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일기] 독서 일기. [김춘수 사색사화집]2011.06.04 PM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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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사색사화집』, 김춘수 엮음, 현대문학, 2002.


모든 책읽기는 얻는 것이 있다. 지식의 습득이거나 유희거나 혹은 이도저도 아니라도 최소한 시간 때우기 심심풀이의 목적이라도 분명히 책읽기에는 얻어가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얻어가기는 독자들의 성향에 따라 제각각이며 동일한 책이라도 독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책에서 얻어가는 알맹이들이 분명 다르리라 생각된다.


『김춘수 사색사화집』에서 사화집이라는 단어가 꽤 낯설었다. 사전을 뒤적거려보니 ‘짧고 우수한 시의 선집’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는데, 대게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하는 시집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재미있었던 건 이 시화집이라는 단어의 어원이었다. 시화집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앤톨로기아(anthologia)로 ‘꽃을 따서 모은 것’이라 한다. 옛사람들의 조어 능력에 간혹 감탄을 하게 된다. 시는 이미 꽃인 셈이다.


머리말에 따르면, 김춘수는 이 사화집을 일종의 실천비평이라고 규정하고 또한 작품 검증을 통한 한국의 당대 시사(時仕)라고 한다. 하나의 사화집에 이정도의 서문을 붙이는 것은 김춘수라는 이름값이 있기에 분명 가능한 노릇이리라. 김춘수는 수록된 마흔여덟 편의 시를 네 갈래로 구분하였다. 전통 서정시, 피지컬한(사물적인) 시, 메시지가 강한 시, 현대성과 후기 현대성을 지향한 시라는 구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구분은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써보니 이 시화집이 매우 딱딱한, 전문적인 시의 학습을 위한 모음집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모음집은 시를 사랑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 시화집보다 좀 더 무게감이 실리는 것은 한국 현대시의 대가 김춘수가 고르고 고른, 한국 현대 시사를 빛낸 특색 있는 시들의 모음이기 때문이다. 음식에 빗댄다면 임금이 받는 바깥반상 12첩과 다를 바 없다. 또한 여기에다 시의 뜻, 그 오묘한 무엇을 탐구하는 독자를 위해 식후 수정과처럼 깔끔한 해석까지. 이는 해갈과도 같지 싶다. 그래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꼭 한 번은 거쳐야할 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앞서 ‘얻어 감’이라고 끄적였는데, 굳이 이 말로 글의 첫 단락을 쓴 이유는 이 책이 내게는 색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조금은 긴 대학 생활에서 사화집은 내게 친구처럼 자리잡았다. 이십대에 가장 많이 훌쩍인 책을 꼽자면 단연 이 책이 첫손에 꼽힐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글을 쓰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어국문과 졸업생에게 시는 대체로 탐구의 대상이다. 밥은 씹을수록 단맛이 더 하다고 반강제적이나마 꾸준한 시와의 접촉은 내게 시의 맛을 알게 해주었다. 그 덕에, 맛에 맛 들인 이의 종착역은 맛을 만드는 이인 것처럼 나도 시를 꽤나 쓰게 되었다. 비록 쓰면 쓸수록 자괴감에 빠지긴 하지만 한가득 뱉어 놓은 습작 공책을 바라볼 때의 그 기쁨이란!


괜스레 군말이 많았는데, 하고 싶은 말은 일반적인 독자가 시 모음집에 대해 감상의 얻어가기를 한다면, 나는 이를 시에 대한 지식 얻어가기, 즉, 참고서처럼 사용한다는 것이다. 시를 접한 지는 꽤 되었지만 수준은 갓난아기 옹알이 정도라 사화집은 내게 시의 레시피들이 잔뜩 적혀 있는 요리서처럼 쓰인다. 후배들과 시토론 할 때는 라면처럼 후다닥 펴보고, 시를 쓸 때면 찌개처럼 진득이 졸여 보며, 퇴고할 때는 밥처럼 꼭꼭 씹어본다. 사골 국물처럼 시에 관해 우려내고 우려내고 우려내며 이 책을 보는 셈이다.


사화집에 수록 된 시에 대한 초점도 매년 동아리에서 시화전을 할 때마다 다르다. 풍경에 눈이 갈 때는 사물적인 시들을 살피는 반면, 왠지 우울할 때는 실험성이 강한 시들을 기웃거리곤 한다. 요즘 가장 눈길이 가는 시는 이형기 시인의 ‘루시의 죽음’이다. 김춘수는 이 시는 시점으로(point of view) 시를 견뎌내고 있는 드문 예라 평가한다. 순수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며 다만 순수시로 가는 지향만이 있을 뿐이라며 이형기의 시는 순수한 증오로 빛을 낸다고 했다.


이 평을 보며 문뜩 허영만의 만화 ‘오! 한강’에서 주인공이 떠올랐다. 그는 화가로서, 초기에는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에 따라 급진적인 선동 그림을 그렸지만 결국 경지를 이룬 그의 경향은 하이퍼리얼리즘, 사진과도 같은 극사실주의였다. 한 점의 왜곡도, 변형도, 과장도, 축소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그것. 주인공의 이와 같은 변화는 시인이 길과 닮아 있다. 순수한 본질을 추구하며 항상 본질과 맞닿아 있으려는 구도의 자세. 만화의 주인공의 붓놀림과 이형기시인의 필체는 닮아 있다. 진 · 선 · 미는 이데아의 범주에서는 동일하다는데 궁극을 추구하는 이의 자세 또한 같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요즈음 무척이나 이형기 시인의 단순하지만 그 특별한 눈높이를 닮아가고 싶다.


독서 일기를 쓴다는 게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모양새이다. 돌아가서, 결론짓자면 이 사화집은 김춘수의 안목으로 빛난다.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는 것이다. 여기 수록되어 있는 시집은 어디하나 흠잡을 때 없는, 후대에 모범이 되는 ‘좋은’ 시이다. 그것만으로도 책의 가치는 분명하지 않을까? 굳이 흠을 잡자면 시보다 김춘수의 해설에 대한 해석에 있다. 시론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몇몇 들어보지 못한 용어들이 상당히 많다. 혹시 개정해서 나온다면, 꼭 용어에 대한 주석을 들라고 충고하고 싶다. 날라리 졸업생이라 그런지 모르는 단어가 꽤 있었다. 이와 같은 점은 일반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짐이 되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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