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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 이기지 못하는 러시아가 자신감 넘치는 경제적 이유2022.06.07 PM 09:34
■ 전쟁 100일...WSJ "끝없는 소모적 전쟁이 시작됐다"
'성자 Saint'라고 불린 '재블린 미사일'이 러시아를 수렁에 빠뜨릴 때가 있었다. 어깨에 올려놓고 쏘면 알아서 전차를 쫓아가 파괴했다. 이 초소형 하이테크 미사일 때문에 러시아는 개전 초기 키이우로 진군하지 못하고 멈춰 섰다. 똑같은 방식으로 항공기를 타격하는 스팅어 미사일은 수많은 러시아 헬기를 떨어트렸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서방의 도움을 요청할 때 콕 집어서 '재블린과 스팅어가 하루 500기씩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골리앗의 무릎을 다윗이 꿇리나 했다. 러시아가 키이우에서 퇴각할 때까지는 그랬다.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러시아는 키이우를 버리고 돈바스, 그리고 돈바스와 크림을 잇는 통로에 병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느리게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점령지를 넓혔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개전 100일 특집 기사에서 그 비결을 '러시아의 전술 전환'에서 찾는다. 더이상 전차를 앞세워 신속한 기동을 하지 않는다. 수많은 재래식 포대를 배치해 무수한 폭격을 퍼부은 뒤 조금씩 조금씩, 한 발 한 발 나아간다. 산과 숲과 진흙으로 가득한 키이우 주변과 달리 돈바스가 개방된 평지 중심인 점도 주효했다. '중세식' 혹은 '재래식' 전술이 먹혔다.
우크라이나는 더는 키이우식 전술을 쓰지 못하고, 러시아는 느리지만 분명한 이익을 거두고 있다.
■ 이기지 못하는데 자신감 넘치는 러시아
푸틴의 말에는 다시 여유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만약 서방의 장거리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에 공급된다면, 러시아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아직 타격하지 않은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파괴 수단을 사용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재정비한 러시아는 전황을 조금씩 주도하고 있다.
물론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우크라이나 지원은 멈추지 않는다. 실제로 사거리가 길어진 정밀 타격 미사일 추가 지원 계획도 밝혔다. 우크라이나의 패배를 논하기는 이르단 얘기인데, 그럼에도 개전 100일 세계의 분위기는 초반 같지 않다.
미국의 국가정보국장 에이브릴 헤인스는 지난달 미 의회에서 "푸틴의 전략적 목표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며 여전히 "서방과의 의지의 시험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고 했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이런 일은 대부분 어떤 방식으로든 외교적으로 끝난다"면서도 "다만 불행하게도 러시아가 아직 그런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지 않다."고 했다.
서방은 초조하고, 러시아는 오히려 느긋한 상황. 워싱턴포스트는 이 상황을 개전 100일을 맞아 출고한 기사에서 "러시아 엘리트들은 ‘인내심 대결’에서 러시아가 EU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푸틴은 소모전에서 서방이 먼저 눈을 깜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WP 6.3)
■ 러시아가 자신감 넘치는 세 가지 경제적 이유
① "너희들 서방의 경제가 힘들잖아"
War, Blockade and Sanction
전쟁과 봉쇄와 제재의 상호작용은 경제 후폭풍이 됐다. WSJ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했다. 미국에 이어 유럽마저 8%대 인플레이션에 도달했다. 에너지 가격 급등과 식량 위기 때문이다.
랜드 연구소의 존슨은 지금이 "공급망이 얼마만큼이나 뒤틀릴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진정한 경험"이라면서 "코로나 역할은 조금이었다. 전쟁만큼 (공급망을) 뒤틀어버릴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했다.
러시아의 여유로움은 정치 체제 차이에서 나온다고 WP는 본다. 러시아가 이 상황을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 사이클'과 결부해 사고한다고 했다. 한 러시아 억만장자는 “푸틴 대통령은 서방 지도자들은 선거가 돌아올 때마다 취약해지고, 여론은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다고 믿는다”며 반면 “푸틴 대통령은 6~9개월을 기다릴 여유가 있다. 서방보다 더 강하게 자국 여론을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당장 바이든의 처지가 푸틴이 말한 대로다. 언론인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사우디 왕세자를 지목하며 비판했던 바이든이 고유가 때문에 사우디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뉴욕타임스는 "사우디에 간다고 유가를 크게 낮출 순 없을 것"이라며 이번 여행을 비관했다.
NYT는 "전쟁 나면 정치인들은 머리 잘린 닭처럼 여기저기 내달리며 당장 무슨 소비자 구제책을 낼 수 있는지에 골몰하지만, 역사는 전쟁 중 에너지 위기는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보여준다"면서 "장기적으로 전기차에 투자하고, 효율적인 에너지 망을 구축하고 에너지 수요를 낮추는 기회로 삼으라"고 했다.
뾰족한 수가 없단 얘긴데, 사우디가 아니면 또 다른 권위주의 국가 이란이나 베네수엘라에 가야 한다. 실제로 쉐브론의 베네수엘라 개발을 허용했다. 로이터통신은 '유럽에 한해 베네수엘라가 빚 대신 원유를 제공하는 거래를 허용'하기로 했다고 했다. 모두 뒷맛이 개운치 않은, 권위주의 국가와의 불편한 거래다.
미 공화당은 "알래스카와 멕시코만에 시추공을 꽂고 석유를 빼내라, 규제를 완화해 캐나다와 송유관을 이으라"고 주문하지만, 기후변화 대응에도 맞지 않는 것은 물론 당장의 증산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단 측면에서 큰 효과는 없다. 세일오일 기업들은 추가 시추공 꽂기를 주저한다.
② "우크라이나는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하잖아"
키이우가 해방됐지만, 우크라이나는 자립할 수 없는 상태다. 러시아가 병력을 집중한 돈바스와 크림을 잇는 남동부 지역은 군사 전략적으로만 중요한 곳이 아니다. 우선은 우크라이나 산업의 중심이고, 동시에 농업의 중심이기도 하며남부 연해 항구도시들은 수출의 중심이기도 하다.
즉, 우크라이나는 이제 이 세 가지 경제의 중심을 모두 잃게 된 것이다. 뺏기지 않은 오데사도 러시아의 허락 없이는 한 톨의 쌀도 바다로 수출할 수 없다. 기뢰와 크림반도의 미사일 앞에 무력하다. 경제적 자생이 불가능하다.
서방 지원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데, WSJ은 경제 자립을 잃은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부터 매달 50억 달러(약 6조 원)의 지원을 받아야만 버틴다고 했다.
③ "글로벌 사우스가 너네 편이 아니던데?"
아프리카 유니온의 매키 샐은 EU 정상들에게 "비룟값이 세 배가 되었고, 얻을 수도 없다"고 호소했다.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라 불리는 저개발 국가들은 민주주의와 우크라이나를 옹호하라는 서구 시각에 온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있다.
WSJ은 장기화된 전쟁이 서방과 '글로벌 사우스' 사이의 이해와 시각(전망) 차이도 노출했다고 분석했다. 식량난이 서방에는 '가격'의 문제이지만, 이들에겐 '체제 존립'의 문제다.
블룸버그는 에너지 식량 가격 급등이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으로, 또다시 수입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돼, 이미 최소 15개 국가의 달러 표시 국채가 부실채권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다. 레바논과 벨라루스, 스리랑카, 우크라이나, 엘살바도르,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등을 위험국가로 꼽았다.
당장 체제가 위험한 이들 국가가 서방의 '대의'에 동참할 리 없다. 많은 국가가 이번 사태 중립이다. 쿼드 가입국이며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조차,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이고 오히려 원유 수입을 늘리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올해 G20 회의에 러시아를 참석시키지 말라는 서방의 요구에 답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시각에서 지금 경제 때문에 초조한 건 서방이다.
■ "러시아는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는 러시아가 에너지를 믿고 있다고 했다. 대결의 판세가 겨울을 앞둔 가을쯤 보다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에너지 소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가진 러시아와 해외에 의존해야 하는 서구 사이의 견해 차이가 극명해질 것이다. 전쟁 승패나 계속 여부 역시 '러시아에 가장 유리할 그 무렵'에 판단하게 될 것이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대표적 강경파로 분류되는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러시아 국가안전보장이사회 의장은 러시아 국영 매체 로시스카야 가제타와 인터뷰하면서는 “세계는 점차 전례 없는 식량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아프리카나 중동의 수천만 명이 서구 때문에 기아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 유럽으로 탈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러시아 외교 관리는 “제재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불거질 가을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 결국은 치킨게임?
AP 벤 호지스 "중세적 소모전 전략"
WP "인내심 대결, 러시아는 가을을 기다린다"
WSJ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러시아의 전략을 무엇이라 부르건, 러시아는 지금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다. 살펴본 대로 경제적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전황을 안정적이고 지리한 국면으로 가져가면서 버틸 수만 있다면.
(러시아에 객관적으로 '유리한 전황'이 펼쳐진단 이야기는 아니다. 러시아는 20%대 물가 상승으로 고통을 겪고 있고, 외채를 낼 수 없는 국가가 되어가고 있고, 경제 성장은 크게 꺾일 것이다. 무엇보다 미래 성장을 위한 기술에 접근할 수 없게 되었다. 장기적 국익이 심대하게 훼손되었다.)
동시에 미국의 바이든은 점점 곤란해지고 있다. 선거가 있는 가을까지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란 얘기이기 때문이다. 더 비싼 제품을 사야 하고, 기다려야 하는 시민들은 정부에 대한 불만 속에 투표장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러시아를 화나게 해선 안 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곳곳에서 휴전 합의 이야기가 나온다. 프랑스의 마크롱과 독일의 슐츠는 푸틴에게 전화해 '곡물 수출을 위해 우크라이나 항만 봉쇄를 해제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면 우크라이나는 반발한다. 우크라이나 다음이 되는 사태를 우려하는 폴란드도 반발한다.
"공격한 자에게 영토 일부를 주는 타협이 안정을 가져올까? 아니면 러시아가 손실에서 회복해 2~3년 뒤 다시 도발을 감행할 수 있게 잠시 쉴 시간을 주는 걸까? " 울리히 스펙 (독일 분석가)
상황은 마주 보는 열차에 올라타고 서로 비키라고 위협하는 치킨 게임이 되었다.
<참고 외신>
▲ 기름값을 내려야 하는 바이든에겐 '나쁜 선택지'만 있다
Biden Has ‘Only Bad Options’ for Bringing Down Oil Prices
뉴욕타임스 6.5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와의 100일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아 전 세계 비용을 위협하고 있다.
Russia’s War on Ukraine at 100 Days Has No End in Sight, Threatening Global Costs
월스트리트 저널 6.3
▲'푸틴은 소모전에서 서방이 먼저 눈을 깜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러시아 고위층이 말했다
Putin thinks West will blink first in war of attrition, Russian elites say
워싱턴포스트 6.3
▲새로운 핵의 시대 A New Nuclear Era
The economist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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