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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호겐・헤이지의 난 #482018.11.05 PM 11:47
제 04장 -새로운 싸움
三. 노부요리(信頼)의 승리
◇ 노부요리(信頼)의 정무(政務)
~ 난(乱)이 발발하고 닷새가 지난 14일에는 임시 지모쿠(臨時除目)가 치러졌다. 난의 군사면에서의 입역자인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는 하리마노카미(播磨守)로, 그의 적자인 요리토모(頼朝)는 우효에노곤노스케(右兵衛権佐)로 임명되었다. 요리토모의 보임(補任)은『公卿補任(쿠교부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식 지모쿠였다. 고활자본(古活字本)『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는 후지와라노노부요리(藤原信頼)가 염원하던 오오오미(大臣), 타이쇼(大将)가 되었다고 하지만,『愚管抄(구칸쇼)』나 고태(古態)를 전하는『平治物語(헤이지모노가타리)』는 무사들의 지모쿠만 있었다고 나온다. 다만 후자에는 셋츠노카미(摂津守) 타다 요리노리(多田頼範: 호겐의 난으로 멸문한 요리노리를 가리키는 걸까)나 사에몬노죠(左衛門尉) 미나모토노카네츠네(源兼経) 등... 실존여부가 의심되는 인명(人名)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요시토모의 하리마노카미 취임은, 호겐의 난(保元の乱) 이후의 타이라노키요모리(平清盛)에 대항한 것이라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당시의 키요모리는 더욱 더 격이 높은 다자이다이니(大宰大弐)였기에, 대항한 것이라 봐서는 안 된다. 또, 하리마노카미는 즈료(受領) 중 최고봉인 위치였기에, 요시토모는 오히려 그러한 권위나 수입을 필요로 했으리라 생각된다. 전임 하리마노카미는 신제이(信西)의 자식인 시게노리(成憲)로, 그가 해임되는 것에 의해 요시토모는 이 지위를 얻은 것이다.
한편, 요리토모는 이미 죠사이몬인(上西門院)의 쿠로도(蔵人)라, 카와치 겐지(河内源氏)가 배출한 첫 쿠로도에 취임하고 있었는데, 우효에노곤노스케라는 인(院)의 근신의 명문가의 자제들이나 얻었던 지위를 얻어, 적자의 지위를 확실하게 다졌다. 이것은, 이미 5위로 승진하여 츄구우다이부신(中宮大夫進)이 되어 있던 형 토모나가(朝長)와의 입장이 역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일이 있기 1년 전, 토모나가의 모친의 오빠인 하타노 요시마치(波多野義通)는 요시토모와 대립하다 사가미(相模)의 영지로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요시토모의 적자 자리를 둘러싼 문제가 관련되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덧붙여, 후지와라노타다치카(藤原忠親)의 일기인『山槐記(산카이키)』에 따르면, 이 헤이지 원년(호겐 4년) 2월 19일, 죠사이몬인의 인호(院号) 선하(宣下)에 따라 뇨인(女院)의 덴죠비토(殿上人)를 선발하는「덴죠하츠(殿上始)」의 의례가 치러졌다. 이때, 참가한 타이라노키요모리 이하 덴죠비토들에게 쿠로도들이 술을 따르고 있었다. 요리토모는 첫잔을 담당하고 있어 요리토모와 키요모리가 여기서 대면했다는 것은 의심 할 여지가 없다. 어쩌면 키요모리는 급속도로 대두하고 있는 요시토모의 적자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을 것이다.
9일에 있었던 거병 이후, 일단은 놓쳐버린 신제이였지만, 그의 목은 고쿠몬(獄門)에 효수되고, 자식들은 유배되면서 이치몬(一門)은 괴멸되었다. 텐노와 죠코(上皇)는 다이리(内裏)에다 확보해 두고 있어, 입장의 정당화에도 성공한 상태였다. 거병 당초, 노부요리 이하의 反신제이파의 기대대로 사태는 진행되고 있었다.
『구칸쇼』에 따르면,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를 잇폰고쇼도코로(一本御書所)에 유폐함과 동시에 니죠 텐노를 다이리에 머물게 해 텐노의 이름 아래에서 공적인 인사나 처벌을 행했다. 그는 고시라카와에게 의존하지 않고, 텐노의 명을 바탕으로 정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부요리는 확실히 고시라카와의 근신이었다. 하지만, 난이 발발한 뒤의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의 유서 깊은 인고쇼를 파괴하여 그 권위를 부정함과 동시에, 새로운 인고쇼도 만들어주지 않은 채로 다이리 안에 있는 고쇼도코로에다 가둬놓았다. 이리하여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를 정무로부터 격리시켜 니죠 텐노에게 정무를 행하게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일찍이 졸저에서, 고시라카와인의 측근인 노부요리들과 니죠 텐노의 측근인 츠네무네経宗, 코레카타(惟方)가 反신제이라는 뜻 아래에 야합하였으나, 신제이를 타도한 뒤에 평소의 대립의 불길이 다시 타올라서 분열했다고 설명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노부요리는 고시라카와의 인정을 부정하고 니죠에게 정무를 맡게 하고 있다. 원래, 친정(親政)이니 인정이니 하는 기본 방침이 어긋나있는 채라, 거병을 한다는 건 역시나 쉽게 생각하기 어렵다. 또, 당시의 노부요리는 칸파쿠(関白)의 후견인이라는 입장에 있어, 텐노나 칸파쿠에 의한 정무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원래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의 근신이었던 것도 관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정당하게 즉위한 제왕 니죠는 이미 열일곱 살... 친정도 가능한 연령을 맞이하려 하고 있었다. 성인 텐노를 맞이했는데, 권위도 모자란 고시라카와가 인정을 행하는 건 곤란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생각해보면, 노부요리는 츠네무네, 코레카타와 제휴하여 인정을 부정하고, 친정을 지지했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앞에서 설파했던 것은 정정하고 싶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신제이가 노부요리에게서 느낀 위험성은 단순히 자신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신제이가 그에게서 느낀 위험성은 고시라카와에 대한 공격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장한가(長恨歌)」에마키(絵巻)에 대해 재삼 다뤘는데, 그 안에서 현종 황제(玄宗皇帝)의 총신이었단 안록산(安禄山)이 공격한 것은, 현종 자신이었다. 즉, 노부요리의 칼 끝이 향하고 있었던 것은 고시라카와나 다름 없었다. 신제이는, 노부요리가 고시라카와의 총신이었으면서도, 친정파와 제휴하여 고시라카와의 인정을 부정하려 하고 있었던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헤이지모노가타리』는, 신제이가 고시라카와를 대신해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어디까지 사실을 반영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신제이에 대한 반감이 고시라카와 공격으로 이어졌음을 회피하려는 움직임을 반영한 일화가 아니었을까?
그건 그렇다 치고, 고시라카와의 인고쇼인 산죠도노(三条殿) 습격이라는 이상 사태의 배경에는, 단순히 신제이 일족의 배척을 바란 것 만이 아니라, 도무지 정당한 제왕이라 말 하기 힘든 고시라카와의 인정을 정지시키려는 反신제이파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리하여, 노부요리는 숙적인 신제이를 타도하여 고시라카와의 인정을 부정, 니죠 텐노의 친정 확립의 입역자가 되었다. 공경(公卿)의 반열에 들어서고서 불과 3년도 채 걸리지 않아 노부요리는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정점에 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영광의 나날은 신제이와 비교하면 그에 미치지 못 했을 정도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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