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잡담] 이박사 위엄2010.07.03 PM 10:30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이박사는 가수 데뷔 전 10년간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함

이박사의 특별한 노래와 추임새로 업계에서는 제법 인기 있는 가이드였는데

그의 노래를 들은 지방 클럽 사장이 음반 제작을 권유했고 스튜디오 녹음 2시간만에 첫 번째 음반이 나왔다

첫번째 앨범은 그당시 유통망이라던지 집계하기가 힘들지만 이박사 본인이 7백만 장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다가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듣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다

소니에선 처음에 일본어 음반을 내자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고집이 강했음 일본말은 발음 자체가 이상하고 싫다 라고 하면서...

계약이 파기될 뻔도 했지만 히트가능성을 예감한 관계자는 어쩔수 없이 이박사 뜻대로 하기로 했다

일본에 한류고 뭐고 없던 시절에 현란한 복장을 한 한국인이 나와서 일본의 엔카 비슷한 음악을 사이키델릭하게 부르는 모습은 레알 컬쳐쇼크였다

소니뮤직과 자회사 큔소니 레이블은 발빠르게 한국어 앨범을 제작해 대대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박사가 일본에서 발매한 싱글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 & 2'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

1990년 일본 최고의 테크노 그룹인 덴키그루브(DENKI GROOVE)와 함께 만든

'이박사 & 덴키그루브:열려라 뽕짝' 등은 엄청난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리곤 1996년 이박사는 '일본 가요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1년 계약이었던 이박사는 6년간 소니와 계약하여 활동하게 된다

그당시 팬클럽 회원 8만명

오히려 일본에서는 20~30대 젊은 팬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고

일본에서 모기 살충제 CF도 찍었고

후지 tv 음악프로그램 '헤이헤이헤이'에 출연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6년 부도칸 1만 7천석 만석을 채웠다

08년 인터뷰 당시에도 일본에서 오라고 했는데

외국은 지루하고 물가도 비싸고 젊은이들이 자꾸 알아봐서 불편해서 안간다고 대답함


1996년 이박사는 도쿄대의 초청을 받고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강의도 했었다

그후 도쿄대에는 한국어 강좌가 생겼음

이후 인터넷을 통해 이박사의 일본 활약상을 본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음반을 역수입 하게되고

그는 곧 일본 활동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공식 음반을 내고 국내 활동을 시작했다.




이박사의 스페이스 판타지 일본판
댓글 : 13 개
위엄 쩌네..;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명작이었지요. 뽕짝을 엔카의 아류에서 하나의 장르로 발전시켰으니까요.. ^^
레전설 이박사 ㅋㅋㅋㅋㅋ 진짜 이렇게 씬날수있다니
이박사 정말 좋아했었는데 ㅎ
음치였던 제가 2000년 당시 이박사 모창으로 목이 트였습니다
  • HTC
  • 2010/07/03 PM 10:50
앍 우리동네 사시는데
  • DEGR
  • 2010/07/03 PM 10:50
박사님이 쵝오
이박사 고삐리 때 원숭이 나무에 올라가~이거 대박이었는데 ㅋㅋ
지금 차에서 크게들으면 존나 골깜 ㅋㅋ 사람들 다 쳐다봄
지금 이박사님은 57세임에도 반짝이 쟈켓과 백바지 백구두를 신고

천마산 기슭 오남리의 자신의 까페에서

"세상 뭐 있어?" 즐겁게 살다 가는거지 라는 말을 시작으로 노래를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이박사 최고죠.
  • paraD
  • 2010/07/03 PM 11:08
이거슨 레전드...ㅋㅋ
스페이스판타지는 일본어든 뭐든 가사까지 외울정도였는데..
한국어버전을 알게되자 마자 일본어 가사는 광속으로 까먹어버렸음 ㅋㅋ
이제 들어보니 괴혼 노래들과 비슷하네요..ㅎㅎ
  • S&L
  • 2010/08/06 PM 05:02
정리 정말 말끔하게 잘하셨네요.
일본무도관에서 공연한 적까지 있는 슈퍼스타인데
한국에서는 그냥 엽기가수취급이나 하는 건 진짜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