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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 역사] 역사, 게임이론으로 보면 더 새롭게 보인다2023.09.03 PM 05:09
■ 저자 에필로그_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 한순구의 게임이론으로 읽는 역사』
(한순구 지음, 삼성글로벌리서치, 328쪽, 2023.05)
이 책을 집필하면서 걱정이 많았다. 경제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감히 역사와 관련된 주제로 책을 써도 괜찮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책을 출간하고 보니 예상하지 못했던 조금 다른 고민이 생겼다. 책을 읽고 뭔가 교훈을 찾고자 하는 독자들의 이야기였다. 이 책이 현대의 한국 사회에 알려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당황하고 만다. 그 이유는 교훈이나 메시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책의 서문에도 적었듯이 경제학에서 내 전공은 게임이론이다. 일반인들에게 익숙한 단어로 설명하면 “전략(strategy)”을 연구한다.
그런데 전략을 연구한다는 것은 현대 경제학에서는 조금 특별한 처지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잘 아시다시피 현대의 경제학은 빅데이터를 이용하는 분야에 가장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있다. 나는 빅데이터의 유행이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 초반에 박사과정을 하는 바람에 데이터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게임이론을 연구 분야로 선택하였다. 그 결과, 한 가지 굶주림이 생겼는데 바로 현실 적용에 대한 굶주림이다.
어떤 생산자가 물건을 몇 개 만들었는데 그 다음날 마트에서 소비자가 그 물건을 몇 개를 샀다는 등의 빅데이터가 존재하는 경제학의 분야에서는 이런 빅데이터를 사용해서 이론들을 검증할 수 있다.
하지만 전략을 다루는 게임이론 분야는 데이터를 찾기가 어렵다. 데이터를 분석해서 의미 있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십 개의 비슷한 상황에 대해서 데이터가 수집되어야 한다. 중학교에 재학 중인 단 한 명의 학생의 성적만 보고 대한민국 중학생의 학업성취에 대한 분석을 할 수 없다. 그 한 사람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학생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중학생의 성적을 얻으면 좋겠지만 최소한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학생들의 성적을 얻을 수 있어야 분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략에 대해서 그런 데이터를 얻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 대전은 수십 번이 아니라 단 한번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장군과 롬멜 장군이 수십 번 서로 싸운 것도 아니므로 데이터 분석이 불가능하다. 또한 전략이라는 것은 최고 결정자들이 타인이 모르게 은밀히 결정하고 시행한 이후에 절대로 발표하지 않고 삭제해 버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전략이라도 정확히 관찰된 데이터를 얻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현재 북한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한국과 미국의 전략은 무엇인지에 대해 추측만 가능하지 객관적 데이터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게임이론은 정말로 이론으로만 연구하는 분야이다. 그러다 보니 나 자신도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면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역사 책 속에는 수많은 군주와 장군들이 통치를 하고 전쟁을 벌이고, 권력 투쟁을 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전략을 공부해온 나는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해당 인물이 어떤 전략을 사용하였고 그 결과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를 따져보는 즐거운 습관이 생겨 버렸다. 연구 분야인 게임이론을 현실에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 이번에 출간된 “그들은 왜 최후의 승자가 되지 못했나”라는 책이다.
사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물이라고 해도 나 같은 일반인이 이름을 알 정도의 사람이라면 당대에 가장 뛰어났던 인재였고, 크게 성공했던 사람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런 사람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인물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뭔가 한두 가지를 놓치고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나의 소감이다.
항우는 막강한 진나라 대군을 물리치고 중국 전체를 군사적으로 정복한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제후들이 그 자리에 임명하고 땅을 준 은인인 항우 자신을 위해서 힘써 싸울 것이라고 잘못 판단하는 바람에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죽게 된다. 사람은 과거의 은혜는 너무나 쉽게 잊는 반면 미래의 작은 이득이라도 얻을 가능성이 있으면 전심전력으로 충성한다는 원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미 땅을 주었으니 자신을 위해서 전투에서 싸우라고 요구하는 항우에게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는데, 자신을 위해 싸워주면 항우를 무찌른 후에 더 큰 땅을 주겠다는 유방의 이야기에 제후들이 더 끌렸던 것이다.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면서 통일의 기반을 닦은 오다 노부나가는 약소한 영주였던 시절에는 똘똘 뭉쳐서 같이 싸우며 역경을 극복했던 부하 장수 아케치 미쓰히데가 막상 일본 전체를 통일하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암살하여 죽음을 맞게 된다. 게임이론에서 협력관계가 깨지고 배신이 발생하는 시기는 어려운 시절이 아니고 오히려 풍족한 시절이라는 판단을 하는데 이에 딱 맞는 스토리인 것이다. 힘이 약하고 어려운 시절에 배신하면 모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지만, 성공해서 풍족한 시기에 배신하면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한 후에 조강지처를 버리는 것이 게임이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예측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차갑고 냉정하다는 평을 듣는 경제학 전공자답게 이 책은 “어떻게 그런 비인간적인 행동을 했는가?”라는 감상은 모두 배제하고 오히려 “그 시점에서 그런 배신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고, 오히려 이것을 대비하지 못한 쪽이 어리석었다.”라는 취지의 결론을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책을 읽어보신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책을 다 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나 자신은 최후의 승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배신을 당하기 전에 먼저 배신하는 쪽이 이길 확률이 높기 때문에 역사 속의 최후의 승자들은 먼저 배신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이다. 배신할 생각도 하지 않은 동료들과 부하들이 이런 최후의 승자에게 버림받고 죽음을 당한 것이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면 그 누구도 믿으면 안 되는데, 그런 삶을 살면 행복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되고 싶지 않다고 나같이 느끼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오히려 이전투구의 권력 다툼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현재의 자신의 상황이 안심되고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담아서 책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한순구 연세대·경제학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며,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국립정책연구대학원 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게임이론과 법경제학으로, 주요 관심 분야는 기업과 국가의 전략적 행동과 진화론적 경제이론이다. 경제뿐 아니라 생물이나 역사, 스포츠 등 다른 분야에 경제학 이론을 적용하여 분석하는 것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 《인생을 바꾸는 게임의 법칙》, 《대한민국이 묻고 노벨 경제학자가 답하다》, 《경제학 비타민》, 《인생 경제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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