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일기] 독서일기. 제노사이드. 종간 집단 학살.2013.01.25 PM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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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노사이드, 다카노 가즈아키, 김수영, 황금가지, 2012.


소설입니다. 제 독서 일기를 자주 읽어 주시는 분들이라면 눈치 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소설을 좀 멀리하는 편입니다. 90회를 넘은 독서일기에 소설은 단 한 회, 조지 오웰의 ‘1984, 동물농장’ 밖에 업로드 하지 않았지요. 그것도 그의 다른 수필들과 함께 엮어서요. 이유는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픽션은 논픽션을 넘지 못한다.’는 잠언이 진실임을 알았거든요. 계기는 26살, 대학교 졸업반으로 취업과 대학원을 고민할 때였습니다. 꽤 찌는 여름이었는데, 자취생이었던 저는 좁은 원룸에서 여름 나기에 지쳐 굳이 공부한다는 게 아니라 피서한다는 식으로 대학교 중앙 도서관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올해가 지나면 대학을 졸업하는데, 지성인이라 불리는 대학생치고 현대사를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그 뒤, 두 달 정도를 현대사에 몰두했습니다. 여러 현대사 책들과 각종 도보집이나 연감 혹은 보도 사진집 부류를 탐독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되게 열성이었습니다. 한 달 반 정도 남은 방학동안 한 스물대여섯 권은 본 걸로 기억하니까요. 한국사의 굵직한 부분들, 특히나 민간인이 하잘 없이 희생된 많은 사건들은 저 또한 아프게 했습니다. 제주 4.3 항쟁이라든가, 특히나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경우 도서관 한 켠에서 말 그대로 울면서 봤습니다. 정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봤습니다. 제 눈물 자욱 때문에 글자가 번지는 걸 보고 부랴부랴 닦은 기억도 납니다. 뭐랄까, 그전까지 ‘나는 나, 남은 남’이라 생각하며 한 명의 개인으로 살아온 제가, ‘대한민국 사회’라는 공동 운명체의 한사람 몫을 반 푼으로나마 떠맡을 수 있게 된 계기랄까요? 아, 물론 서울올림픽에 대한 자부심과 한일월드컵에 대한 흥분도 섭취했습니다. 산업화라 부르는,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그 특수한 자부심도 아들 세대로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여하튼 그 후, 이제까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호기심이 부쩍 늘어나게 되어 ‘느끼게’하는 소설보다 ‘알게 해주는’ 교양서적에 좀 더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소설이 손에 잘 안 잡혔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현실 중 숱한 사실 중에서 진실이라 믿을 만한 부분을 찾아내는 작업이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랬던 제가 올해는 소설을 많이 접해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뭉텅이 큰 거는, 어떤 분야든 ‘편식은 좋지 않다.’라는 보편적 진리 때문이고, 더욱이 ‘잘된 픽션은 항상 논픽션을 담보로 한다.’는 걸 깨달아서 그렇습니다. 특히나 그 중 잘된 픽션은 정말 다채로운 녹픽션의 항연을 독자에게 한 가득 안겨준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남들은 참 쉽게 아는 걸 저 같은 얼치기 도서애호가는 오히려 늦게 알아채는 경우도 많더군요. 어리석은 거죠. 서설이 길었습니다만, 오늘 소개할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가 바로 그런 부류의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소설을 알게 된 건, 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2012 행복한 책꽂이’를 통해서입니다. 이성주라는 작가분의 소개였는데요, 그가 이 책에 대해 놀란 건, 소설을 전개하기 위해 쓰인 수많은 배경지식 때문이었습니다. 글쓰는 사람으로, ‘도대체 이 책을 쓰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라는 물음이 절로 들었답니다. 첫 기획에서 25년, 집필에만 6년. 그만큼 많은 자료들이 동원되고 엮어졌습니다. 혹시 분류를 한다면, 몇 가지 대소주제로 묶어야할 만큼 다양한 자료들이 작가의 지적 편력 및 내공을 어림짐작케 합니다. 워싱턴 DC의 의사결정 구조와 용병회사 시스템에 대한 고찰, 그리고 그저 평범한 독자로서는 글줄을 읽을 수밖에 없는 숱한 생화학 지식 등. 이 모든 걸 작가의 ‘간접경험’만으로 일궈내었다는 건, 다카노 가즈아키의 비범함보다 그 성실함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좋은 글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발에서 나온다.’라는 격언이 새삼 새록하기까지 합니다.


‘제노사이드’라는 제목은 다들 아시다시피, 종족이 종족을 죽이는 ‘집단 학살’을 일컫습니다. 인종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genos'와 살인을 나타내는 'cide'를 합친 것으로, 특정 집단을 절멸할 목적으로 그 구성원을 대량 학살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1944년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이 국제법에서 집단 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며, 제노사이드를 공식적으로 처음 범죄로 인정한 것은 1945년 2차 대전 직후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을 기소할 때라 합니다. (시사용어사전, 2005 참조)


작가는, 이 한단어로 소설 내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사건을 그려냅니다.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이 동시대에 종의 생존을 걸고 다툰 역사적 사실부터, 지금 암흑의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아프리카 부족민들 간의 무자비한 세력 분쟁, 그리고 지금 종족으로서의 인류와 돌연변이로 태어난 개별 종으로서의 인류간의 각축까지. 이 세 가지 시간축이 차곡차곡 지층면으로 부딪치며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 중 주된 내용은 당연히, 현생 인류와 미래 인류의 싸움입니다. 모든 걸 거머쥐고 있는 현생 인류의 대표적 부족장 미국 대통령과 가진 세력은 전혀 없지만, 단 하나, 현생 인류로서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식과 통찰을 겸비한 미래 인류와의 싸움이 앞서 말한 숱한 자료들 속에서 생생하게 펼쳐집니다. 이러니, 독자의 구미가 절로 당길 수밖에 없습니다.


읽는 동안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소설 속에서 쓰인 과학적 사실 중 제가 다른 책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저번에 제목만(;;) 소개해 드렸던, 살인의 심리학(전쟁에서 전투원들이 겪는 통제된 상황에서의 살인 과정과 그 치유에 대해 논합니다)에서 나온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살해하기 거부한다. 심지어 자신이 죽는 상황에 놓이더라도’란 짧은 통찰 대한 통계적 설명, 그리고 진일보한 미래 인류를 지칭하는 이름이 ‘누스(Nous:영혼을 움직이는 힘, 물질 변화의 원동)’라는 소개 및 설명 등은 제가 예전에 한번 스쳤던 것들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뭔가 숨은그림찾기 하는 듯 했습니다. ^^


이 소설은 문장이 유려한 편이 아닙니다. 번역서라 원서의 어감을 알기 어렵다는 걸 밑바탕으로 두어도 뭔가 독자를 뻑가게 하는 ‘킬링 워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건의 나열과 그 사건을 아교 붙인 듯 이어지게 만드는 주인공들의 대사의 이어짐이 주류입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영도씨가 그의 획기적인 처녀작, ‘드래곤 라자’를 통해 보여준 심금을 울리는 명언들 같은 경우는 정말 눈 씻고 봐도 찾기가 어렵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약간 말을 돌려, 마이퍼 중 글 쓰시는 분이 많으신데 그 중 한 분이 강조하시는 문장론을 읽어 보았습니다. 뭔가 문장 씀에 격식이 있어 보였는데요, 저로서는 문장보다는 구성의 중요함을 더욱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문장으로 먹어주는 글들은 한창 때의 이외수나 김훈처럼 몇몇 특별한 작가들만 지니는 일종의 영감이 더불어 진 것들이거든요, 범재는 접근도 못할 경지입니다. 그러나 구성이 탄탄한 글은 끈기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들이거든요. ‘제노사이드’는 이렇듯 준재가 노력으로 쓰는 글의 최상층을 보여줍니다. (이 책의 작가를 폄하하는 게 절대 아니라, 단순 문장력만을 평한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문장력은 좋은 글의 요소 중 하나죠. 좋은 글의 정체성은 되지 못합니다) 그만큼 꽉 짜인 구성 속에서 간결한 문장이 주는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는 거죠.


올해 처음 산 소설인데, 정말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작가가 펼쳐 놓은 여러 생각할 거리도 꽤나 진중하게 다가오는데요, 한 · 일간의 우호라든가, 미국의 패권적 일극주의, 아프리카에 대한 국제적 무관심과 같은 시사적인 이슈도 독자로 하여금 건전한 문제의식을 지니게 합니다. 그것도 소설 특유의 뭔가 마음 동함을 덧붙여서 말이죠. 도서 정가는 15000원입니다. ^^




Ps. 표지 또한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아키라’를 아시는 분들. 내용 몰라도 그냥 막 사고 싶지 않나요? ^^;; 참. 앞 부분 잡설이 너무 길었네요. 참으시며 읽어주신 많은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_(_.,_)_



댓글 : 5 개
  • Tlee
  • 2013/01/25 PM 06:24
커터!
다카노 카즈야키씨의 신작이라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정작 작가분은 저 소설로인해 극우파로부터 위협을 받으시더군요
루리웹엔 정말 지성인 분이 많으시군요.. 꼬라지박호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종종 눈팅 좀 하겠습니다.. ㅎㅎ
저도 이거 재밌게 봤습니다. 같은 작가의13계단도 읽어보세요 최근 100분토론을 통해 불거진 사형제도의 모순을 그린 스릴러 형식의 소설입니다
제 관점에서는 번역도 제법 괜찮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작품은 항상 재미도 있지만, 뭔가 감정적으로 이입되는 부분도 큽니다...

오랜만에 나온 작품인만큼 구성과 재미, 지식적인 면에서 두뇌가 정말 즐거운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 13계단은 꼭 추천하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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