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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소리!] 갑오년 하니 갑오개혁이 떠오르네요.2014.01.01 AM 12:12
<갑오개혁>-> 네이버 지식백과
1894년 봄 호남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다. 농민들은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조건으로 내세워 전라도를 휩쓸고 전주성(全州城)을 점거하였다.
이어 동학농민군과 정부군과의 강화가 성립되었으나 민씨정권이 6월 초에 청나라에 대하여 파병을 요청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본도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게 되었다.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아산과 인천에 몰려오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공사 오토리(大鳥圭介)는 내정개혁안을 제시하고, 또 7월 23일에는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을 영입하여 신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뒤 7월 27일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설치되고, 영의정 김홍집(金弘集)이 회의총재(會議總裁)에, 그리고 박정양(朴定陽)·김윤식(金允植)·조희연(趙羲淵)·김가진(金嘉鎭)·안경수(安?壽)·김학우(金鶴羽)·유길준(兪吉濬) 등 17명이 의원에 임명되어 내정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뒤 개혁운동은 3차로 나뉘어 추진되었다.
<의의와 평가>
약 19개월 동안 지속되어온 갑오개혁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중도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갑오개혁을 평가함에 있어 이를 완전히 일본의 정치적 개입에 의한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견해와 일본세력이 배후에서 작용하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들이 주도한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율적 개혁으로 보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러나 통시적으로 볼 때, 갑오개혁은 멀리 실학(實學)에서부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에 이르는 조선시대의 여러 가지 개혁요구 내지 운동을 배경으로 하여 반청·독립정신을 가진 친일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개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조선사회에 있어서 근대적인 개혁에의 내재적 지향을 반영한 획기적인 개혁으로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나 청말(淸末)의 무술변법(戊戌變法)에 대비되는 우리 나라 근대화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이었다.
그러나 갑오개혁은 그 시의성(時宜性)과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추진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였다는 제약성 때문에, 반일·반침략을 우선시켰던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갑오개혁 [甲午改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갑오개혁> ->두산백과판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2차에 걸쳐 봉기한 반봉건·외세배척운동으로서의 동학농민운동이 실현되지 못한 가운데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청나라와 일본의 출병한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폐정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정부가 이에 동의함에 따라 양국은 더 이상 조선에 주둔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공동 철병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은 오히려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內政)을 개혁하자고 제안하였으며, 청나라가 이를 거절하여 회담이 결렬됨으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단독으로 조선에 대한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는데, 이는 침략정책 추진상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밝히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확립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군대는 왕궁을 포위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으며,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온건개화파의 친일정부를 수립하여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제1차 개혁
이 개혁은 노인정회담(老人亭會談)에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校正廳)에 의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어 제1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었으며, 김홍집·김윤식(金允植)·김가진(金嘉鎭) 등 17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라는 임시 합의기관이 설치되었다.
군국기무처는 중앙과 지방의 제도·행정·사법·교육·사회 등 제반문제에 걸친 사항을 3개월 동안 208건을 심의 의결하는 개혁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정치제도의 개혁을 단행,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사용하여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나타냈고,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宮內府)로 구별하고 종래의 6조(六曹)를 8아문(八衙門)으로 개편,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또 국왕의 인사권·재정권·군사권 등을 박탈하거나 축소하였다. 군국기무처는 의정부와 8아문을 정부의 실질적 집권기구로 만들어 권력을 집중시키고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8아문을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과거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관료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서울에 경무청(警務廳)을 새로 설치하여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게 하였다. 더불어 지방에는 각 도 관찰사 아래 경무관을 배치하여 치안을 맡게 함으로써 행정과 경찰권을 구분하도록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재정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하여 재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또 신식화폐장정(新式貨幣章程)에 따른 은본위제도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실시하였으며, 도량형(度量衡)을 개편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다. 이밖에 문벌·반상제도, 문무존비(文武尊卑) 구별의 폐지, 노비의 매매 금지, 연좌율 폐지, 조혼금지, 과부 재가 허용 등 조선사회의 폐단으로 지목된 여러 제도와 관습에 대해서도 개혁하였다.
제2차 개혁
2차개혁 때는 의정부를 내각이라 고치고 7부를 두었다. 인사제도는 문무관(文武官)을 개편하고 월봉제도(月俸制度)를 수립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8도(道)를 23부(府)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과 군사권을 박탈함으로써 횡포와 부패를 막아 지방행정체제를 중앙에 예속시키는 근대 관료체제를 이룩하였다.
사법제도는 행정기구에서 분리시켜 재판소를 설치하고 2심제(二審制)가 채택되었다. 1심 재판소로서 지방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開港場裁判所)를, 2심 재판소로는 고등재판소와 순회재판소를 설치하였고, 왕족에 대한 형사재판을 위해서 특별법원을 두었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을 추진하던 박영효가 1895년 반역음모 혐의로 정계에서 쫓겨나 일본에 망명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제3차 개혁(을미개혁)
을미사변 후 일본은 고종의 명을 받아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갑오개혁을 이어 계속 추진하게 되었다. 제3차 개혁의 주요 내용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시행, 우체사 설치, 소학교 설치, 1세 1원(一世一元)의 연호 사용[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建陽)이라는 연호 사용], 군제 개혁, 단발령(斷髮令) 등이다. 그러나 단발령의 강제시행은 유생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반일·반개화운동을 초래하였다. 아관파천 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김홍집은 분노한 국민에게 피살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일본의 지원으로 추진되어 전반적으로 타율적인 개혁임을 부정할 수 없으나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 관료들은 개항 후 1880년대 초반에 외교사절단원이나 유학생으로 외국에 있으면서 세계정세를 익히고 일본과 청나라의 개혁 등을 살핀 후 조선에 필요한 개혁방안을 실천에 옮긴 것이므로 자율적인 개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갑오개혁의 정신은 독립협회운동과 계몽운동으로 이어져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갑오개혁 [甲午改革]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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