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 부안사태를 아십니까?2017.11.10 AM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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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2003년 의경근무중이었고

 

창원에 근무중 부안으로 중대전체가 지원 나갔습니다.

 

방폐장 반대 시위로 알고있습니다.

 

 

 

그 곳은 전쟁터나 다름없었습니다.

 

마치 택시운전사의 광주 모습을 보는것과 같은

 

도로 곳곳 불탄 흔적들, 문닫은 가게들, 곳곳에 떨어진 가스통들

 

 

 

 

생지옥과 같은 경험에 아직도 가끔 그곳의 악몽을 꿉니다.

 

나무위키에서는 [준전시상황]이라고 표현하네요.

 

그 당시도 언론통제되어 매일 뉴스보시던 부모님도 모르셨던

 

마치 80년의 광주를 재연한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의경이었어서 의경입장으로 얘기하자면.

 

시위대들이 대나무를 비스듬히 짤라 죽창을 만듭니다.

 

그걸로 찌르면 그나마 막기나 좋겠는데.

 

땅바닥에 수추례 내려처서 갈기갈기 여러갈래의 창을 만듭니다.

 

그 상태로 찌르면 하이바 투시망도 뚦어서 한달 후임은 눈에 찔리고 한 후임은 허벅지 살이 찟어졌습니다.

 

 

 

 

지금와서 검색해봐도 자료가 많이 없네요.

 

이유와 어찌되었던 슬픈 사건일거고

 

부안군청앞에서 시위대와 대치중 

 

불붙은 LP통을 우리쪽으로 굴리던 그 시위대의 모습을 아직도 뇌리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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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나무위키 펌

 

 

 

2003년 7월 저준위 방사능 폐기장 유치문제를 놓고 벌어진 대규모 유혈사태. 제2의 안면도, 굴업도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김종규 당시 부안군수가 지역발전이라는 명분으로 주민과 협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방폐장 유치를 결정했는데,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거센 시위를 벌였다. 이를 막기 위해 인구 6만 명의 부안군에 무려 1만 명의 경찰이 배치되는 준전시상태가 벌어졌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전경들이 이동할 때 최소 중대 단위로 뭉쳐다녀야 할 정도였다. 시위지역 부근 골목에 복병(...)이 깔려 있어 이동하는 전경들 측면이나 후미를 기습하는 일도 잦았다.


이 당시 전의경 근무자들은 이 지역을 생각 하면 치를 떤다. 시위대의 폭력이 상식 따윈 버려버린 수준이었기 때문.

 

 

 

 

 

엄청난 반발에 겁을 집어먹은 부안군수는 산속의 절로 도피를 하고 경찰병력을 배치해서 주민을 막으려 했는데, 분노한 주민 수백명이 경찰의 봉쇄망을 뚫고 들어가 군수를 집단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주민 45명이 구속되고 121명이 불구속 기소됐으며, 경찰과 주민 5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렇게 난리를 치면서 부안군의 방폐장 유치는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런데 그후 경주시가 방폐장을 유치하면서 그 대가로 많은 이익을 얻게 되었고, 이에 부안사태가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되었다. 결국 니가 잘못했네, 네가 잘못했네 하는 식으로 의견이 갈리면서 지역 분위기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고...

 

 

 

이 초유의 부안 사태는 행정학계에서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사전에 충분한 행정PR 없이 일방적인 행정을 추진하면 어떤 부작용이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고 있다. 만약 부안군수가 사전에 충분히 PR을 했더라면 주민을 설득할 기회도 있었을 것이고, 설령 설득하는데 실패했다고 해도 이후 경주시의 유치 성공을 통해서 교훈을 얻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주민을 무시한 독단적 결정과 여러 가지 오해가 중첩되면서 사태가 일어났기 때문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뒷맛이 영 개운치 않게 되었다. 부안 사태에 대해 물어보면 주민들은 아직도 손사래를 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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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읍내 '아담 사거리'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군민들이 가스통 3~4개를 폭파해 경찰을 위협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안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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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8 개
03년 1월군번 전북지역 방순대였는데 일경부터 시작해서 상경까지 부안을 왔다리갔다리 ㅎㅎ 부안에서 밖으로 통하는도로에 타이어 쌓아놓고 불붙여서 몇일동안 못나갔던 기억이 ㅋㅋ 젓갈폭탄 떵폭탄 ㅋㅋ
전북 방순대면 엄청 고생하셨겠네요 전 창원방순대라 2주씩 3번 파견나간것도 이렇게 기억에 남는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함께 기억하는분을 만나게되어 반갑네요
완장 찬 인간인 임기안에 치적 하나 만들어서 이력서 추가할려다가

애꿎은 사람들끼리 사단나는 것이

"역사의 수레바퀴" 라는 고상한 말의 진실일 때가 많죠...

고생하셨습니다. 무어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ㅠㅠ
감사합니다. 지금은 그 지옥현장에서 광주처럼 무력진압이 대대적으로 강행되지 않았고 거기에 제가 동참하지 않을수 있었단 사실에 감사할따름입니다.
근데 딴것도 아니고 방폐장이면 지역주민 반응도 이해가 가긴 하네요
먼저 주민 동의부터 얻으려는 노력을 했어야지... 꼴통같은 군수놈
나무위키에도 무리하게 진행하는 행정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네요.
윗분 말씀처럼 이력서 한줄에 애꿋은 주민과 의경만....
저도 03 전경입니다 ㅋㅋ
군청앞 삼거리에서 불붙인 엘피지통 굴러 다니고
그와중에 진압봉 사용금지 명령 떨어져서 속수무책으로 쳐맞던 나날
거기에 젓갈탄 맞아서 덕분에 10년된 진압복 신형으로 교체 ㅋㅋㅋㅋ
젓갈탄 ㅜ.ㅜ
무슨 생선 썩힌건지 어유 그냄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 중대 수하나는 불붙은 LP통 굴러오는거 보고 대장 버리고 도망가서 나중에 영창갔었어요.ㅎㅎ
저도 저기 갔다옴. 전국에 있는 중대가 2~3주씩 교대로 내려갔었는데.... 휴가외박 다 짤리고.. 생각할수록 빡침. 버스 파손시켜서 한겨울에 찬바람맞으며 달리고..
부안다녀오셨군요.
힘든 기억을 공유 하니 좋네요.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와 부안 오랜만이네요
새총에 볼트큰거 넣어서 헬맷이 뚤려서
많이들 다치고 그랬는데 ...
볼트새총도 나왔었죠.
생각해보니 정말 무서운 무기들이 많았네요.
봉지에 인분이나 젓갈 넣어서 던지고, 차 타고 돌진하고...
숙소가 마땅차 않아 기대마나 경기장 바닥, 식당 임대해서 식탁들 치우고 바닥에서 자고 너무 힘들었던 기억만 나네요.
덕분에 식당주인 분들은 매출 많이 올렸지 싶습니다.
저희도 어디 식당 옆 천막같은데서 막사처럼 치고 잤던 기억이 있네요.
그때 짬이 안되서 2주동안 샤워는 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해서 봉와직염 걸렸었지요.
인근주민이었는데 후에 후회많이들하더라구요.
그런가요
경주가 환영하면서 유치했다는 얘기는 들었네요.
침체되있던 경주가 활성화되었다고...
군수 진짜 쓰레기네 ;;;;동네사람들 완전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놨네 ;;
주민동의없이 무리하게 진행한 상황이 이렇게 되네요
와~~진짜 저도 02군번 의경출신인데 하필 1기동대 ㅋ부안하면 치가 떨리죠
계급도 일경때였던거 같은데 데 진짜 군생활중에서 제일 힘들었던게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랑
부안 사태였는데 아직도 생각하면 제일 위험하면서도 엄청 고생했던게 생각나네요
가서 한달정도로 폐교같은데서 자고 또 자대와서 있다가 아마도 다른 중대들이랑 교대로
왔다갔다 한거 같은데 짐 싸는것도 힘들었고 고참들이 힘드니까 진짜 밑에 쫄병들은 말할것도 없이
더 힘들었죠 부상당한 부대원들도 있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씼지도 못하고 땅바닥에서 진짜 먹고 자고했었네요 지금 생각해보니
아니 이렇게 기억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을 줄이야
정말 고생하셨군요
일본 나리타공항 만들때도 비슷한 상황이...
일본도 마찬가지였군요
전 정말 운좋게 04 1월군번이라 선임들한테 말로만 들었는데도 끔찍하더군요. 무슨 삼국지도 아니고 가스통 불 붙여서 굴린다는 이야기 듣고 귀를 의심했는데.....몸 건강히 제대하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마 지옥이라고 표현할수있겠네요.
살아생전 그보다 저한 지옥같은 모습은 못볼같아요.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군수란 놈은 맞아 죽지 않은게 다행이죠.
감사합니다.
실제로 거의 맞아 죽을뻔했습니다. 집단구타를 2회나 당했으니.
고생 많으셨네요. 근데 서해안에서 선박사고 많은거 생각하면 안된게 다행이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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