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 일기] 간만에 독서일기. [학력주의 사회]2014.01.17 AM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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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한국어 번역이 89년에 이뤄진 책이라 지금 표지 사진을 찾을 수가 없네요. ㅡㅡ;; 그래서 제목과 독서 일기만 올려봅니다. 아주 예전에 쓴 거라, 그냥 읽었다 정도의 피상적 감상만 끄적인 셈이더군요.89년에 번역된 책이 아직까지도 한국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건, 정말 지금 한국의 교육이 산으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디에 박혀 있었는 지도 모를 것을 찾아사 올리는 거라 좀 부끄럽습니다. 여튼, 오늘은 금요일! 즐거운 불금 되시길 바랍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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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력주의 사회, Randall Collins, 배영사, 1989.

생명단위로서 지구를 기준으로 두고 개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을 분석해 본다면, 인간은 꽤나 비효율적 존재로서 집단이란 이름아래에서만 생존이 가능한 허약한 유기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에서부터 그 생명체가 속한 사회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능력을 보유하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반면 인간은 최소 10년의 성장기를 거친다. 쉬운 예로 걷기로 볼 때 초원의 기린은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 있는 있는데 비해 인간은 최소 12개월의 시간을 소비함을 들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은 집단의 영속성을 위하여 소규모 공동체인 가족에서부터 현대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무리를 계속해서 지어오고 있는 것이다.


유사 이래 인간은 기본적인 생명 유지를 위한 사회를 넘어 자신이 속한 사회를 기능적인 분업사회로 분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현대의 사람들은 더 이상 귀족 또는 시민이라는 혈연에 얽매인 계급에 고정화 되어 있지 않고, 또한 탄생 집단의 정체성을 개인의 필연적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려고 들지도 않았다. 여러 형식의 집단은 고정되고 경직된 계급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점차 동등한 권리를 가진 중 ? 소규모의 분업으로 나누어졌다. 이른바 사법, 행정, 산업, 공권력, 교육 등이 이를 말한다.


여기서 교육은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학력이란 사회적 인증은 동서를 막론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학력은 개인이 받은 교육의 내용과 수준을 증명하는 기능을 수행하며 사회에 있어 개개인의 평가 및 처우의 기초가 되고 있다. 즉 지위달성의 과정에서나 혹은 사회생활에서의 신분표징으로서 학력이 중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R. 콜린즈의 『학력주의사회』는 이와 같은 학력의 힘을 분석한 저서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는 학력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학력주의란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학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을 의미하며, 업적주의와 함께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주로 가정의 사회적 배경 등에 의해서 지배되는 귀속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사회적 측면에서 볼 때 신분사회가 혈통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학력사회는 학력을 획득하는 시점까지는 업적원리에 의해서,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학력이 일종의 사회신분으로 작용하고 이것에 의해 개인의 사회적 지위가 지배된다고 본다.


콜린즈는 현재의 학력주의 사회는 기술적 기능론이란 이제는 패러다임이 되어버린 이데올로기가 근저로 작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적 기능론이란 간략히 말해 산업화 사회이후 고도로 전문화된 직업을 수행하기 위한 교육적 요구조건의 나날이 높아져 갔고 이와 정비례로 교육의 수준과 기간이 높아지고 늘어났다는 이론이다. 풀이하자면 기술과 교육의 합병으로 인해 이 회사의 입사요건으로 사각모의 모양을 한 기술보증 딱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콜린즈는 이를 기술주의 신화라 부른다. 경제적 증거자료로는 경제발전에 대한 교육의 기여는 명확하지 않다고 분석되고, 더욱이 교육은 종종 직장에서의 생산성과는 관련이 없으며 때로는 역작용까지도 미친다고 주장한다. 요약한다면, 학교 교육은 직업상의 기능훈련 수단으로서 매우 비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 교육은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가? 기술론자의 주장이 허구라 한다면, 실제로 역동하는 사회의 맥박이 되는 학교 교육의 견고함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학교 교육은 일종의 지위문화에 대한 재사회화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의 기능은 해당 구성원이 직업 획득을 위한 기술적 지식을 습득하는데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상류층 즉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집단으로 전파하고 이를 철저히 내면화시켜 피지배집단이 지위 문화에 종속된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학교교육은 민중들의 민주적인 열망의 결과가 아니라 지배계층의 정치적 이해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단히 당혹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으며 또한 현대 한국 교육에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한국사회는 이러한 학벌주의사회의 극점이라 평할 수 있다. 그로 인해 그 패혜 또한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로 한국 교육의 가장 큰 이슈는 평준화와 사교육일 것이다. 이 극과 극을 달리는 이 두가지 현상이 어떻게 하나의 교육 시스템에서 거론이 될 수 있는가 함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왜곡된 ‘학벌’은 앞서 말한 ‘남만큼 하자’라는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남보다 못하면 인생에서 낙오한다라는 이분법적 생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교육의 ‘평준화’란 이와 같은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생은 경쟁인데, 그 경쟁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정규교육에서조차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극단의 성격을 지닌 한국인이 과연 그러한 불평등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기부 입학제가 아직 한국 사회의 정서에 맞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한국인의 낙오되지 않기 위하여 남만큼 할 수 있는 소규모 집단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고 교육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출발선이라는 공정한 잣대에 경쟁을 시작하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결승선 가까운 위치에서 출발하려고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결과적으로 사교육 의 만연을 불러 온 것이다. 이는 교육의 결과가 확연한 제로섬 게임의 범주 내에서 머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 사회의 특수성임이 틀림없다.


최근의 정 ? 재계의 흐름은 한국 교육을 미국적 시스템으로 몰아가는데 여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많은 재화를 지불하는 사람에게 보다 많은 교육 해택을!’이라는 슬로건 속에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부르짖는 언론을 보며, 민주주의의 큰 두틀 중 평등의 최후의 보류라 할 수 있는 교육조차 효율이라는 허울에 흔들리고 있음이 큰 아픔으로 다가온다.


현재 한국 교육에, 한국 사회에 필요한 것은 의식의 전환이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 효율과 경쟁의 사회가 생존할 수 있음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러한 시스템에서 해당 구성원의 행복이 보장될 수 있을 것인가는 의문으로 남는다.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인다면, 앞으로의 한국 교육의 지향점은 발전이 아니라 교육을 받음으로서 삶을 사랑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인간됨을 깨달을 수 있는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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