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300년 전 신라 경주 시내 복원 CG2016.04.22 AM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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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네요..
댓글 : 34 개
저렇게 죄다 기와집이었단 말인가...
네 통일신라 최전성기시절에는 경주는 모두 기와집에다가 연기날까봐 땔감도 숯만 썼다고합니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의 수도 경주는 크게 번성하여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 중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의 경주 모습을 묘사한 기록에는, “도성 안에 기와집만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신라의 왕경인들이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모습을 비판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당시 경주가 얼마나 번성하였는지 잘 보여 준다.
통일신라 시대는 온돌문화가 보급이 안되서 옛날 일본식 집처럼 집안에 화로를 피워서 난방하는구조
연기가 많이 나고 결국 2층 이상의 복층식 높이로 올라가고 연기가 순환되고 화재를 막을려고 초가집 보단 기와집을 채택함...결국 신라가 발전으로 인해 저런모습이 된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문화의 일부분이였던거...
실제로 보면 정말 멋질 것 같아요.
밥 지을 때 연기가 나지 않았다는 경주. 숯으로 음식을 했다죠.
저건 좀 과장된거같은데;;;;;
과장이 아니라 진짜...저때 통일신라는 복층식이였습니다.
조선시대때도 보기 힘든 2~3층 건물이 널려있던 시대였는데 이유는 발전되거나 그런게 아니라 온돌기술이 없어서에요 ㅋㅋ 온돌문화가 아직 자리잡지 못했고 그결과 화로를 피워 난방을 하는 구조여서 연기 순환이 잘되도록 복층식이 됨.
복층식이 되면서 집은 평균 2~3층 높이로 커지고 당연 기와집이 기본이 됨....
저걸 몽골이 와서 다 부셔버렸다는 거네요
조경이 너무 현대식임..
아파트 짓기전에 조감도 보는거 같네요ㅋㅋ
그것만 보면 완전 최첨단 사이버 미래 도시인데 다 지어놓고보면 시궁창..
저렇게 다 기아집이었을리가...
뭐야 왜 죄다 집이 좋아..
마치 유럽 같이 그 시대 것들이 남아있으면 하는 상상을 해본적이 있네요
지금 보다 더 깔끔해 보이는데... 너무 과장된거 아녀??? ㅇㅇ
와 무슨 삼국지 엔딩 장면 보는거 같다
저건 횡룡사인가
통일 신라시대 때 경주 인구가 당시에 백만명이었다고 하네요 ㄷㄷ 규모로는 과장도 아닐듯..
그게 당시 인구가 17만호라고 하긴 하던데....
사실일지는 의문입니다.
1호에 4명이라고쳐도 68만명인데....
조선 한양의 인구가 저정도 넘은 적이 없을겁니다;;;;
조선의 한양보다 훨 진보해 보이는데...ㄷㄷㄷ
지금 광경이 닿는 거리까지... 거의 모든 하층민 집이 기와일리가 있나;;;
조선시대만 봐도 다 짚으로 지붕만든 집인데 기와집은 오바인듯
조선은 고려때보다도 퇴보한걸로 알고있는데..
조선은 양반중심이 되면서 서민은 취급도 안했음...
사실 기와를 만드는게 어려운기술이 아님...국가에서 정책으로 화로에서 굽고 대량양산을 하고자 하면
벽돌수준으로 보급시킬수 있는걸 안해 하고 서민들 찬밥 취급해서 초가집 살던거 뿐이죠....
과장이 심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라벌
실제 저런동네 있으면 외국인들도 관광 엄청 오겠는데... 한복도 좀 입고다니고...
CG잘 만들었당...고생했겠다....
저건 말이 안되는거 같은데;;; 도시 배치구조가 완전히 계획된 신도시네. 1300년전에 저정도 도시계획을 구현한다면 7대 불가사의 들어가도 할말이 없을듯 한데

더군다나 강 주변은 완전 지금 한강 저리가라 할정도로 경관이 정비되어 있네. 실상은 강 길 따라서 도시내에 온갖 떨거지들 집합하는 것이 정상임.
7대 불가사의는 아니고 그때당시 세계 8대 대도시 였음
신라시대 cg 기술이 저 정도였구나
다 기와집이네 초가집은 없네
지티에이 신라
이분들 다들 못믿는구나 ;
역사스페셜에 나온 내용임...
http://sechs666.blog.me/220140223751
경주 박물관 한번 가보시길
몽고니뮤 dㅜㅅㅜ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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