 온다는 건 나에 대한 경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석잔의 술이 들어갈 때쯤 우리자리는 마무리가 되었고 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다.

아이 내가 낸다니까 왜 오빠가내.. 형태가 나 도와준 건데..~~

으이구 괜찮아~!! 그는 기쁜 듯 웃으며 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고 수연이는 그런 그의 팔을 잡고 매달리다시피 애교를 부리고 있었다.

 나는 한걸음 물러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끝내기 홈런을 맞은 투수인냥 처참한 기분으로 서있을 수 밖에

 

어쨌든 그렇게 술자리가 끝나고 나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그 동안 이 침대 위에서 상상했던 모든 망상들을 떠올리며 그 부끄러움에 발버둥을 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주 주말 친구들과의 모임에 그녀가 나왔고 그녀는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기 남자친구랑 셋이서 술 마셨다며 자랑을 하는 모습이 말로 형용하지 못할 또 한번의 비참함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내친구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지게 되었다. 자연스레 수연이와의 연락도 끊기게 되었다.

 

그래도 연락하는 끈이 있어 가끔 그녀의 소식을 들었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1년 후에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소식도 들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때와 같은 기대감은 생기지 않았다.

 

우연히 학교 근처에서 수연이를 만났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로 수연이에게 인사만 했을 뿐 별다른 인연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3년인가 지났을 때쯤 내 친구 놈은 헤어졌던 예전 여자친구를 만나 기적처럼 결혼했다. 예식장에서 그녀를 보았을 때 그녀는 여전히 멋진 남자친구와 함께인 채로 였다.

그리고 나 역시 수연이 못지 않은 화사한 내 와이프를 수연이에게 인사시킨 걸로 20대의 내 찌질 했던 첫사랑이 완벽하고 서로가 행복한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김이나 작사가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 김이나씨가 작사를 할때 감정에 치우친 작사가 아니라 어떠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 세세한 부분을 가사로 옮긴다고 하는 강연을 보고 저는 반대로 노래를 듣고 세세한 상황을 에세이 형태로 적어보기로 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딱히 올릴곳은 없고 이곳에 올려봅니다 ^^

댓글 : 3 개
감정이 잘 느껴지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이 곡 좋아해서 가사가 귀에익는데 글읽어보니 감정 이입 되네요 늦은밤 잘 읽었습니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