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융/시황/전략] 위험한 균열의 시작... 실리콘밸리은행 파산의 숨은 뜻2023.03.20 PM 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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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시술 스타트업 ‘시수클리닉(Sisu Clinic)’을 운영하는 팻 펠란 대표는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모든 출금을 차단하기 1시간3분 전, 남아 있던 마지막 회사 자금을 인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빼낸 돈을 대서양 건너 아일랜드에 있는 은행으로 옮겼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서 돈을 빼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던 그와 재무담당 임원은 이체가 확인될 때까지 밤을 꼬박 새야 했다. 그는 IT 전문매체인 ‘와이어드(Wired)’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걱정이 가득했던 26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단 이틀 만에 큰 은행이 무너졌고 실리콘밸리는 정적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3월 8일 SVB가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2억달러를 조달하는 증자를 실시하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부터 미 연방예금보험공사(Federal Deposit Insurance Corporation·FDIC)가 SVB의 파산을 발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44시간 남짓이었다.


2022년 말 기준 SVB는 2000억달러가 넘는 자산을 관리했던 곳이다. 미국 내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이었다. 이제는 미국 역사상 파산한 은행 중 두 번째 큰 은행으로 기록됐다. 파산한 곳 중 SVB보다 큰 은행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무너진 워싱턴뮤추얼(당시 자산 3070억달러)뿐이다.



44시간 만에 무너진 SVB 





저금리 시대가 끝나고 고금리 시대로 급변했을 때 은행이 어떤 부작용을 겪을 수 있는지를 SVB는 보여준다. SVB는 실리콘밸리에서 돈을 돌리는 혈관 같은 존재였다. 실리콘밸리라는 첨단지역의 한 축을 이룬 금융기관이다. 테크기업과 벤처캐피털은 이곳에서 자금을 빌리기도, 여유자금을 이곳에 맡기기도 하는 고객이었다. SVB에 따르면 미국 테크 스타트업 가운데 약 44%가 이 은행의 고객이다.


저금리 시기, 시장에는 돈이 넘쳤다.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 테크기업과 스타트업의 평가액은 실적과 무관하게 부풀어 올랐다. 당장의 수익이 적더라도 잭팟을 노리는 자금들이 벤처캐피털로 몰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SVB 입장에서도 돈이 넘치던 시기였다. 투자받은 돈을 맡기는 고객 때문이었는데, 이 돈을 투자할 곳이 또 마땅치 않았다. 이자수익을 확대하는 것도 한계였던 게, 대출 수요가 줄어든 때였다. SVB는 단기 자금인 예금을 미국채와 주택저당증권(모기지) 등 장기 자산에 투자했다. 2021년 SVB가 매입한 미국채 등 증권의 잔액은 1280억달러 규모였다. 자산 대비 증권 투자 비율이 약 55%였는데 미국 은행 중 그 비중이 가장 높았다.


연준의 가파른 금리인상 흐름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테크기업의 주식이 급락했고 스타트업의 가치도 급락했다. 벤처캐피털의 돈줄도 막히고 있었다. 차입을 하려니 금리가 부담이 되는 시기다. 테크기업들은 SVB에 있는 예금을 인출해 쓰기 시작했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내가 샀던 채권의 금리가 연 5%였다고 치자. 그런데 시간이 흘러 시중금리가 연 7%로 올랐다. 이렇게 되면 나에게서 채권을 사려는 사람이 있을까. 7%의 수익을 주는 투자처가 많은데 5% 채권을 살 리가 없다. 팔기 위해서는 채권값을 낮춰야 한다. 금리와 채권의 상관관계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4연속 자이언트스텝(기준금리 한 번에 0.75%포인트 인상)을 밟는 사이 채권은 폭락했다. 미국채 등을 잔뜩 갖고 있던 SVB는 자산에서 손실을 보고 있었다. 돈줄이 마른 테크기업들은 예금을 계속 인출했고 SVB는 그 인출 예금을 조달하기 위해 손실을 보더라도 장기 채권의 일부를 팔아야 했다. 채권 매각 소식에 불안해진 고객들은 더 많은 자금을 회수했고, SVB는 이 돈을 마련하느라 더 많은 채권을 팔아 자금을 조달해야 했다. 그렇게 파멸의 고리가 만들어졌다.


지난 3월 8일, 이 사태의 시작이 됐던 SVB의 22억달러 증자 시도는 210억달러 규모의 채권 포트폴리오를 매각하면서 생긴 18억달러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악순환 속 손실은 채우지 못했고 그대로 파산했다. 물론 SVB는 세계 금융 시스템에서 그렇게 중요한 플레이어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SVB만이 갖는 특수성 때문에 글로벌 금융시장에 끼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거라 본다.



BTFP 내놓은 연준 “미국채 팔지 마라”


반대 의견도 있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의 파산을 예측했던 월가 애널리스트이자 투자자인 로버트 기요사키가 대표적이다. 그는 SVB 이후 또 다른 은행들이 파산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기요사키의 픽은 크레디트스위스(CS)였다. 금리 상승으로 채권 가격이 하락하는 등 채권시장이 불안해지면서 CS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날렸다. 그런데 실제로 CS가 휘청거렸다. 3월 15일 한때 CS의 주가는 장중 30% 이상 폭락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은행 시스템이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져도 된다”며 수습 중이다. 더 큰 불행으로 확산될 일은 없다고 강조한다. 그래도 미국 입장에서 곤혹스러운 지점이 있다. SVB는 리먼브라더스처럼 위험한 파생상품을 판매하지도 않았다. 사들인 건 미국채였다. 지금 금융시장 불안이 전염되는 중심에 미국채가 있다.


미국채는 사실상 무위험 자산 취급을 받았다. 무위험 자산이 은행을 파산으로 몰고갔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SVB 파산 뒤 연준의 재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수습책 하나를 전격적으로 내놨다. 예금 전액을 보호하기 위해 은행에 유동성을 지원하는 ‘새로운 기금(BTFP)’을 조성한다는 것이었다.


‘BTFP(Bank Term Funding Pro-gram)’는 쉽게 말해 연준이 은행에 제공하는 대출이다. 미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 담보를 내놓는 은행에 1년간 자금을 대출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이 제도는 202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라스 다이아몬드 시카고대 교수와 필립 딥비그 워싱턴대 교수의 아이디어다.


소문에 움직이는 뱅크런 사태의 모습을 일러스트로 표현한 그림. 노벨위원회



연준은 미 달러 패권에 위기가 감지되면 새로운 정책을 내놓으며 관리한다. BTFP도 그런 차원의 대책이다. 미국채 등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준다는 이야기인데 연준은 정책 의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금융기관이 압박에 시달릴 때 증권을 급하게 매도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담보 가치를 시장가가 아닌 액면가로 평가하겠다는 부분이다. 연준이 금리를 올리면서 미국채 가격은 하락했으니 액면가보다 낮은 상황인데 액면가로 쳐주겠다는 얘기다. 은행 입장에서 손해 볼 일이 없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번 연준의 조치를 “이례적 개입”이라고 평가했다. 연준의 의도는 명확하다. “SVB처럼 급한 일이 생겨도 미국채를 팔지 말고 우리한테 와서 돈을 빌려가라.”


미국채는 무위험 자산이니 아주 안전해야 하고 시중에서도 언제든 거래돼야 한다. 미국채가 달러 담보로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건 달러 패권을 유지하는 미국 입장에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미국채의 위기’라는 말이 언론에서 간간이 등장하고 있었다.






일단 중국이 미국채를 내다팔았다. 중국의 미국채 보유액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채권가격이 하락한 탓에 포트폴리오를 조정한 것도 있지만 외교안보적 이유도 하나의 배경이다. 미국 재무부가 지난 2월 15일(현지시간) 발표한 국채 보유현황에 따르면 중국은 2022년 말 기준 미국채 867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1년 말 보유액(1조402억달러)보다 1732억달러(16.7%) 감소했다.


대신 금 보유량를 늘리고 있다. 중국 세관총서에 따르면 중국의 2022년 금 수입액은 766억달러로 전년과 비교해 60% 정도 늘었다. 미국채 최대보유국이었던 중국은 그 자리를 일본에 물려줬다.


중국 대신 최대보유국이 된 일본도 내다팔았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본 정부가 추락하는 엔화를 지지하기 위해 미국채 단기물을 매각 중이라는 신호가 계속 쌓였다. 지난해 11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일본의 변화는 인플레이션과 금리인상으로 투자자들이 오랫동안 고수했던 전제가 바뀌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연준의 강고한 금리인상 기조가 엔화를 무력화시키자 일본도 미국채 매각으로 해법을 찾으려 했다.


일본을 SVB에 대입하면 이해가 쉽다. 금리 인상으로 미국 달러화가 초강세를 보이는 ‘킹달러 현상’이 나타나자 약세가 된 엔화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달러 공급을 늘려야 했다. 그런데 금리가 높으니 달러를 차입하는 건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니 갖고 있는 미국채를 내다팔아 달러를 조달하는 쪽을 선택했다.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다음 날인 3월 14일, 일본 닛케이 225지수를 포함한 아시아 주요국의 증시는 큰 폭으로 하락했다. photo 뉴시스



5000여곳의 잠재적 위기 후보 은행


이런 움직임 때문에 지난해 하반기부터 미국채 시장의 유동성이 악화됐다는 걸 시장에서도 인정한다. 연준이 금리를 올릴 것은 자명한 사실이니 채권 가격은 반드시 떨어질 테고, 연준이 그동안 양적완화를 통해 사들였던 미국채도 시장에 내다팔아야 하니 공급까지 늘어난 상황이 됐다. 미국채의 가격은 더욱 떨어질 공산이 크고 그러다 보면 수요도 하락한다. 채권의 벤치마크로 자주 활용되는 ‘블룸버그 합산 미국 채권 지수’는 2022년 말 기준, 연초와 비교해 12% 이상 하락했다. 이 지수가 하락했던 마지막 때가 1994년이었다.





그런데 SVB 파산은 해외가 아닌, 미국 국내에서 생긴 국채 문제다. 은행에 들어온 예금을 가장 안전하다는, 그래서 무위험 자산이라는 미국채에 투자했지만 연준의 금리 인상 때문에 국채 가격이 하락해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했고, 그 탓에 생긴 재무상 결손을 채우려고 자금 조달을 시도하다가 미국에서 16번째로 큰 은행이 파산했다. 문제는 SVB 뒤에 줄 서 있는 다른 은행들이다.


미국에는 대략 5000여개의 은행이 존재한다. 지역은행부터 글로벌 메가뱅크까지 다양하다. 16위의 SVB는 자산 규모가 2000억달러 정도였지만 가장 큰 은행 격인 JP모건체이스나 뱅크오브아메리카는 3조달러 이상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5000여개의 은행들은 미국채의 위협에 노출돼 있는 잠재적 후보군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채권은 지금보다 저금리 때 사서 보관하고 있는 것들이다. 금리가 빠르게 오를수록 은행이 보유한 채권 가격은 떨어진다. FDIC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미국 은행들이 이렇게 보유한 증권의 미실현 손실은 6200억달러(약 821조원)에 달한다. 지난해보다 80억달러(약 10조6000억원) 증가한 숫자다.





특히 작은 은행들일수록 위험하다. 이번 뱅크런처럼 금융시장은 사소한 일이든 큰일이든 그것을 위기로 생각하고 행동해버리면 실제로 위기가 현실이 되는 곳이다. SVB 사태를 지켜본 고객들이 ‘대마불사(大馬不死)’를 믿으며 더 큰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려고 인출을 거듭하고, 필요한 현금을 조달하기 위해 은행이 미국채를 내다파는 일이 벌어지는 건 연준이 원치 않는다.


미국채 시장에서 이상 징후가 지속될수록, 미국채 가격이 불안정하고 변동성이 클수록 글로벌 주식과 회사채, 환율 등은 요동친다. 미국채의 시장 규제를 연구하는 예사 야다브 미 밴더빌트대 교수는 “미국채 시장에 대한 규제는 미국채 거래가 쉽게 이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작동한다”며 “유동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건 미국채 시장을 넘어 금융시장 전반의 안정성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연준이 BTFP를 들고 나온 이유다.



채권시장 변동성 2009년 이후 가장 높아


이번 사건은 좁게 보면 미국의 한 특수한 은행이 순식간에 파산한 비극적 사건이지만, 넓게 보면 고금리 긴축이 미국 경제에 낳은 파열음의 신호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비단 미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지금처럼 미국채의 유동성이 급감한다는 건 팔 사람은 많은데 살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유동성이 마르면 외부 충격에 약해지고 변동성이 커진다. SVB 파산 이후 은행의 자산 건전성을 우려하는 시선이 강해진 건 채권시장의 변동성을 측정하는 ICE 뱅크오브아메리카 이동 지수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지난 3월 13일 173.59를 기록했는데 200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채는 남의 나라 채권이지만 일부분 우리 일이 될 수 있다. “미국채 금리가 급등하면 한국 국채뿐 아니라 이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 금리도 다 따라 올라야 한다”(박민영 신한투자증권 연구원)는 말처럼 레고랜드 사태 이후 진정을 찾은 국내 채권시장이 다시 불안해질 수 있는 원인이 미국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은행 하나의 파산이 아닌 금융시스템의 안정, 그 자체를 위협하는 불씨가 지금 미국에서 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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