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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최악의 트레이드2011.04.05 PM 11:00
아무리 철두철미한 계산 끝에 일을 진행했더라도 뜻밖의 결과가 날수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것은 종종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야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구단들은 저마다의 이해관계를 생각해 항상 철저한 계산 끝에 트레이드를 시도하지만, 결과는 항상 한쪽은 웃고, 한쪽은 우는 경우가 많았다.
▲ 1986년 한대화(OB) ↔ 양승호, 황기선(해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등극한 한대화는 기대 속에 고향팀 OB에 입단했지만, 처음 3년 동안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간염을 앓고 있던 한대화에게 OB 김성근 감독의 혹독한 훈련은 너무나 버거웠고, 설상가상으로 이것을 게으름 피우는 것으로 오인한 김 감독에게 미운털이 박히면서 자신의 기량을 펼쳐보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1986년, OB는 해태로부터 3루수 양승호와 투수 황기선을 받는 조건으로 한대화를 해태로 보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베어스 역사에 남을 최악의 결정이었다. 자율훈련을 강조하는 김응룡 감독과 동국대 시절 은사인 김인식 코치 밑에서 한대화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고, 트레이드 첫해 .298의 타율에 14홈런 66타점을 기록하는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후 찬스 때마다 한방씩을 터뜨려주며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한대화는 해태에서의 8시즌동안 .290의 타율에 128홈런 501타점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치며 6번이나 팀의 한국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86년부터 91년까지 6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등 통산 8번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3루수로 팬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반면 OB가 한대화를 내주면서 데려온 양승호와 황기선은 모두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으로 1~2시즌을 뛰는데 그치는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90년 임형석이 등장하기 전까지 3루수 부재로 고민했던 베어스 입장에서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트레이드였다.
▲ 1990년 김상호(LG) ↔ 최일언(OB)
트레이드 사실이 알려지자 팬들은 OB가 미쳤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최일언은 1986년 19승 4패 평균자책점 1.58을 기록하는 등 전년도까지 6시즌 동안 65승을 쓸어 담은 최고의 에이스 투수였던 반면, 김상호는 입단 3년차를 맞이한 24살의 젊은 유망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OB의 결정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LG의 유니폼을 입은 최일언이 그해 3승을 기록하는데 그치며 몰락한 반면, 김상호는 매년 10개 안팎의 홈런을 기록하는 꾸준한 장타력을 과시하며 팀의 4번 타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특히 1995년에는 2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잠실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한 팀 소속 선수로는 최초로 홈런왕 자리에 올랐고, 생애 첫 MVP와 함께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끌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결과적으로 OB 입장에서는 한대화를 트레이드 한 실수를 만회하는 최상의 트레이드가 된 반면, LG는 ‘아낌없이 주는 LG’의 서막을 알리는 최악의 트레이드였다.
▲ 1993년 이상목(삼성) ↔ 박선일(빙그레)
주전포수였던 이만수와 김성현의 급격한 체력저하로 백업포수가 절실했던 삼성은 1993년, 빙그레로부터 포수 박선일을 받는 대신 투수 이상목을 내주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당시 박선일은 타격에 소질을 보이던 공격형 포수로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들 나이였기에 삼성의 결정은 현명한 판단으로 보였다.
하지만 박선일은 첫 시즌을 제외하고는 부상으로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되려 이상목이 괄목한 만한 성장세를 보이며 팀 이름이 한화로 바뀐 이글스의 선발투수로 자리매김하며 특유의 낙차 큰 포크볼을 무기로 좋은 활약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9년, 이상목은 송진우, 정민철과 함께 선발 트로이카를 이루며 14승 8패 4.29의 평균자책점으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이끌며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또한 2003년에는 32살의 나이에 15승을 기록하며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2008년에는 친정팀 삼성으로 돌아와 통산 100승을 기록하는 등 제법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보냈다.
지금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최악의 실수로 회자되고 있는 이 트레이드로 삼성은 당장의 출혈은 막을 수 있었지만 10년간 선발진을 책임져 줄 수준급 선발투수를 놓치고 말았다.
▲ 1995년 김현욱, 유명선(삼성) ↔ 윤혁, 최한림(쌍방울)
삼성은 구속이 느린데다 고질적인 허리부상까지 안고 사는 옆구리 투수 김현욱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1995년 노장이었던 유명선과 함께 쌍방울로 트레이드 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는 삼성이 이상목에 이어 저지른 또 한번의 실수였다.
구속은 느리지만 제구력과 변화구는 일품이었던 김현욱은 1996년, 부상우려에도 불구하고 99.1이닝을 소화하며 2.63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대활약을 펼쳤고, 이듬해에는 중간계투로 무려 157.1이닝을 던져 구원승으로만 20승을 올리는 경이적인 활약을 펼쳤다. 그가 기록한 20승과 1.88의 평균자책점, 90.9%의 승률은 모두 1위에 해당되는 기록이었고, 그는 그렇게 구원투수로는 최초로 투수 부문 3관왕을 달성했다.
반면 삼성은 한국 최고의 구원투수를 내주면서 데려온 최한림과 윤혁이 평범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되풀이 된 트레이드 실패에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고, 삼성은 이후 쌍방울로부터 김현욱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20억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해야만 했다.
▲ 1997년 전준호(롯데) ↔ 5억원(현대)
1997시즌을 앞두고 롯데는 투수력 강화를 위해 당시 실업리그 현대 피닉스에서 뛰던 문동환의 트레이드를 추진했다. 하지만 프로팀과 실업 팀끼리는 규약 상 트레이드가 불가능했고, 결국 롯데는 같은 현대계열인 현대 유니콘스에 당대 최고의 리드오프였던 전준호를 현금트레이드로 보내고 그 대가로 문동환에 대한 권리를 가져왔다.
즉,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5억원을 받는 조건으로 전준호를 현금 트레이드 시킨 후, 받은 5억원을 다시 현대피닉스에 위약금으로 지불하면서 문동환을 데려왔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언뜻 듣기에도 이상하고 복잡한 이 트레이드의 대가는 참혹했다.
최고의 리드오프를 잃어버린 롯데의 성적은 곤두박질쳤고, 수년간을 1번 타자 기근에 시달리며 보내야 했다. 반면, 최고의 리드오프를 데려온 현대는 전준호를 필두로 최고의 타선을 구축하며 1998년과 2000년, 그리고 2003년과 2004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롯데는 김대익과 같은 젊은 유망주들이 전준호의 공백을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판단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전준호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한 선수였고 당대 그 누구도 그의 공백을 메우긴 힘들었다. 결국 리드오프 부재에 시달리던 롯데는 7년이 지난 후 40억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투자해 정수근을 영입했다.
한편, 전준호의 트레이드를 지시한 것은 사실 현장이 아닌 구단 고위층이었다. 때문에 트레이드 당일까지도 선수단과 김용희 당시 롯데 감독은 전준호가 트레이드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준호의 트레이드 소식을 뒤늦게 신문기사로 접한 김 감독은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며 롯데 관계자에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프로야구 역대 최악의 트레이드로 꼽힐 만하다.
▲ 2005년 이용규, 홍현우(LG) ↔ 이원식, 소소경(KIA)
2005년 당시 LG는 외야자원은 넘쳐나는 반면, 투수진은 심각한 기근에 허덕이고 있었다. 때문에 LG는 KIA로부터 투수 이원식과 소소경을 받는 조건으로 넘쳐나는 외야 유망주 중 한명인 이용규와 ‘FA 먹튀’ 홍현우를 보내는 2-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하지만 이원식과 소소경은 2005년 각각 13경기와 2경기에 등판하는데 그치는 등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반면 KIA의 유니폼을 입고 출장기회를 잡게 된 이용규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공-수-주에서 모두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대한민국 대표 리드오프로 자리매김하며 국가대표 외야수 자리까지 꿰차는 등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오늘날 이대형의 낮은 출루율로 고민 중인 LG는 결국 이 트레이드로 국가대표 리드오프를 잃고 말았고, ‘아낌없이 주는 LG’의 명성을 잇는 또 한번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물론 이용규가 외야진이 포화상태인 LG에 남았더라도 지금처럼 성장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2009년 김상현, 박기남(LG) ↔ 강철민(KIA)
2009년 FA로 3루수 정성훈을 영입한 LG는 포지션이 중복되는 김상현과 박기남을 내주고 부족한 투수진 보강을 위해 KIA로부터 강철민을 데려오는 2-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최악의 트레이드는 이렇게 탄생했다.
거포 유망주였지만 LG에서는 좀처럼 빛을 보지 못했던 김상현은 고향팀 유니폼을 입고 심적인 여유를 찾자 몰라보게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그 해 .315의 타율에 36홈런 127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끄는 것은 물론, 생애 첫 MVP까지 거머쥐었다. LG에선 미운 오리에 불과했던 그가 KIA에선 백조로 환골탈태 한 것이다.
김상현과 마찬가지로 LG에서 이렇다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박기남 역시 백업 내야수로 활약했고, 작년에는 김상현의 부상공백을 메우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반면 LG의 유니폼을 입은 강철민은 기대와 달리 부상에 허덕이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LG는 KIA에게 최고의 리드오프(이용규)와 최고의 거포를 모두 준 셈이다. 프로야구의 전력평준화를 위해 노력하는 LG에게 KIA는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이외에도 마해영-이계성+김주찬, 송지만-권준헌, 심정수-심재학, 박재홍-김희걸
문동환-채상병, 임선동-안병원등도 야구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자주 회자되고 있다
댓글 : 4 개
- 노이즈맨
- 2011/04/05 PM 11:15
출처가 없는데..본인 블로그에 올리신 글인가요?
- torresmania
- 2011/04/05 PM 11:18
LG가 기아한테 많이줬네요 ㅋㅋ
박기남도 작년에 꽤하지않았나요??
박기남도 작년에 꽤하지않았나요??
- 리린
- 2011/04/05 PM 11:25
믿고쓰는 LG산....ㅠ_ㅠ
- Artyna
- 2011/04/05 PM 11:26
김시진 <-> 최동원이 없는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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