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262018.10.06 PM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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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3장 -격투 끝에

 

 

一. 전투의 전개

 

◇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 행행(行幸)

~ 이러는 동안, 고시라카와 텐노(後白河天皇)는 사토다이리(里内裏)인 타카마츠도노(高松殿)에서, 미리 접수해둔 셋칸케(摂関家)의 저택인 히가시산죠도노(東三条殿)로 이동했다. 두 저택은 인접해 있었기에, 행행(行幸) 거리 자체는 극히 얼마 되지 않았지만, 검새(剣爾: 텐노 가문의 보물인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와 야사카니노마가타마)는 물론이고, 나이시도코로(内侍所)까지 챙긴 본격적인 텐노의 이전... 당시 말로 표현하자면 이시(移従)이다.『兵範記(효한키)』에 이유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필시 방어에 적합한 구조였던 것이나, 후지와라노요리나가(藤原頼長) 이하의 셋칸케의 굴복, 칸파쿠(関白)인 후지와라노타다미치(藤原忠通)와의 협조를 상징하는 의미 등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여 고시라카와 텐노는, 익 호겐(保元) 2년(1157)에도 7월부터 8월에 걸쳐 히가시산죠도노를 자주 사토다이리로 삼았다. 10월에 새로운 텐노의 권위를 보여주는 새로운 다이리가 완성되기 직전의 일이다. 미치나가(道長) 이래의 전통을 가진 셋칸케의 저택은, 고시라카와의 권위를 보여주기에 적합한 장소라 여긴 면도 있지 않았을까?

 덧붙여, 히가시산죠도노에는, 나이다이진(内大臣) 후지와라노사네요시(藤原実能)나 고시라카와 텐노의 뇨고킨시(女御忻子)들도 같이 들어갔다. 

 이리하여, 히가시산죠도노는 왕권의 소재지가 되었다. 하지만, 병란 종료와 함께 고시라카와 텐노는 타카마츠도노로 돌아갔기에, 이번 이시는 정치적이라기 보다도, 역시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행했다고 생각된다.

 히가시산죠도노의 경호는 엄중히 행해졌다. 건물의 삼면에 있는 문을 무사들이 지키고, 거기다 쇠사슬로 문 안팎을 막아놓았다. 이 무사들을 무장한 타키구치(滝口)가 오우료시(横領使)로서 통솔하고 있었다 한다. 여기서 경호를 담당한 무사들은, 쿄(京)의 지리에 어두웠으니, 여러 나라에서 동원된 자들이 아니었을까? 

 또, 히가시산죠도노 안에서는 미나모토노요리모리(源頼盛)가 수백명을 이끌고 진두를 결호하고 있었는데, 이 요리모리는 타다 겐지(多田源氏) 출신 무장으로, 유키쿠니(行国)의 아들이다. 그 유명한 카자미도리(風見鶏)라 칭송받은 유키츠나(行綱)의 부친에 해당한다. 부친이 죽은 뒤인 닌페이(仁平) 3년(1153)에는 동생인 요리노리頼憲와 부친이 남겨준 영지를 두고 싸운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요리나가에게 종속한 동생 요리노리와 대립, 타다미치 측에 참전한 것이다.

 방어를 강화하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전투의 결착이 보이지 않았던 데에 짜증난 고시라카와 텐노 측은, 원군으로서 제 2진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면면들은 미나모토노요리마사(源頼政), 미나모토노시게나리(源重成), 그리고 타이라노노부카네(平信兼)였다.

 필두에 이름을 올린 요리마사는『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에서, 키요모리, 요시토모와 함께 제 1진으로 출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가, 거의 4반세기를 지나 지쇼(治承) 4년(1180), 모치히토왕(以仁王)과 함께 헤이시(平氏) 타도의 기치를 걸고 거병해, 겐페이 쟁란의 불씨를 당겼다는 것은 잘 알려진대로이다. 그의 무명(武名) 때문에, 키요모리, 요시토모 다음 가는 무장이라 인식되어, 사실이 개변(改変)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 요리마사는 미나모토노요리미츠(源頼光)를 선조로 하는 셋츠 겐지(摂津源氏)의 무장이었는데, 미츠나카(満仲) 이래의 영지인 타다多田를 계승한 요리모리 등의 계통과 달리, 셋츠 주변(현재의 오오사카 시 히가시 구)을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또, 정치적으로도 셋칸케를 모시지 않고, 비후쿠몬인(美福門院)과 가까운 입장에 있었다.

 다음으로 시게나리는 미나모토노미츠나카의 동생인 미츠마사(満政 = 満正)로부터 시작된 계통으로, 오우미(近江), 미노(美濃) 부근을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조부인 시게무네(重宗)는 요시이에(義家)의 추격을 받아 굴복해, 연대적으로 맞지 않는 면도 있지만, 형인 시게토오(重遠)는 요시이에의 사위가 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숙부 시게토키(重時)가 호쿠멘 무사(北面武士)가 되는 등, 카와치 겐지의 쇠퇴와 함께 인(院)과의 결합을 강화하고 있었다. 동생인 시게사다(重貞)도 고시라카와 측의 무사단으로서 참전하고 있어, 그가 쏜 화살이 요리나가를 명중시킨다거나, 난 이후에 타메토모(為朝)를 체포한다거나 하며 화제가 많았다. 덧붙여, 이 시게나리는, 나중에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에서 요시토모를 따르다 멸망하는 운명을 맞이한다.

 노부카네는 이세 헤이시(伊勢平氏)의 방류(傍流) 출신으로, 호쿠멘 무사인 모리카네(盛兼)의 자식이다. 호겐의 난(保元の乱)이 일어나기 1년 전인 큐쥬(久寿) 2년 2월에는, 길에서 만난 요리나가 일행에게 손쿄의 예(蹲踞の礼: 귀인이 지나갈 때 앉아서 머리를 숙이는 예법)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부터 폭행을 당해 난투를 벌인 적도 있다. 우발적인 난투에 대한 원념(怨念)으로 요리나가를 적대했다는 해석도 있지만, 요리나가에게 싸움을 걸기 위해 돌아다닌 불량배는 아니다. 부친인 모리카네는 타다미치(忠通)를 모시기도 했고, 후술하듯 노부카네도 타다미치의 영지의 장관이었다고 생각된다. 요리나가와 첨예하게 대립한 타다미치를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요리나가는 불합리한 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전투의 자세한 양상은 요시토모가 계속해서 보내고 있던 사자에 의해, 고시라카와 측에 전해지고 있었다.『愚管抄(구칸쇼)』에 따르면, 당시 5위 쿠로도(蔵人)였던 무라카미 겐지(村上源氏) 출신의 미나모토노마사요리(源雅頼)의 일기에는「暁ヨセテノチウチヲトシテカヘリ参マデ、時々刻々、只今ハ、ト候、カウ候トイササカノ不審モなく、義朝ガ申ケルツカイハハシリチガイテ、ムカイテミムヤウニコソヲボヘシカ。ユユシキ者ニテ義朝アリケリ」라 기록되어 있었다 한다.

 현장감 넘치는 상세한 보고를 계속해서 보낸 요시토모에게, 마사요리는「ユユシキ」... 즉, 뛰어나고 비범한 인물이라는 찬사를 보냈던 것이다. 고시라카와 측의 중심으로서, 전투에 강한 책임감을 가진 요시토모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윽고 전투가「자웅을 겨루게」되었다는 사자의 보고가 들어왔다. 이 소식을 들은 고시라카와 텐노는 소원을 빌고자 신하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에, 진각(辰刻: 오전 8시 무렵)이 되어 드디어 동쪽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요시토모나 키요모리들이 시라카와도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전투는, 결국 고시라카와 측의 승리로 끝났다. 개전으로부터 4시간 남짓 한 시간이 걸린 격투였다는 뜻이다. 이하, 전투의 상세한 양상에 대해 검토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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