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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주제 : 계절2 [모리미 토미히코 ver.]2016.10.30 AM 09:56
그랬다. 작년 4월말, 우리는 분수대 앞에 앉아 밤 벚꽃을 바라보며 이렇게 사회문제를 토론하였다.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 할 청년들이 여자친구 하나 없이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문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날의 벚꽃놀이를 마치며 우리는 내년에는 각자 여자친구를 사귀어
다시 이 날, 이 자리에 모여 벚꽃놀이를 하자고 맥주와 치킨에 맹세했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여자친구 하나 없이 군내 나는 남자끼리 뭉쳐 다니고 있다.
어찌 보면 벚꽃놀이를 하지 못하게 겨울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시원을 나와 학교 앞의 언덕길을 오르다가 나는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에서 갓 튀어 나왔다고
밖에는 생각 되지 않는 여성을 만났다.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에 표정 없는 얼굴,
누가 말을 걸어도 무시하겠다는 냉랭한 분위기를 두르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도통 볼 수 없는 느낌의 학생이라서 나는 무심코 여학생을 계속 바라보며 걸었다.
여학생도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쳐다보는 얼굴에도 인형처럼 표정이 없어서
남자답지 못하단 걸 앎에도 놀라선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학교에 올라오다가 눈의 여왕을 봤어.” 나는 신선에게 말했다.
“눈의 여왕? 엘사 같이 생겼다는 말이오?” 최근에야 디즈니의 겨울왕국을 본 신선은 내게 물었다.
“그게 아니고 뭐랄까.. 얼음같이 차갑게 느껴졌다고 할까.. 보통 이 학교에 그런 느낌의
학생은 없으니까.. 수업시간에도 계속 떠오르더라고.”
나의 말에 신선은 말없이 눈을 반짝였다.
“청년. 잠시 멈춰보시오.” 수업이 끝나고 인문관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신선이 붙잡았다.
“아까 눈의 여왕을 봤다고 하지 않았소?”
“그랬지.”
“수업시간에도 계속 떠올랐다고도 하지 않았소?”
“그랬지.”
신선은 왼쪽 입가만 올라가는 미소를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청년.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을 읽어보면 사랑이 거울조각을 녹여 마음이 얼어붙었던
사람이 다시 따뜻한 사람으로 돌아온다오. 청년이 사랑으로 눈의 여왕의 심장에 박힌
거울조각을 녹여야 한다오. 그것이 운명이오.”
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은 무시하는 성격이다. 고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 * *
그 뒤로 며칠간 신선은 나를 따라다니며 눈의 여왕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라는 둥,
눈의 여왕이 내 운명이라는 둥 시답잖은 소리를 해댔다.
나는 신선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무시하며 다녔지만 서점에서 눈의 여왕을 다시 만났을 때,
무심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았다.
‘이것이 세뇌의 무서움이다!!’
나는 속으로 절규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소이까?” 신선은 순대국을 한 숟갈 뜨며 말했다. 왼쪽 입가가 올라가 있다.
“남의 불행을 즐기다니!” 나는 분개했다.
“아니, 무슨 말씀을. 청년, 난 청년과 눈의 여왕이 운명이란 것을 알고 있소. 분명 둘이 잘 될 것이오.”
“크오!! 운명이란 소리 입에 담지도 마라!!”
신선은 그렇게 계속 내 약을 올리다 말했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어떻게 됐는지 얘기 좀 해보시오.”
“휴우...”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심장까지 얼어붙는 듯했던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눈의 여왕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나는 아차 싶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의 여왕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사고가 정지된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었고
“그대의 심장에 박힌 거울조각을 녹여주고 싶다네.” 라는 남부끄러운 대사를 내뱉고 말았다.
눈의 여왕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를 몇 초간 더 쳐다보다가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내 손을 툭 쳐내고 돌아 나갔다. 정지된 사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까지는 그로부터 5분은 더 걸렸다.
“하하하하” 신선은 순대국집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 채로 입에 뜨거운 순대국을 계속 밀어 넣었다.
그저 빨리 먹고 빨리 가게를 나가고 싶었다. 신선은 겨우 웃음을 멈춘 후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소인이 말하지 않았소.
청년과 눈의 여왕은 운명이라고. 그렇지 않았으면 20년간 솔로인생을 살아온 청년이
어떻게 용기를 내어 그런 작업멘트를 했겠소.” 신선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왼쪽 입가만 올라가 있었다.
* * *
그 뒤로도 신선의 세뇌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세뇌에 걸리기 쉬운
단순한 사람이었는지 눈의 여왕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5월 7일에 지하철역에서 “얼어붙은 그대의 마음을 녹이고 싶구려.”
5월 20일에 편의점에서 “그대의 차가움으로 내 타는 듯 한 마음을 좀 식혀주시겠소?”
6월 4일에 언덕길에서 “그대의 백옥 같은 피부가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든다오.”
6월 16일에 음식점에서 “그대의 얼음성에 발을 딛고 싶소.”
6월 30일에 길을 걷다가 “그대를 나만의 눈의 여왕으로 삼고 싶소.”
마치 내 손은 S극이고 눈의 여왕의 어깨는 N극인 것 같았다. 눈의 여왕을 만나는 매 순간
나는 남사스러운 대사를 내뱉었고, 그녀는 나를 무시하고 몸을 돌려 떠나갔으며,
신선은 왼쪽 입가를 올리며 운명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나를 세뇌시킨 신선에게 분개했다.
그렇게 세월은 지났고 어느덧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여름방학. 이 얼마나 청춘의 심장을
두근두근 거리게 하는 말이란 말인가. 어딘가의 청년들은 여행을 가서 밤하늘의 별을 보며
사랑을 속삭일 것이고, 어딘가의 청년들은 여름바다에 놀러가 작은 천으로만 가려진
서로의 몸을 바라보며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여름방학이 겨울날씨인 것은 이 동네뿐이다.
이 동네만 벗어나면 남녀를 급속도로 가깝게 해주는 뜨거운 여름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도서관에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매일 오전타임 근로를 하기 위해
학교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독자들이여. 오해는 하지 말라. 나는 같이 도서관근로를 하면서
친해진 한 친구의 청춘사업을 위해 대신 근로를 하는 것이지, 만날 친구가 없다거나
만날 여성이 없어서 돈이나 벌어 놓자는 이유로 근로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게 다 내가 친구를 생각하는 넓은 도량을 가진 사나이이기 때문인 것이란 말이다.
다만 여전히 맘에 안 드는 것은 7월이 왔음에도 쌓여있는 눈과, 사람들의 두꺼운 옷차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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