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일기] 독서 일기. [쎄느강은 좌우를…], 홍세화, 한겨레출판사, 1999.2011.07.11 AM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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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 홍세화, 한겨레출판, 1999.


내가 이 책을 처음 보게 된 계기는 군복무 시절 엉겁결에 밀려 나간 불교 종교 행사에서였다. 여유와 관용이라곤 눈 씻고 찾아도 볼 수 없었던, ‘원리원칙’과 ‘대강대강’의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음이 기묘한 이중주를 이루고 있었던 군 생활에서 지은이가 소개한 ‘똘레랑스’의 개념은 내게 일종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똘레랑스의 첫 번째 의미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의 자유 및 다른 사람의 정치적, 종교적 의견의 자유에 대한 존중"이다. 즉, 상대방의 정치적 의견, 사상, 상대방의 이념 등을 존중하여 자신의 사상, 이념도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의미로는 "특별한 상황에서 허용되는 자유"이다. (원래 허용 오차를 뜻하는 공학 용어인데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어 "특별한 - 자유" 라는 뜻이 된 것이다.)

첫 번째 말뜻이 나와 남 사이의 관계 또는 다수와 소수 사이의 관계에서 나와 남을 동시에 존중하고 포용하는 내용을 품고 있다면 두 번째 말뜻은 권력에 대하여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다. 즉, ‘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금지되는 것도 아닌 한계자유’를 의미한다. 거리에 아무 곳에나 쓰레기를 버리는 이들이지만 ‘그래야 청소부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똘레랑스 사회에 사는 프랑스인들이다.


홍세화는 한국과 프랑스를 비교하여 ‘한국은 정이 흐르는 사회, 프랑스는 똘레랑스가 흐르는 사회.’라고 말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똘레랑스’는 이미 프랑스인들에게 일종의 ‘삶의 철학’으로 자리 잡은 반면 ‘정’은 아직 철학으로의 발돋음을 못한 상태이며 또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잊혀져가는 ‘생활 방식’이라는 점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기는 하나 프랑스 사회에서 똘레랑스가 자리 잡게 된 주요한 원인은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시민 정신’이라 생각한다. 개개인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권력에 저항한 당시 프랑스인들의 정신이 현재에도 계승되어 잘못된 권위에 대항할 줄 알고 불의에 항거할 줄 아는, 신민이 아니라 시민으로 한 단계 성숙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확신한다.


저자는 이런 프랑스의 면면을 몇 가지 일화로 소개하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장 폴 사르트르에 대한 드골 대통령의 말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자국의 식민지 정책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다. 스스로 알제리 독립자금 전달책으로까지 나섰다. 이는 문자 그대로 반역행위였다. 당연히 사르트르를 법적으로 제재해야 한다는 소리가 드골 측근들의 입에서 나왔다. 이에 대한 드골의 “그냥 놔 두게. 그도 프랑스야!”라는 대답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또한 프랑스의 철학교육은 부러움마저 자아내게 한다.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에 철학과목을 포함시키는 세계 유일한 나라라는 사실과 문과 계열의 최고 수재들만 입학 가능한 ‘노르말 쉬페리외르(고등사범)’ 출신들이 졸업하면 우선 고등학교 철학교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러한 철학 교육은 나아가 프랑스 사회 전반에 ‘토론’ 문화가 자리 잡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이 두 가지 예만 들어 보아도 프랑스가 성숙된 문화 의식을 가진 국가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점들은 현재 한국사회가 21C 문화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요소라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지독한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려 왔다. 어이없게도 ‘친북’이냐, ‘친미’냐를 놓고 진보와 보수가 나뉠 정도이다. 이러한 변질에는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의 패해가 낳은 배고픔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면 ‘독재’라고 상관없다는, 그 당시 상황으로서는 절대 잘못되었다 할 수 없는 가슴 아픈 맹목적 추종을 낳았다. 더욱이 정권 또한 이런 상황을 정권을 유지하는데 악용하였고 그 결과 독재정권 몰락 이후에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진보는 ‘빨갱이’, 보수는 ‘꼴통집단’이라고 매도당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저자는 이런 측면에서 한국 사회와 프랑스 사회의 차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사회는 사회정의가 질서(안보)를 우선하는데, 한국 사회는 질서(안보)가 사회정의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우선한다.’라도 말하고 있다. 한국 사회나 프랑스 사회가 다른 까닭은, 프랑스의 기득권층 중에는 정치적 신념으로 자신의 계급적 ․ 계층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정의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에, 한국에선 거꾸로 비기득권층 중에서 질서(안보)를 택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산술 역학적 구도에서 보면, 한국의 기득권층이 분단 상황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기득권층은 분단 상태를 직접적으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분단 상태로 확보한 국가안보 이데올로기를 아무 데나, 그리고 아무 때나 끌어와 사회정의의 요구를 막는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홍세화는 이와 같은 한국 사회의 병폐를 크게 ‘지역주의’와 ‘극우’라는 문제점으로 분석하였고 그 대안으로 프랑스식 개인주의와 독일식 민족주의라는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사회 전체가 집단의 단결보다 개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하는 형태로 나아감과 동시에 지역에 얽매인 좁은 반목을 깨고 나아가 분단의 개념까지 뛰어넘어 한 국가로서의 Korea로 나아가자는 주장이다.


며칠 전 월간조선 10월호를 보다가 ‘발해’에 대한 인터뷰기사가 내 눈길을 끈 적이 있다. 그 사학자의 학설은 발해가 비록 지도층이 고려 유민이기는 하나 사회 구성원 자체가 말갈족이었기에 한국의 역사로 편입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는 주장이었다. 더욱이 인터뷰 말미에 ‘이제는 민족주의 사관에서 벗어나 국가주의로 역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내가 사학도가 아니기에 그 역사가의 주장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끝내 찝찝함을 떨치지 못한 이유는 그 ‘국가주의’ 관점을 지닌 역사가가 현재 분단 상황도 ‘국가주의’로 해석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이다. 혹시 모르겠다. 그 시사지가 조선일보가 아니었다면 다른 생각이 들었을지. 왠지 학설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

내가 ‘똘레랑스’가 부족한 탓이었을까? 홍세화씨라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북으로 흐르는 한강’은 아직 막혀있는 듯하다.



ps. 예전에 쓴 글입니다. 독서일기가 너무 띄엄띄엄하면 잊혀질 것 같아(;;) 올려보네요. 새 글을 원하시는 분(이 혹시나 있으실런지ㅠ.ㅠ.)께 실망을 드리는 것 같아 조금 저어되네요. 이틀 내로 '언싱커블(재난심리학)'에 대한 독서일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알려진 사고에 대한 일화가 많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다가 어느새 다 읽었네요;; 되게 유용한 책입니다. 그럼 다음 독서 일기 때 뵙겠습니다. 비 진짜 억수로 왔는데 비 피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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