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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삶의 다운사이드는 제거하고 긍정적 서프라이즈만 남겨라2021.05.13 PM 04:34
삶의 다운사이드는 제거하고 긍정적 서프라이즈만 남겨라
우리 아버지는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 퇴임을 했다. 한평생 교직에 몸담은 탓인지 자부심이 무척 강하고 꼼꼼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이자를 연 0.1퍼센트라도 더 주겠다는 곳을 늘 찾아다닌다. 그런 모습이 안쓰러워 얼마 전 아버지에게 한 말씀 드렸다. 숫자상으로는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연 1퍼센트라고 해도 원금이 1천만 원이면 1년 동안 정기 예금을 들었을 때 세전 이자는 10만 원에 불과하다고. 10만 원이 물론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 돈 때문에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이다. 또 이자 조금 더 주는 데 돈을 맡겼다가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러시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10만 원으로는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지만 부실 저축은행 같은 곳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에는 확실히 공감했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겪고 한평생을 사신 분에게 은행이 망해 버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그보다 더 심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잘못될 일은 제거해 버리고 잘될 일만 남겨 놓는 것, 세상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손실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부터 이익을 보는 것, 그러한 상태를 '반취약성(anti-fragility)'이라고 한다. 이것은 강건성(robustness)과도 다르다. 강건성은 예상외의 큰 변동이 발생해도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제일 불리한 상태는 취약성(fragility)이다. 예상외의 큰 변동 앞에 취약한 상태는 속절없이 큰 손실을 본다. 반면 반취약한 상태는 변동이 큰 만큼 이익도 커진다. 그렇다면 반취약성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손실 가능성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방향으로 의사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삶에 존재하는 취약성을 인식해 그것을 강건하거나, 가능하면 반취약한 상태로까지 만들려고 한다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손실 가능성을 없애는 행위들을 전문 용어로 '볼록 변환(convex transformation)'이라고 한다.
연봉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안정적으로 오래 일할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려고 애쓰는 것은 취약성의 전형적인 예이다. 거기에는 긍정적인 측면(upside)이 전혀 없다. 또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한창 나이에 퇴직을 강요당하기 쉽다. (정년이 60세인 줄 알고 들어갔는데 실은 그보다 오래 다닐 수 있더라는 말은 들어 본 적 없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무수히 많다.) 그러한 노력은 그만두고, 작더라도 자신만의 사업을 시작해 훨씬 큰 부를 목표로 달려가는 것이 볼록 변환의 좋은 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위험 감수(risk-taking)는 선택이 아닌 일종의 의무다. 자연에서는 의견이나 예측은 하찮은 일이고 오직 생존만이 중요하다. 볼록 변환을 달성하고 나면, 미래가 더 불확실할수록 양의 옵션성(optionality)이 더욱 발휘되고, 그로 인해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성질은 삶에 매우 중요하다. 불확실성이 당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흥하게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게 있다. 삶에는 '호르메시스(hormesis)'라 성질이 있다는 점이다. 호르메시스는 '약간의 독이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이익이 된다.'는 의미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린다.'라는 말은 이러한 호르메시스의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대상에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그 자체로 반취약하다. 이러한 태도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그 불확실성에서 혜택을 보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당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호기심과 선호는 사실 당신의 생각과 말로는 알 수 없고 오직 당신의 행동으로써만 알 수 있다. 즉 당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가는 삶에서 선택이 주어졌을 때만 드러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리스크를 회피하지 않고 의연하게 떠안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감동받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리스크를 지는 사람을 우리는 영웅이라고 부른다. 이들에 대한 존경은 사회가 바치는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다른 사람의 범주를 보편적 인류까지 확장할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나 순교자의 반열에 오른다.
삶을 반취약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버리는 것이 먼저다. 이를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부정의 길(via negativa)이라고 불렀다. 16세기 이탈리아 조각가이자 건축가 미텔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간단해. 다비드가 아닌 모든 것을 제거해 버리면 돼.'라고 답했다.
어디 미켈란젤로만 그런 이야기를 했겠는가. 애플의 설립자이자 디지털 시대의 혁신가 스티브 잡스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집중이라는 말의 의미가 집중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예'라고 답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잡스는 달랐다. 집중의 진정한 의미는 현재 집중하고 있는 대상과 비교할 만한 다른 수백 가지의 것들에 대해 철저하게 '아니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즉 혁신이란 수천 가지의 대상에 '아니요'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 길은 영국의 과학철학자 카를 포퍼가 유사 과학과 진정한 과학을 구별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론과 맥을 같이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취약성은 오직 '실행'에 의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론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실행을 중시하고 그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사람들은 결정을 내릴 때 행동의 결과, 즉 페이오프(payoff)에 집중한다. 반면,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는 책상머리 이론가들은 예측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취약하다. '경기는 끝나기 전까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유명한 미국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요기베라는 야구 경기력에 버금가는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로도 알아줬다. 그중에 '이론적으로는 이론과 실제 사이에 차이가 없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있다.'라는 명언도 있다.
모든 이론가가 자신이 내놓은 예측에 따르는 결과에 책임진다면 적어도 무책임한 예측으로 인한 취약성이 어느 정도는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관한 좋은 선례가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다리가 완공되면 그 다리를 건설한 기술자를 그 밑에 있게 했다. 그 시대에 건설된 상당수의 다리들이 아직까지도 멀쩡히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 방침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외적의 오랜 침입에 시달린 탓에 이론보다는 경험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실용적인 영국인들은 로마의 방침을 좀 더 보완했다. 기술자뿐 아니라 기술자의 가족까지도 다리 밑에서 생활하게 한 것이다.
삶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을 감안컨대, '완충 장치'와 약간의 '중복'은 불필요해 보여도 사실 꼭 필요하다. 이는 여러 형태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일에서 벗어나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가, 급할 때 그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약간의 현금 같은 것들이다. 또 너무 엄격하고 엄밀한 것들은 그 자체로 취약하기 쉽다. 19세기 영국 물리학자 제임스 맥스웰은 엔진의 작동을 너무 정교하게 제어하려고 하면 그 시스템에 내재돼 있는 성질로 인해 오히려 더 불규칙하게 회전한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 효율성과 안정성은 상충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취약성과 반취약성의 진정한 시험대는 바로 시간과 역사라는 점이다. 취약한 것들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그 성질을 드러내고 만다. 당신이 리스크를 회피하지 않으며 감내하고 당신의 운명에 대해 위엄을 가지고 맞서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 수 없다. 반대로 당신이 리스크를 감내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당신을 위대하게 만들 수 없다. 결국 나를 비천하게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남이 아니고 오직 나뿐이다.
- 권오상 저 『돈은 어떻게 자라는가』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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