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수구파의 생얼] 인도의 아요디야 사태2015.06.11 PM 01:51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4월7일 시작되는 인도 총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이 높은 인도국민당은 힌두교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수구적 극우 정당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제도권 정치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인도국민당이 종교 근본주의와 증오를 활용한 선동으로 집권 가능 세력으로까지 발전한 경로를 짚어본다.
국민회의당은 인도 독립 이후 40여 년 동안 ‘네루 왕조’ 혈통주의로 이 나라를 통치해왔다. 극우 성향의 인도국민당은 오랫동안 권력의 언저리에도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 힌두 근본주의 노선을 본격 채택하면서 제도권 정치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당시 이들은 왜곡된 역사를 퍼뜨리며 ‘수구 집권 전략’을 가동하기 시작한다. “고대 인도는 세계 최고의 힌두 문명을 꽃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이슬람 세력이 인도를 침략해 초토화해버린다. 이후 중세의 암흑시대가 열린다.”
이는 원래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인도 민중을 분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퍼뜨린 ‘신화’다. 역사적으로는 어떤 근거도 없다. 그러나 이미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이슬람은 힌두 사원 파괴자’라는 정치적 메시지를 뿌려놓은 가운데 인도국민당의 역사 왜곡은 민중들에게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1992년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요디아에 위치한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인도국민당 세력의 주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무굴제국의 개조인 바바르가 16세기에 인도를 침략한 뒤 아요디아 지역의 힌두교 성지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그 위에 모스크(이슬람 사원)를 세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민회의당의 라지브 간디(인디라 간디의 아들)가 총리에 오른 1984년부터 극우 세력들은 아요디아의 이슬람 사원을 다시 파괴하고 라마 사원을 복구하자고 선동하기 시작했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서 무력충돌 기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종교를 정치로 끌어들여 민심을 자극하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라지브 간디와 국민회의당 정부는 이들의 준동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힌두교 세력의 지지를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종교로 민중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인도국민당은 좀 더 과감하게 나가기로 했다. 마침 국민회의당은 연립정부를 간신히 유지하는 등 ‘일당 지배 40여 년’ 체제가 동요하던 시기였다. 1986년 인도국민당 대표로 선출된 아드와니는 ‘힌두트와(힌두 근본주의 혹은 인도 사회 전반의 정체성을 힌두교로 정립하자는 정신)’를 사실상 당의 노선으로 천명했다. 그러자 힌두 근본주의 사회단체들인 민족의용단, 세계힌두회의, ‘하누만의 당’ 등이 즉각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결국 인도국민당의 ‘수구 집권 전략’은 1989년 총선에서 대성공을 기록한다. 인도 연방의회의 545석 중 무려 91석을 장악한 것이다. 인도국민당이 1984년 총선에서 단 2석을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힌두 근본주의 선동의 위력을 절감할 수 있다.
인도국민당은 매년 열리는 힌두교 축제 ‘라트야트라’(위)를 정치에 적극 활용했다.
총선 결과로 자신감을 얻은 인도국민당 아드와니 대표는 민중의 종교 감성을 좀 더 민감하게 자극할 수 있는 소재를 다시 찾아냈다. 바로 ‘라트야트라(Rath Yatra)’라는 힌두 축제다. 원래 이 축제는, 힌두교의 신을 거대한 전차 위에 안치한 뒤 정해진 코스를 따라 행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종교 축제를 정치에 이용할 기막힌 방법이 있었다. 행렬이 구자라트의 솜나트 사원에서 출발해 아요디아에 이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종교를 이유로 죽고 죽이고…피로 물든 인도
출발지인 솜나트 사원은 상징적인 장소다. 무슬림 측 기록에 따르면, 아프간 출신 침략자인 마흐무드가 1026년에 솜나트의 힌두 사원들을 연이어 파괴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도 서부의 한 사원에 대한, 당시에는 흔했던 약탈 사건에 불과했다. 무슬림 측 역사 기록은 자신들이 가한 침략 행위를 사실보다 더 크게 떠벌리거나 과장하는 것으로 악명 높다.
그러나 이 기록은 힌두 근본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었다. ‘무슬림이 힌두 문명 전체에 역사적 압살을 가했다’는 걸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착지인 아요디아는 비슈누(힌두교의 주신)의 화신인 라마가 탄생한 곳이다. 또한 무굴제국의 바바르가 라마 사원을 파괴하고 바브리 이슬람 사원을 세웠다고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아드와니는 1990년 9월25일 라마 신상을 앉힌 전차를 끌고 솜나트에서 아요디아로 출발한다. 전국에서 모인 힌두 근본주의 세력들은 아드와니와 함께 이후 한 달여 동안 인도 대륙을 서부에서 북동부로 가로지르며 ‘힌두 사원 회복’ ‘세속주의 폐기’ 등을 떠들며 민심을 자극했다.
이 ‘아요디아 이슈’로 인도국민당은 또다시 톡톡히 재미를 본다. 1991년 총선에서는 의석이 119석으로 늘어났다.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는 지방정부까지 구성했다. 탄력을 받은 수구 세력들은 1992년 12월6일을 ‘바브리 사원을 해체하고 라마 세원을 건립하는 행동의 날’로 선포했다. 국민회의당 중앙정부는 아요디아에 군대를 파견해 바브리 사원의 파괴를 막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힌두 근본주의자들은 아랑곳없었다. 아드와니 등 인도국민당 소속 유명 정치인이 ‘행동의 날’에 참여하겠다고 잇따라 선언했다. 여기 선동된 힌두 행동대원 수십만 명이 아요디아 바브리 사원으로 몰려들었다. ‘행동의 날’ 당일에는 군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바브리 사원으로 돌입해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라마 신상을 모신 천막을 치고 주변에 담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232명이 살해되었다.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행동의 날’, 바브리 사원이 파괴되는 장면이 텔레비전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중계되면서 인도 전역에서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충돌이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이후의 유혈 사태로 20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아요디아 사태 이후 힌두 근본주의 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파죽지세로 성장했다. 1996년 총선에서는 161석을 차지해 제1당 지위에 오르면서 소수 정당과의 연정으로 비록 13일간이지만 집권당 지위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다 1998년에는 182석(제1당)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해 2004년까지 집권했다. 그사이 인도 방방곡곡은 힌두교도의 집단 학살과 무슬림의 보복 테러로 피에 물들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요 선거를 앞둔 시기엔 어김없이 테러와 학살이 벌어졌다. 이렇게 인도는 공포와 보복이 일상화된 나라로 전락했다.
댓글 : 0 개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