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일기] 간만에 끄적인 독서일기. [광장, 최인훈]2013.03.17 AM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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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장, 최인훈


작가 최인훈은 1973년 서문 「이명준의 진혼을 위하여」에서, “나는 12년 전, 이명준이란 잠수부를 상상의 공방에서 제작해서, 삶의 바다속에 내려 보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숨은 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았다.”라 광장의 첫머리를 시작했다. 즉, 『광장』은 이데올로기와 사랑에 대한 심도있는 고찰인 셈이다.


최인훈의 이데올로기는 특별하다. 남한의 이념과 북한의 사상을 함께 체험한 최인훈은 북한의 공산주의 이념에 대하여서도,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이념에 대하여서도 좀더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이는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과이다. 최인훈은 그의 말에서 1945~1950년까지 북한에서 거주했기에 쓸 수 있었던 소설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 두 이념의 허상과 실상을 첨예하게 깨달은 듯하다. 그가 이 두 이념에 대하여 어떠한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공산주의 이념이건 자유민주주의 이념이건 그에게는 한낱 인간성을 말살하는 추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김병익은 분단현실에 대한 인식을 냉철하고도 균형있게 간파했다는 점에서 최인훈은 1960년대 지식인들에 훨씬 앞서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90년대의 급진론자들보다 더 현실주의적이라고 평한바 있다. 생각해 볼 점은 앞서 말한 전문적인 평단의 평가보다 2000년대 이후의 청년 독자들의 반향이다. 『광장』을 읽으며 과연 우리네 청년들이 분단의 아픔과 현실을 그 시대 청년들만큼 절실히 그리고 간절히 받아들이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대답은 ‘아니오’ 인 듯하다.


최인훈은 창작의 본질적 목표는 북남 모두의 이데올로기에 좌절한 이명준의 모습을 그림으로서 북남의 허상을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청년 독자들이 『광장』으로서 북 남 모두의 체제 모순을 깨닫고 이에 대해 바른 비판을 하는 것이다. 거기다 더해, 체제를 넘어선 인간애의 발현이라는 역사의식을 지니길 바랐다고 생각된다.


문학이 고전으로서 현실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작품의 사상, 표현, 혹은 논리가 질적으로 높고, 정갈하며, 정연하기 때문이 아니다. 작품에 내포되고 있는 그네들의 삶이 아직까지의 현실에서도 새로운 독자들에 의해 재해석됨으로서 현실의 연장선상에 위치할 수 있어야 고전으로서 그 가치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본질적으로 독자의 바른 이해도 포함된다. 교육학의 거장 헤르바르트는 ‘인간은 교육받은 것, 그 이상은 없다.’라고 인간을 정의했다. 이 말을 앞 내용과 이어이어 정의 내린다면, 독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교육에서 벗어난 해석은 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문학은 독자에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머리로, 하나는 가슴으로. 이 둘은 동일 존재이다. 작품에 대한 지적인 이해와 감성적인 경험은 시너지 작용을 일으켜 비로소 작품 이해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이다. 즉 지적 이해가 부족하면 감동의 가치는 낮을 것이요, 진정 감동하지 못한다면 그 작품에 대한 접근은 불가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독서일기에서 난데없이 문학의 정의를 자의적으로 내리느냐면, 일부의 대학생들은(나를 포함한) 이 『광장』을 제대로 감동받지 못할 만큼 지적인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의 원인은 분명 근현대사를 괴리시킨 제도화된 역사 교육에 있다.


현행 정규교육제도는 그 끝을 갑오경장에 두고 있다. 역사 교과서의 대부분을 어쩌면 죽어버린 역사라 할 수 있는(현실과 괴리된) 고조선, 삼국, 고려, 조선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애석한 일이다. 이에 대해 강준만은, ‘현대사는 집권계층의 도덕적 타락에 의해 의도적으로 망각되고 있다.’라 주장한 바 있다. 현대사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다면 이는 한 세대에 대해, 현실에 대한 방관이요 미래에 대한 포기라 할 수 있겠다. 이점이 『광장』을 읽으며 안타까워했던 부분이었다.


마무리 지으며 한가지 덧붙인다면, 첫머리에 최인훈은 이명준을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숨은 바위에 걸려 질식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작가의 변대로 해석한다면 이 둘은 동등한 암초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이명준은 이데올로기의 방아쇠를 ‘윤애’를 통해 당겼고, 이의 결과에 대해 ‘은혜’를 방패로 삼아 도피했다고 생각한다. 즉 사랑은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삶의 중점이 아니라 변두리였던 셈이다. 틀린 해석일지도 모르나 이 점이 글 읽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ps. 독서 일기 게시물이 워낙 뜸해, 이제 대학 때 써두었던 글을 옮기는 실정입니다. 반성합니다. _(_.,_)_

댓글 : 2 개
광장은 이 시대 문학의 정전이죠. 여전히 젊은 소설이기도 하고. 광장의 방계 후손으로 김영하 빛의 제국을 꼽지만(물론 개인적으로) 뭔가 가볍고 조금은 작위적인 게 있고. 후보군(?)인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은 '아직 딱 뭐라 할' 처지는 아니고. 결론은 "중립국." 응?!
근현대사를 괴리시켜버린 역사교육에 대해 공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순간에 영향을 미치는 건 고려,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적어도 일제시대 이후인데, 중고등학교때 왜 그런 부분이 전체 역사 교육에서 미미한 부분을 차지하는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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