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ㅇ잡담ㅇ] 몇몇 분들은 국내 도입을 바랄 종교입니다.2011.03.02 PM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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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초월하기 위해 성욕을 없애려 했던 러시아의 수도사들.



어떤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비하 내지 열등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허기에 시달릴 때와 배설을 할 때라고. 나는 거기에 덧붙여 성욕을 느낄 때도 추가하고 싶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이라 부르며 동물과 구분된다고 하지만, 과학 기술과 도덕적 관념을 제거하고 생체 본능만 남는다면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



먹고 자고 배설하고 그러다 죽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극복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바로 ‘종교’인데, 간혹 어떤 사람들은 이 종교에 깊숙이 심취한 나머지 아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기행을 벌이기도 한다.

카톨릭의 신부와 수사, 수녀들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신앙 생활에만 몰두하는 것이 규칙이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성이 개입된 불미스러운 사고를 심심치 않게 저지른다. 그러자 “아예 섹스를 할 수 없게 성기를 없애면 되지 않겠느냐?”는 극단적인 발상까지 나왔는데, 바로 근대 러시아의 기이한 신흥 종교, 스코프츠이에서 그런 주장을 했다.



1771년, 러시아 서부의 마을인 오룔(Oryol)의 농부 안드레이 이바노프(Andrei Ivanov)는 성경에 담긴 교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스코프츠이(Skoptsy)라는 비밀 종파를 창시했다. 스코프츠이는 거세하다는 뜻의 러시아어 스코페츠(skopets)에서 유래했는데, 말 그대로 신도들에게 성기를 자르라고 권유하는 종교 단체였다. 다른 말로 해석하면 거세파 교단(去勢派 敎團)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멀쩡한 자신의 성기를 자른다니, 우리의 상식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안드레이 이바노프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죄와 부끄러움을 느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창세기의 구절을 독특하게 풀이했다. 아담과 이브에게 죄를 알게 해준 선악과는 둘로 갈라져 사람의 몸에 붙었는데, 그것이 바로 남자의 고환과 여자의 젖가슴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 인류가 원죄를 짓기 전의 순수한 상태로 돌아가려면 사람이 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성기와 젖가슴을 몽땅 잘라내야 한다는 논지였다.



이바노프의 주장이 그럴싸했던지, 그의 이웃에 살던 농부 13명은 그가 만든 스코프츠이 교단에 들어가 자진해서 거세를 했다. 하지만 마을에 들르는 상인들을 통해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자, 러시아 정부는 스코프츠이 교단을 혹세무민의 사이비 종교로 규정하고 그들을 검거했다. 이바노프와 그를 도운 조수인 또 다른 농부 콘드라티 셀리바노프(Kondratii Selivanov)는 채찍질을 당하고 함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1755년, 셀리바노프는 시베리아에서 탈출하여 다시 교단을 만들고 가는 곳마다 스코프츠이 교단의 교리를 전파하고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왕 거짓말을 할 바에는 아예 큰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는 말처럼, 그는 자신이 죽은 차르(러시아 황제의 호칭)인 피터 3세(Peter III)이자 인간으로 나타난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대중 매체의 호기심을 한 몸에 받는 허경영처럼, 셀리바노프도 러시아인들에게 무척이나 인기 있는 스타로 여겨졌다. 안드레이가 처음 교단을 만들었던 때와는 달리, 셀리바노프가 다시 세운 스코프츠이 교단에는 가난하고 무지한 농부들뿐만이 아닌, 귀족과 군 장교 및 공무원과 부유한 상인에 기성 교단의 교리에 의문을 품은 성직자들까지 몰려들어 서로 입교하려 애를 썼다.



18년 동안 셀리바노프는 그를 추종하는 신도들의 도움으로 수도인 상태페테르부르그(SaintPetersburg)에서 부유하게 살았다. 한 때는 자신이 피터 3세라고 말한 내용에 호기심을 가진 차르 파벨 1세가 그를 불러 직접 만나볼 정도로 그는 러시아 정계에서 화제 거리였다.



셀리바노프를 만난 파벨 1세는 그가 자신의 부친인 피터 3세가 아님을 알고 1797년, 그를 황족 사칭죄로 투옥시켰다. 그러나 1801년 3월 23일, 파벨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1세(Alexander I)가 즉위하자, 셀리바노프는 자유를 되찾았고 스코프츠이 교단 역시 다시 합법적으로 활동했다.



부친과는 달리 알렉산드르 1세는 셀리바노프가 주창한 교리에 깊이 공감하여 그를 황실의 귀빈으로 우대하고 자주 초청하여 설교를 듣기도 했다. 짜르의 총애를 받은 셀리바노프는 궁전에 자유자재로 드나들며 대귀족과 고위 장성 같은 권력층들과도 교제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가 주창한 교리를 따른 대표적인 유명 인사로는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18세기 말의 명장인 수보로프 장군도 포함되었다.



셀리바노프와 스코프츠이 교단은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고 후계자인 니콜라스 1세(Nicholas I)가 즉위하자 교단 소유의 수도원들이 강제로 폐쇄되는 등의 박해를 받기도 했지만, 교세는 위축되지 않고 계속 신도들을 늘려갔다. 러시아 정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866년까지 공식적으로 거세파에 가입한 신도들은 총 5444명인데, 그 중에서 남자 신도 703명과 여자 신도 100명이 각각 고환과 젖가슴을 잘라내는 거세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공식적인 명칭을 ‘거세’라고 붙였지만, 스코프츠이 교단에서는 신도들에게 거세를 강요하지 않았다. 물론 자진해서 거세를 하는 신도들은 하지 않는 신도들보다 “성욕을 극복한 훌륭한 사람”이라는 식으로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말이다.



스코프츠이 교단의 종교 의식은 이슬람교의 소수파인 수피 교단(sufism)에서 추는 원무(元舞)와 비슷하다. 아마, 수피교단의 예식을 보고 영향을 받은 듯하다. 예배는 언제나 밤중에 열리는데, 스코프츠이 교단에서는 밤을 “신비의 시간”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예배에 참가하는 신도들은 모두 하얀 색의 상의와 바지를 입고서 지하실로 내려가, 다른 신도들과 함께 무아지경에 빠질 때까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신을 찬양하는 찬송가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예배를 계속하다 해가 뜨는 아침이 되면 의식을 끝내고 차를 마시고 즐겁게 이야기를 하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정교회를 비롯한 기성 교단에서는 스코프츠이 교단을 가리켜 “사악한 이단인 사이비 집단!”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했지만, 사실 스코프츠이에서는 기독교의 교리를 크게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에 예언된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을 믿었으며,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찾아온다는 내용을 크게 강조했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자신들의 신도 수가 종말 전에 하늘로 올려져 구원을 받는다는 사람들의 수인 14만 4천 명에 이르러야 이루어진다는 부분을 덧붙이기는 했다.



20세기 초에 이르자 스코프츠이 교단의 신도수는 1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리는 구원은 오지 않았다. 1876년, 차르 알렉산더 2세가 내린 스코프츠이 탄압 정책은 계속 되었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고 소련이 들어서자 교단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정부의 방침에 그들만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소련 정부는 스코프츠이 신도들을 체포해 집단 농장이나 시베리아의 유형소로 보내는 식으로 혹독하게 탄압했고, 이에 저항하는 신도들은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코프츠이 교단은 20세기 중엽까지 소련의 변방이나 오지 마을 등에서 은밀하게 존재했다고 추측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스코프츠이 교단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괴팍한 자들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성적인 욕망에 휩싸여 있는 한, 결코 구원과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신약 성경의 마태복음 22장 30절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친히 “부활의 날에는 사람들이 장가들지도 시집가지도 않으며 다만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된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성욕의 갈등에서 벗어나면 좀 더 초인적인 존재로 진화한다는 믿음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원래 인간들은 남녀가 한 몸이었고 팔과 다리도 네 개고 눈도 네 개여서 지금보다 힘과 지혜가 훨씬 뛰어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이 너무 강력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신 제우스가 마법으로 인간들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시켜 버리자 모든 면에서 인간은 약해져 버렸고, 평생을 자신의 짝을 찾아 헤매는 바람에 그만큼 귀중한 인생을 낭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나 영웅들은 자신들이 성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널리 선전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겠지만) 한니발을 자마에서 격파하여 공화정 로마를 구한 명장 스키피오만 해도 포로로 잡힌 아름다운 소녀들을 전혀 손대지 않고 풀어 주었으며, 훗날 로마 제정 말기의 황제 율리아누스도 이런 스키피오를 본받아 전쟁터에서 생포한 페르시아 여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로마인 뿐 아니라 그들에게 야만인이라고 경멸받던 게르만족들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카이사르가 남긴 갈리아 전기에 의하면 게르만족들은 가급적 성관계를 하지 않는 자가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어,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다는 믿음을 지녔다고 한다.



비슷한 예로 중국을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거세한 환관들에게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다. 실제로 환관들로 구성된 부대는 성욕에 시달리지 않는 덕분에 무도에만 전념하여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5대 10국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송태조 조광윤의 장수였던 진한이나 서하(西夏) 왕국을 격파하고 방랍의 난을 진압한 동관도 모두 환관이었다. 이들과는 좀 다르지만, 명나라 영락제의 지시로 7차례에 걸쳐 동아프리카와 아랍에 이르는 대항해를 단행한 제독 정화도 환관의 몸이었다.



안드레이 이바노프와 비슷한 발상을 한 사람이 한국에도 있었다. 1979년 신흥 종교인 단군교를 창시했다가 1996년에 개신교로 개종한 목사 김해경 씨는 그가 쓴 자서전인 <주여, 사탄의 왕관을 벗었나이다>에서 산 속에서 자신과 함께 도를 닦던 사이비 교주들 중 한 명이 성욕이 있으면 득도에 도달할 수 없다는 발상을 해서 스스로 거세를 했다고 한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의 생각은 일맥상통하나 보다.



성적인 욕망은 생명체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는 것도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려는 본능적인 욕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성욕은 인간도 동물의 하나임을 증명해주는 굴욕적인 표식이기도 하다. 자신의 성기를 잘라내는 아픔을 무릅쓰면서까지 거세를 했던 사람들의 심정에는 생로병사의 굴레에 억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피나는 노력이 숨겨져 있던 것이 아닐까?

출처 : http://blog.daum.net/timur12/7090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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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인지(?) 국내에는 안 퍼지는 사이비종교(..)
댓글 : 3 개
jms 섹스교등 이미 퍼졌다가 걸린게 꽤나 많습니다.
2000년초반에반 재림예수가 60명 돌파했었슴.
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개신교가 지금 이리 개막장인것도

[결혼이 가능해서 성직자가 가정을 이룬다는것 + 교회의 사유화]

가장 큰 이유같아요.

그러니 개신교목사들도 다 거세합시다(라고 하면 조낸 쳐발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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