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 문너머의 세계 - 강산무진2014.05.21 PM 0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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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 『강산무진』, 문학동네, 2006.

 

  서평쓰기가 즐겁지만은 않다. 작가들의 옥고(玉稿)를 평하는 일 자체가 만만치 않기도 하거니와, 그것의 흠결을 지적하려면 상당히 치밀한 안목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사람은 안목 없음을 감추기 위해 어설프기까지 한 수식어들로 원고를 뒤덮으려 안간힘을 다하기도 한다.)

 

  이렇게 안목을 유지한 채, 서평 쓰는 사람은 독자에게 설득시키기 위한 높은 수준의 논조를 공고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서평이 작품을 투영(投影)하긴 하지만, 서평을 통해 작품의 진가를 온전히 느낄 순 없다. 서평은 작품이 없으면 생길 수 없는 그림자이다. 또한 서평은 작품을 드러내는 거울 같은 수단이자, 그것에 담긴 의미들을 찾아내게끔 돕는 필터이다. 손에 든 필터를 내려놓거나, 그것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에서 서평자(者)는 한계를 지닌다. 나는 아무리 좋은 서평이라 할지라도 작품 자체가 지닌 격(格)과 위(位)를 뛰어넘을 순 없다고 믿는다. 작품을 보조하는 부가물인 서평은 작품의 질에 따라 격과 위가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왜 이런 말들로 김훈의『강산무진』이라는 책의 서평을 시작했는가. 김훈의 글에 대해, 그의 글이 지닌 격과 위에 걸맞은 서평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김훈이 독자의 뇌리에 감흥과 감동을 어떻게 자아내는지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지녔을 뿐, 그것이 무엇인지를 매끈하게 설명할 실력은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김훈이 꾸려놓은 서사의 숲으로, 그 우거진 가지 아래 깊이 낀 어둑함으로 나는 모두를 기꺼이 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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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산무진도. 이 그림을 깊이 들여다보고 소설을 읽어보세요. 소설의 맛이 달라집니다.

 

  김훈의 글은 강고하다. 서사의 숲에 깊은 뿌리를 박은 채 침침한 그늘을 드리우는 그의 세계는 창조자의 눈매를 닮아 몹시 서늘하다. 숲이 만든 그늘은 짙고 무겁다. 기름기 없는 짧은 문장은 뻑뻑하기 이를 데 없었기에 행간을 따라가던 나는 좀처럼 느긋할 수 없었다. 늘 그랬듯이, 김훈이 조성한 서사의 숲은 나를 긴장으로 옥죄게 하였다.

 

  작가 김훈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들을 따라가노라면, 이 빈틈없는 유물론적인 관점에 이내 숨이 막히고 만다. 아내의 임종을 지키는 사내의 부푼 방광과 암 선고를 받은 사내가〈강산무진도〉를 보고 깨닫는 숨 막힘 속에서 삶의 밀도는 너무도 빡빡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것일 뿐, 나의 것은 아니라는 명제 속에서 김훈의 인물들은 나눌 수 없는 고통 때문에 슬퍼하고, 끓어오른 슬픔을 지그시 눌러 아래로 퍼져나가게 만든다. 기쁨도 슬픔도, 사실은 나눠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나눠지지 않기에 커질 리도, 줄어들 리도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공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감은 절대로 온전히 이뤄질 수 없다. 누군가가 넘어져 피를 흘릴 때, 사람은 다친 이의 고통에 공감함으로써 교감한다. 하지만 그 고통은 내게 새겨진 기억의 복원에서 기인한 정신적 반응이며, 다친 이가 겪은 고통은 다친 이 자신에게 고유하게 속한 것이다. 아픔을 나누었다고 해서 아픔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위로라는 감화를 받음으로써 슬픔의 반대 심리를 보상받는 것이다. 결론은 이러하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

 

  나눌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각각의 인간이 속한 육신이라는 철폐가 너무도 공고하다는 사실이 인간이 지닌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김훈의 소설은 아름답다. 군더더기 없이 담박하기에 그의 문장들은 삶 자체를 겨누는데 어려움이 없다. 맑은 문장은 가벼이 뜨는 듯하다가 날카로이 내리 찔러 깊이 스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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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기 전에 읽어보세요.

만물에 생동감이 드는 계절에 이 책을 읽는 건 너무 맥 빠지는 일일 겁니다.

 

  사건을 조성하고, 이를 가다듬는 소설가 김훈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 냉엄함은 차라리 뜨겁다. 높이 솟은 파도 아래의 그늘진 어두컴컴함, 밑이 빠진다고 표현된 강물의 소리, 오줌으로 팽팽해진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몸의 조바심, 늙음과 질병을 통해 마침내 드러나 버린 인간의 화장기 없는 초라하고도 숭고한 맨얼굴을 김훈은 들여다보았고, 문장을 통해 독자에게 드러내어 보인다. 그가 맹렬하게 바라본 광경들을 바라보며 독자는 가장 뜨거운 얼음을, 가장 차가운 불꽃을 품는다.

 

  내가『강산무진』을 통해 느낀 가장 큰 미덕은 인간에 대한 김훈의 시선이다. 간암과의 기나긴 투병을 눈앞에 둔 아들은 육탈한 어머니의 유골을 마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시선은 그저 메말라버리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 서술 너머엔 서술되지 않은 복잡한 감정들이 출렁이고 있다. 뇌종양으로 빠개질 듯한 머리통을 부여잡은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 또한 마찬가지다. 사랑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 어찌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에 그는 고통을 겪는 아내를 무참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메말라 버린 눈물, 단독자일 수밖에 없는 인간은 초라함 속에서, 고독 속에서, 침묵 속에서, 질병 속에서, 외로움 속에서, 인생이 가한 철저한 패배와 패퇴 속에서 오히려 인간이 된다. 인간이 지닌 무력함은 마침내 역설 속에서 아름다워진다. 단독자인 인간의 고독이 온전히 그만의 것이라는, 인간이 진 짐은 절대로 나눠지지 않는다는 준엄한 명제야말로 누추한 생을 오히려 활짝 피어나게 만드는 역설인 셈이다.

 

  ‘너의 고통은 너의 고통이요, 나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다’라는 명제 속에서, 그것의 바닥엔 ‘어찌 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자리한다. 강과 산은 다함이 없다(江山無盡). 그렇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생의 삶이 다해감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삶은 다 하여 어디로 가는가? 그것들은 화장 후 한 줌의 유골이 되어 어디 메로 가는가. 혹여 머나먼 속세로, 경혈이 끊어지는 인생의 후반부로, 약간의 돈을 쥐고 이국의 땅으로, 해독할 수 없는 시그널로 뻑뻑거리는 항로표지판 앞으로 가는가?

 

  아, 실로 강산은 다함이 없어라.

 

  삶의 자취는 간 곳이 없어라.

 

  글이 남기는 향취의 머물 곳이 없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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