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읽기] 그래비티(Gravity, 2013)2013.10.24 PM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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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비티(Gravity, 2013).

감독: 알폰소 쿠아론
출연: 산드락 블록, 조지 클루니


이 영화는 텔링이 압도적인 영화입니다. 스토리만 평가하자면, 인공위성을 담당하는 스페셜리스트의 재난담 혹은 귀환기로 압축할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토리가 관객에게 깊은 수위의 감동을 주는 건 감독이 그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 다시 말해 영상, 음향, 소품, 연기 모두가 한 가지 주제의식을 관통하며 반복적 종합적으로 풀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의식이란 제목 그대로 ‘중력’, 다시 말해 필연적 이끌림이나 벗어날 수 없는 덩이 · 줄기로서의 인간을 의미합니다. 업이라고 테두리 짓기는 가볍고 인연이라고 울타리 두기는 무거운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기억으로 묶여지는 족쇄도 포함되지요. 그 복잡 미묘한 인간의 원초적 감수성을 감독은 제대로 건드리고 있습니다.


특히나 배경인 우주는, 이 거리감을 직관적으로 드러내는데 좋은 배경이 됩니다. 주인공 격인 두 우주 비행사는 주어진 환경에서는 항상 간접적 접촉만 이뤄지는 사이입니다. 우주 공간에서 서로 간의 접촉은 있을 수 없고, 근거리에서 나누는 대화마저 공기라는 매질 없이 통신이라는 기계적인 매개를 두어 이뤄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또한 내용으로 보면, 가치관이나 인간적 교감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진중한 주제가 아니라 일상이나 시시껄렁한 잡담에 불과한 내용입니다. 특히나 조지 클루니가 분한 맷 코왈스키역은 평소 대중이 인지하는 조지 클루니 이미지 그대로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범한 일상의 대화, 개인으로서는 결코 서로를 ‘이해’했다고 생각되지는 못하는 신변잡기의 대화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층 되며 무게감을 더해 영화의 마무리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적 의도를 전면에 드러내게 됩니다. 주인공이 생과 사를 결정짓는 절정 대목에서 연출된 아난강이라는 그린란드 원주민과의 말도 통하지 않는 대화, 평소에는 소음에 불과한 개 짖는 소리, 그리고 아기의 칭얼거림이 바로 그것이죠. 또한 더불어 친절하게도 감독은 여기가 변곡점이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의외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많은 관객들이 뜬금없었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개상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입니다. (장면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과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의도의 실마리는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의 딸에서 시작합니다. 딸은 이미 세상에 없는 추억 속의 인물입니다. 상심이 너무 컸기에 주인공은 추억으로조차 담지 못하고 아픈 상처로만 남겨 두었습니다. 굳이 되뇌려고 하질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억은 결국 주인공 본인이 안고 갈, 아니, 안고 간다기보다 오히려 그것 또한 삶에 대한 애착과 동력이 되는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상처가 함의하는 일반적 뜻의 위상이 전복된다고 할 수 있죠. 삶의 상처 또한 삶을 지탱하는 기둥이라고 감독은 강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목의 이유 또한 밝혀집니다.


그래비티(Gravity), 중력은 현 우주의 물리법칙,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중 가장 약한 힘입니다. 중력이라고 하면 순간 떠오르는 태양이나 지구의 압도적 크기에 눌려 오해할 수도 있지만, 중력의 허약함은 굳이 물리적 설명 없이도 건조한 날에 비질할 경우 빗에 머리카락이 달려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예. 그렇게 약한 힘입니다. 일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쳇바퀴 돈다는 진부한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을 정도로 반복적이고 지루하죠.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의 다수를 담보 잡고 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영혼의 짝은 극 중 지워진 (그럼으로 이상화된) 아이로서 상징되는 것처럼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죠. 사실 부모 자식 간도 분신과 분신의 사이지만 동일성으로 이해되진 않죠.


영화는 그렇게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그리고 얇다면 아주 얇은 나와 타자 간의 무엇이 결국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한 줄의 동아줄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이 쥐는 흙덩이와 주인공이 힘겹게 밟아 내는 대지는 주인공의 시선과 함께 삶의 깨달음으로, 그리고 한 인간의 성장의 바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족을 붙인다면, 흙이란 진흙과는 다르게 뭉쳐지지 않은, 알갱이의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이 모이면 사람마저 받치는 거대한 뿌리가 됩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과 인간관계가 결국 한 개인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임을 나타내는 거지요. 감독인 알폰소 쿠아론의 통찰은 이 지점에서 귀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수의 매체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세일즈 포인트는 우주 재난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딥 임팩트나 아마겟돈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앞선 두 영화가 우주 재난을 보여주기 위해 짜인 이야기라면, 그래비티는 일상과 나, 타자와 나라는 주제의식의 표현, 혹은 고립된 자아와 닫힌 창 너머의 관계를 명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우주란 장소가 선택되었다는 겁니다. 영화적 문법으로서의 감독의 접근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기에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영상의 거의 모두가 구조적으로 완벽하게 짜인, 변주를 허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관객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한 씬으로 촬영된 전반부 20분의 롱테이크는 '롱테이크 깍는 노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감독의 역량답게, 이동진 기자의 한줄 평대로 관객을 압도시키고 영화를 체험시키는데 일조합니다. 뚜렷하게 묘사된 산드라 블록의 기능미 가득 찬 몸매와 그 몸매로서 표현된 태아의 상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첫 문단에 말씀드린 대로 영상, 음향, 소품, 연기 모두가 확고한 주제라는 큰 궤도에서 함께 공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공전이 ‘우주’라는 확실한 밑그림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죠. 이렇게 영화의 모든 요소가 앙상블을 이루어 큰 단절 없이 뚝심있게 묘사되는 경우는 참 보기 드뭅니다.


여담을 몇 늘어놓는다면, 첫 시사회를 거친 후, 제작사에서는 감독에게 라이언 스톤 박사와 관제사 사이에서 로맨스를 추가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하는데요, 만약 감독이 제작사의 압박에 못 이겨 스토리를 수정했다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영화 내내 막연하고 희뿌옇게 미농지를 마주선 사이와 사이로서 표출된 자아와 타자와의 관계를 모두 수장시키는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죠. 물리친 감독의 결단에 박수를 보냅니다. 흠, 그리고 저는 아바타에서도 3D효과에 대해 불만이 강했는데요, 계속 단 컷으로 급박한 상황만 벌어지니 오히려 3D 효과에 집중하기 어려워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번 그래비티에서는 정적인 순간이 이어지다가 딱 필요한 순간에 딱 필요한 만큼 강조되니 정말 3D가 체험되는 게 느껴졌습니다. 저 먼거리에서 급속도로 쏟아지는 데브라(우주 쓰레기) 파편은 눈앞에 올 때마다 절로 고개를 피하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또한 장면 따라 곰살 맞게 받혀주는 음향효과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진공 상태의 정적, 우주선 내부에서는 급박함, 그리고 지구로 귀한 시 들려주는 웅장함이 장면마다 사람을 쥐었다 놓았다 합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에야 비로소 쥐어 짜이는 듯한 강박에서 풀려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합니다.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이 영화는 저에게는 올해 최고의 영화가 될 거라 확신합니다. 꼭 imax 3D로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Ps. 사실 저는 영화 평이 잘 안하는 편입니다. 첫째는 머리가 휘발성이 강해 한번 훑고 지나간 걸 기억하기 어려워서이고, 두 번째로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면에 대해 제 감상을 덮어씌우지 않을까 우려 돼서 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그래비티란 영화에 대해 주절거리는 이유는 하고픈 말이 많을 뿐만 아니라, 포스터에서부터 보다시피 마케팅이 우주 재난 등의 영상 효과에만 치우쳐져 있어 혹시나 영화 전반의 이해 전에 실망부터 앞서는 관객이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영화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물고 뜯고 씹고 맛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그럼 행복한 오후 되세요~. _(_.,_)_


댓글 : 8 개
요점을 잘 정리하셔서 보기 좋습니다.
한마디로 이 영화는 영상혁명입니다.
엔하위키 가서 잠깐 평을 보니
영화 제목인 gravity는 사실 중력이라는 의미 보단
심각성, 중대함이라는 의미가 더 많이 들어가있다고 하더군요
중력, 만유인력의 명사형은 gravitation을 더 많이 쓴대나 뭐래나..
저도 많이 동감하네요. 개봉일에 아이맥스로 보고, 다음날 4dx로 봤음에도 또 보고싶어지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흔히 우주 재난에서 다루는 종말이나 멸망, 지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간 본연에 대한, 성숙과 극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전에 영화 '그레이'를 니암리슨이 나온다고 액션영화로 광고하고 본 사람들도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더 그레이' 역시 정말 철학적인 심도있는 영화라 몇번을 봤건든요.
그레비티도 그처럼 사람들이 특수효과만 가득한 재난블럭버스터로 보지 않고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며 많이 봤으면 합니다.
완전 강추!
좋은 글이네요~아직 관람 전인 영화인데 더 보고싶어지는군요^^
공황장애 있었는데
이거 보는 내내 계속 숨소리나는 것 때문에 공황도질뻔.....
힘들게 영화봤어요 ㅜ
그것만 아니었으면 참 재밌게 봤을영화에요 ㅎ;;;
아이맥스3D로 영화 감상했던 사람입니다.~_~
영화를 다시한번 맛나게 곱씹을 수 있는 리뷰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천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올해 봤던 영화중에 탑안에 들 영화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M2관으로 2회차를 갑니다~ ATMOS 사운드로 감독이 의도했던 사운도 효과를 느껴보고 싶더군요~~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아이맥스로도 한번 더 보고 싶구요~~ 다음주에 있을 이동진평론가와 함께하는 GV도 신청해서 당첨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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