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허상과 같은 의리 그들의 하얀거탑 [명장]2011.07.17 AM 11:08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첨밀밀>과 <퍼햅스 러브>를 감독한 홍콩 진가신 감독이 차기 작품으로 장철감독의 <자마>를 리메이크를 한다고 했을때 모두들 놀랐다.멜로 영화를 주로 만들던 감독이 갑자기 노선을 바꾼것도 그렇고 무려 4,000만 달러(US$)를 끌어 모아서 이 영화를 완성시키게 된 것이다. 진가신 감독은 이 중 1억 위앤(126억 원)을 이연걸의 출연료로 지급했다. 그가 얼마나 이 영화의 세계배급에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명장>은 장철의 <자마>와 마찬가지로 1870년 중국에서 일어났던 ‘마신이(馬新貽) 살해사건’을 소재로 삼는다. 마신이는 양무운동을 주도한 증국번 아래서 태평천국의 난 등을 진압하며 출세가도를 달렸던 엘리트지만 장문상(張汶詳)의 비수에 찔려 죽은 사건이다. 자금성의 실력자 서태후까지 놀란 이 사건은 반년 넘게 철저한 수사를 진행했지만 뚜렷한 암살동기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은 곧 수많은 음모론과 소설적 상상력이 덧붙여져서 이 사건을 청대 4대 미스테리의 하나로 만들고 말았다. 역사학적 연구에 따르면 장문상이 마신이를 죽인 것에는 적어도 5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그중 가장 대중적인 것이 치정에 얽힌 살인극이다.

진가신 감독은 이런 통속적 시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촬영과정에서 <자마>(마[馬]씨를 찔러[刺] 죽였다는 뜻) 라는 제목을 <투명장>으로 바꾸었고 주요 캐릭터의 이름도 새롭게 바꿔놓았다. 치정보다는 더 큰 명분과 갈등을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긴 셈이다.

하지만 구전 역사와 달리 <명장>은 치정극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형이 동생의 아내와 눈이 맞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또 다른 동생이 이들을 응징한다는 이야기는 상당히 축소됐다.그 대신 이 영화는 남성들이 잘 내세우는 의리, 우정, 형제애 같은 가치의 실체와 본질을 구명하려 한다.


-홍콩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목숨보다 소중한 의리는 없다-



남자들의 허구적인 유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큰형 노릇을 하는 방청운이다. 1600명의 병사를 잃고서도 살아남기 위해 시체더미 안에서 죽은 척했을 정도로 생존력이 강한 그는 동생과 그 추종자를 이용할 줄 아는 영민함과 교활함도 갖고 있다.

그가 투명장의 맹세로 도적들과 의형제를 맺은 것은 ‘죽음을 넘어서는 의리’를 믿어서가 아니라 도적들을 병사로 끌어들여야만 정치적 재기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800명의 군사로 5천명의 태평군을 상대한 서성 전투에서 무모한 전략을 짤 때나 소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정치적 라이벌이자 개인적 원수인 하괴에게 손을 벌릴 때 방청운의 머릿속에는 정치적 야망만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방청운만 나쁜 놈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진가신 감독은 말한다. “조이호와 강오양,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도적들이 청의 군대에 들어간 것은 방청운의 맹세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방청운을 따른 건 군대에 가면 밥을 주고 돈을 준다는 말 때문이다. 의리와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들의 관계는 결국 서로에 대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결과적으로 선과 악의 경계는 애매해진다. 한 성을 함락시킨 뒤 방청운은 아녀자를 강간한 10대 소년 두명을 본보기 삼아 처단하려 한다. 이때 조이호는 “(성을 점령한 뒤) 3일 동안 마음껏 약탈하는 것은 관례입니다. 그 여자들의 가족을 죽이고나서 이제 와서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우리 형제들을 죽인단 겁니까?”라며 반발한다.

-선인과 악인의 불분명함-



이에 방청운은 이렇게 답한다. “우리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해 군대에 들어왔다. 모든 사람들을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싸우는 목적이다.” 어쩌면 그건 방청운의 진심일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허울 좋은 대의명분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때가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3일 동안만큼은 모든 악행을 용인하자는 의견에 동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후반부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방청운과 조이호의 대립은 선과 악의 대립이라기보다 감독의 말마따나 “완전히 다른 이데올로기와 신념” 사이의 충돌이다. “방청운은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해준다고 믿는 현실주의자이고 조이호는 수단이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믿는 로맨티시스트다.” 선과 악의 모호한 구분은 그가 이 영화를 <자마>의 리메이크작으로 출발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자마>에서 마신이 역할은 장철 감독 영화에서 항상 정의의 편에 섰던 적룡이 맡았는데, “그 누구도 적룡을 악당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고? 적룡이니까. 자연히 관객은 그가 나쁜 일을 하는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명장>은 중화권에서만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제작비를 회수했고, 액션스타 이연걸의 새로운 연기변신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금상장 남우주연상을 안겼다.원제는 (투명장[投名狀])·<수호지>에서 사람의 목을 가져감으로써 비로소 양산박에 들어갈 수 있었던 임충의 에피소드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익숙하지 않은 용어라 생각했는지 <명장>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는데 그냥 단순한 전쟁 블록버스터 처럼 보이는 이 제목은 개인적으론 잘 못 붙혔다고 생각한다.
댓글 : 0 개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