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증보판 마츠다 세이코論』#152016.03.02 PM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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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2장 -푸른 과실(果?)의 성숙(成熟)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의 궤적






◇<안타까움>인가<부조리>인가? -「?須賀スト?リ?(요코스카 스토리)」
~ 사소설풍(私小?風)의 방식을 취한 모모에의 「푸른 성(?い性)」 노선은 궤도에 올랐다.
말해보자면, 마이너조의 빌둥스로만(Bildungsroman: 내적 성장 소설)은, 하얀 천사 모자나 10년이 하루같은 아무런 변화 없는 엔카(演歌)나, 해피 일변도의 플라스틱 팝에서 거짓된 분위기를 느끼고 있던 사람들 속으로 침투되어 갔다.
과제는 사소설 다음 장면으로의 전환이다. 이는 의외로 어려워서, 「ちっぽけな感傷(보잘 것 없는 감상)」부터 「愛に走って(사랑에 매달리며)」까지의 7곡은 문자 그대로 동공이곡(同工異曲)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곡이다. 「ひと夏の??(어느 여름날의 경험)」으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이 경과하려 하고 있었다.
모모에 자신도 당초에는 충격을 받았던 이 노선에 결국은 「아이돌이라는 노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무난한 곡 작업」(아기 요코 『プレイバック PARTⅢ』에 기고한 해설문으로부터)으로, 내쳐버린 듯한 시각을 하게 된 것이다.
즉, <추상(抽象)으로서의 남자>를 향한 소녀의 자기 방치라는 마음가짐은 이미 확실하게 학습해버린 모모에가, 학습에서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본보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기의 강도에 있어서, 모모에는 스태프들의 그것을 크게 상회하고 있었다.
때마침 자주 들었던 다운?타운?부기우기?밴드의 「?のシ?クレット?ラブ(눈물의 시크릿 러브)」에 매료된 모모에는, 우자키 류도(宇崎?童)와 아기 요코(阿木燿子) 콤비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마음 먹은 것이다.
하지만, 이 무렵 리젠트 머리와 불량스러움 같은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던 다운?타운?부기우기?밴드의 우자키 류도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인해, 우자키의 이미지가 모모에에게 덧씌워질 것을 두려워한 매니져들은 난색을 표했다.
실험적 시도로서, LP 『17才のテ?マ 山口百?(열일곱살의 테마 야마구치 모모에)』에 세 곡, 「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碧色の瞳(푸른 눈동자)」 「幸福の?感(행복의 실감)」이 채용되었다.
그리고, 아기 요코의 가사 속에서, 모모에는 센케 카즈야(千家和也)에게는 없던 것을 발견한다.

「碧色の瞳」
何?ない事から感じるものなのです
(별것 아닌 일로부터 느끼는거랍니다)
コ?ヒ?をモカに?えた
(커피를 모카로 바꿨던)
あの時からですね
(그때부터 말이예요)

言葉でかくしても?わるものなのです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거랍니다)
ブル?スが好きと言った
(블루스가 좋다고 말했던)
あの時からですね
(그때부터 말이예요)

私より大人のひとですか?
(나보다 어른인가요?)
私より素敵な人?
(나보다 멋진 사람인가요?)

"嫉妬は碧色の瞳をもっているという言葉を知っていますか?"
(질투는 푸른색 눈동자를 지녔다는 말을 알고 있나요?)

そう、その例えが今は心に痛いのです
(그래요, 그 설마가 지금은 마음 속에서 아픔이 되어 있어요)


아기 요코의 단어의 세계가 가진 특징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원 씬에서 스토리 전체를 연상시키는 것에 의한 이미지 공간의 확대
② 원료(material)를 구사한 연극적 비쥬얼 효과
③ 나 - 그대의 양자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제 3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

한마디로 말하자면, 입체적인 극작술(Dramaturgie)이라는 존재이다. 이것에 의한 효과는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센케 카즈야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엔카적 단조로움을 불식시켰다는 것. 또 하나는 소녀의 백일몽 같은 환영이 리얼한 드라마로 승격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작곡자가 토쿠라 슌이치(都倉俊一)에서 우자키 류도로 바뀌는 것에 의해, 투명감 있는 화려한 선율이 Rock의 불협화음으로 대체되었고, 때문에 일종의 토속적인 현실감을 띄게 되었다는 것이다.
센케 - 토쿠라 콤비는 면색(面色: 평면적이고 깊이가 없는 색) - 투명색 콤비였지만, 아기 - 우자키 콤비는 투명색 - 면색 콤비였다. 관념(?念)을 허공(?空)에서 노래하고 있던 모모에는, 감각(感?)을 지상(地上)에서 노래하는 세계와 만났다고 생각했다.
<추상으로서의 남자>를 상대로 자기 방치라는 관념을 다 배운 모모에는, <남자라는 구상(具像)>을 상대로 자기 개시(自己開示)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여름날의 경험」으로부터 2년째를 맞이한 열일곱살 봄... 모모에에게 「?須賀スト?リ?(요코스카 스토리)」라는 타이틀의 곡이 당도했다.

아기 씨의 단어는 녹아들어갔다.
나의 피나 육체 구석 구석으로 살며시 녹아들었다.
때문에 아기 씨의 가사는 나의 말이 되었다.
그리고, 되살아나는 추억처럼 가사가 움직이며 영상이 되어 보였다.
(『プレイバック PARTⅢ』의 해설문)

일곱살 때부터 열네살 때까지를 보냈던 요코스카가 노래의 무대가 된다는 것을 모모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랑을 하는 여자의 무대로서 되살아난 것이다.

「?須賀スト?リ?」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町の?りが映し出す
(거리의 등불이 비춰주는)
あなたの中の見知らぬ人
(그대 안의 낯선 사람)
私は少し?れながら
(나는 조금 뒤쳐져 가면서)
あなたの後?いていました
(그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어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急な坂道?け上ったら
(급경사 길을 올라가면)
今も海が見えるでしょうか
(지금도 바다가 보이겠죠?)
ここは?須賀
(이곳은 요코스카)

話しかけても?づかずに
(말을 걸어봐도 모르는 채)
小さなあくび重ねる人
(작게 하품만 하는 사람)
私は熱いミルクティ?で
(나는 따뜻한 밀크티로)
胸まで灼けてしまったようです
(가슴 속까지 다 타버린 것 같아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あなたの心?切ったなら
(그대의 마음을 가로지른다면)
汐の香りまだするでしょうか
(바다 내음이 아직 날까요?)
ここは?須賀
(이곳은 요코스카)

一?にいても心だけ
(함께 있어도 마음만은)
ひとり勝手に旅立つ人
(홀로 어디론가 가있는 사람)
私はいつも置いてきぼり
(나는 언제나 따돌려 놓고서)
あなたに今日は聞きたいのです
(오늘은 그대에게 묻고 싶어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これっきりこれっきり、もうこれっきりですか
(여기까지... 이제 여기까지인가요?)

そう言いながら今日も私は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도 나는)
波のように抱かれるのでしょう
(파도처럼 안기겠죠)
ここは?須賀
(이곳은 요코스카)


「나 자신의 노래라는 것과 처음으로 만났다고 실감했다」(『プレイバック PARTⅢ』의 해설문)
며, 모모에는 술회하고 있다.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 제 2기의 시작이다. 히트 챠트 1위에 빛나는 이 곡은, 그녀의 곡들 중에서 당시까지 최고 판매량이었던 66만장을 팔아치웠다.
아기 요코에 의하면, 「토쿄(東京)와 비교하면 네온의 색 수가 단연코 많은」 요코스카의... 눈이 따가울 정도의 형형색색 빛은, 광원(光源)이 있는 부분이 적고, 다른 부분이 어둠 때문인 듯 하다.
모모에는, 어두컴컴한 요코스카에서 광원이 있는 요코스카에서 어른 여자로서 -사랑하는 소녀가 아니라 연애를 하고 있는 여자로서- 나타난 것이다.
「요코스카 스토리」에도 역시, 나와 그대 이외에 또 다른 한 사람의 타인 -「그대 안의 낯선 사람」- 이 등장한다.
나 - 그대 관계가 점과 점을 잇는 선이라 친다면, 또 한명의 보이지 않는 타인이 출현한 탓에, 이 스토리는 세 점을 잇는 평면 위에서 전개된다. 「그대 안의 낯선 사람」은 여기서는 두가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① 그대 = 낯선 사람
② 그대의 마음을 사로 잡은 낯선 사람

①의 경우는, 그 사람은 남자다. 지금까지는 내가 말을 걸어주면 기뻐하며 들어주던, 나에게 있어서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던 그대가, 이미 내게 있어서 타인처럼 행동한다. 나와 그대 사이에 있었던 친밀감은 사라졌고, 그대는 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있다.
②의 경우는, 나의 이야기에 하품을 할 정도로 따분해 하면서, 그럼에도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려 하는 그대가 왜 나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버렸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나는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그대는 누군가 다른 사람(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는 뜻이 된다.
①의 「낯선 사람」은, 내가 그대에게서 엿본 감정의 본질을 가르키는데, 이런 그대의 이중성은 「푸른 성(?い性)」 노선의 <얼굴 없는 남자>에게서는 한번도 보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A)는 그대(B)가 좋다, 하지만 그대(B)는 내(A)가 싫다 - 나에게 사랑받는 그대(B)와 나를 사랑하려 들지 않는 그대(B') 둘 다 한명의 인간이다.
「어느 여름날의 경험」에서, 여자아이의 신앙과도 비슷한 마음에 의해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 <얼굴 없는 남자>는, 2년만에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원래 있었던 면면이었을지도 모른다. 2년전의 소녀에게는, 그의 「낯선 사람」성(性)이 보이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2년동안에, 소녀는 <추상으로서의 남자>의 디테일을 관찰하는 것을 배웠고, <남자라는 구상> -작게 하품하는 것, 마음만 다른 곳에 가있는 것- 을 통해, 소녀를 향해 욕망을 환기시키지 않는 남자의 본질을 발견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소녀에게 있어서의 지옥이다. 허나, 물론 단순한 실연(失?)이다.
일찍이 소녀가 「자신이 욕망의 대상이라 여겨지는대로 따라가, 그 정도에 따라」 품는 욕망 = 소중한 사랑은, 그 근거를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소녀가 대상이라 여겨져야할 남자의 욕망은 부재중이며, 현재 소녀의 욕망은 허공에 매달려 있다.
②에서는, <그대>의 욕망이 왜 <나>에게 향하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다. <그대>는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았기고 있다.
A-B의 정서(sentiment) 관계는 정(正 = 플러스)지만, B-X(= 낯선 여자)의 정서 관계도 정(正)이다. A-X는 애당초 서로 본적도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부(負 = 마이너스) 관계이다.
3대(?)의 관계 전체는 (+) (+) (-)라는 조합이기 때문에, 당연히 불균형이 된다. 단순한 삼각 관계이다.
이럴 경우, <그대>의 욕망은 부재중인 게 아니라 대상을 바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에게 있어서는 욕망은 부재중이기 때문에, 지옥임에는 다름 없다. 하지만, 욕망하는 남자의 이미지는 손상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에 대해 소녀는 단순한 태도를 취할 수가 있다. 즉, 구체적인 누군가를 라이벌이라 상정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화를 내는 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 안에서는, 소녀는 제삼자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는지도 모를 「바다 내음」 -욕망하는 남자의 주체- 을 매우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없다.
어째서 <나>는 사랑해주지 않는건지, 옛날에는 그렇게 사랑해주지 않았나요? 그동안에 남자는 뭐라 답했을까?
「이제 너에게 질려버렸어」
「지금까지 너를 충분히 즐겁게 해줬잖아?」
「미안하지만 잊어줘」
뭐라 답했던간에, <나>를 납득시켜줄 답은 되지 못한다. 사랑의 시작을 설명하기 어렵듯이, 사랑의 끝 역시 이해를 넘어선다. 그것이 사랑의 잔혹함이다.
하지만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이 당초부터 욕망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그의 입장에서 보면 욕망의 소멸은 지극히 합리적인 결과이다. 2년동안에 욕망은 모조리 소비된 것이다. 남자 역시 「자신이 욕망의 대상이라 여겨지는대로 따라가, 그 정도에 따라」 욕망을 품은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서 존재의 전체였던 욕망 -이것을 통상적으로 사랑이라 부른다- 은, 남자에게 있어서는 존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전체는 소비되지 않지만, 부분은 여분(spare)을 교환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소비할 수 있다.
남자의 욕망( = 사랑의 실질)과 여자의 욕망( = 사랑의 공식)의... 이것이 불행한... 하지만 흔한 결말이다. 사랑의 잔혹함이란 그런 것이다.
여자는, 신앙과도 비슷한 사랑의 환영(幻影)을 깨달아야한다. 남자에게 있어서는 알기 쉬운 사랑의 끝을 자신에게 보이지 않고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있는 사랑 그 자체의 부조리를 깨달아야한다.
하지만, 모모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의 <부조리>를 노래하지 않고, 그저 사랑의 <안타까움>을 노래했다. 그것이 아기 요코의 세계가 가진 한계이다.
모모에는 한계 안에 머물렀던 것이다. 허공에 매달아 놓은 자신의 욕망에 「파도처럼」 몸을 맡겨,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울게한 것이다. 소녀의 환영으로 시작된 사랑은, 다시 그녀만의 환영 속에 수습해버리고 끝낸 것이다.
모모에의 사랑은, 시종일관 마조히즘(masochism)과 감상주의(sentimentalism)와 이기주의(egoism)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의 연애의 토양이다. 요코스카는, 일본 속의 <근대(近代)>가 아니다. 그것은, 일본적 사고방식을 은폐하는 단순한 원료(material)로서 사용된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모에는 「지옥을 봐버린 여자야말로 성숙한 여자의 성(性 = SAGA)을 지녔다」라고 하는 몹쓸 언설(言?)을 순순히 믿어버린 것으로 인해, 자신 안에 성숙한 연애를 하는 여자를 보게 된다.
그녀의 대항동일성(?抗同一性)은, 여기서도 역시 불행을 통해서 밖에 높은 긴장상태(cathexis level)를 얻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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