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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22016.12.01 AM 11:32
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사나다(真田) 가문의 계보 주장
~ 에도시대(江戸時代)에 들어서면서 사나다(真田) 가문은 자신들의 선조에 대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사나다 가문은 세이와 텐노(清和天皇)의 손자가 운노 코타로(海野小太郎)라는 이름을 쓰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지(氏)」는 시게노(滋野) 씨로, 그 적류(嫡流) 가문에 해당한다.
그리고,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운노(海野) 씨의 당주인 무네츠나(棟綱)의 적손인 유키타카(幸隆)가 사나다 고(真田郷: 우에다 시 사나다 쵸)에 거주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사나다를 칭했다 한다.
에도바쿠후(江戸幕府)가 칸에이(寛永) 18~20년(1641~43)에 편찬케 한 『칸에이쇼카케이즈덴(寛永諸家系図伝)』의 사나다 씨 항목은, 사나다 가문이 제출한 계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있다.
거기에 따르면, 세이와 텐노의 아들인 사다히데 친왕(貞秀親王)이 시게노 씨의 시작이며, 그의 아들인 유키츠네(幸恒)가 운노 코타로를 칭했다. 그리고, 운노 유키츠네의 적자인 유키아키라(幸明)가 운노 씨의 가독(家督)을 계승하고, 차남인 나오이에(直家)가 네즈(禰津) 씨의 선조, 셋째 아들인 시게토시(重俊)가 모치즈키(望月) 씨의 선조가 되었다고 나와 있다. 이른바 「시게노산케(滋野三家)」가 바로 이것이다.
사나다 씨는, 운노 씨 적류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며, 마사유키(昌幸)의 아버지인 유키타카(후술하는데, 정확하게는 「유키츠나」지만, 이하 계보 상의 기재를 설명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유키타카라 기록한다)를 운노 무네츠나의 손자이자 유키요시(幸義)의 자식이라 하고 있다. 거기다, 유키타카가 사나다노쇼(真田荘)에 거주했기 때문에 운노에서 사나다로 성(姓)을 고쳤다고 나와있다.
그후, 쿄호(享保) 21년(1736)에 죽은 사나다 유키아키라(真田幸詮)까지의 기재가 나와있는 계보에서는, 세이와 텐노의 아들은 사다모토 친왕(貞元親王)이라 되어 있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유키타카에 대해서는 운노 무네츠나의 아들이며 운노 유키요시의 동생이라 나와있다. 세이와 텐노의 아들이 사다히데 친왕인지 사다모토 친왕인지에 대해서는 표기에 있어서 실수라 생각하지만 모르는 부분은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어쨌든, 운노 무네츠나의 자손이 다른 가문을 일으켜 사나다 성을 썼다는 게 사나다 가문의 공식 견해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읽어낼 수 있는 유서주장(由緒主張)은, 사나다 씨는 다른 가문을 일으켰지만, 시게노 일족의 소료케(惣領家: 본가)인 운노 씨를 직접 따르는 가계이다... 라는 것이리라. 요컨데, 운노 씨 소료케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일찍이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는 겐로쿠(元禄) 15년(1702)에 저술한 『藩翰譜(한칸후)』에서 세이와 텐노의 아들 중에 사다히데 친왕이라는 인물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그 이전에 운노 씨가 존재했음을 지적했다. 애당초 세이와 텐노의 자손임에도 세이와 겐지(清和源氏)를 칭하지 않았다는 게 기묘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받았기 때문이었을까? 분카(文化) 9년(1812)에 완성된 『칸세이쵸슈쇼카후(寛政重修諸家譜)』 편찬 때에는, 사나다 가문은 다른 계보를 진상했다. 하지만 여기서 에도 바쿠후는 시게노 씨는 일찍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며 사나다 씨의 주장을 물리쳤다. 세이와 텐노의 자손이라는 설은 일단 따르기로 했지만, 사다히데 친왕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으며, 또, 친왕의 아들이 코타로라 칭했다는 것도 「수상(不審)」하다 기록되어 있어, 운노 유키츠네부터 계보를 기록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즉, 사나다 씨의 유서주장에는 에도바쿠후가 의문을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무리한 유서주장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사나다 가문은 시게노 일족의 소료케를 칭했을 뿐만 아니라, 세이와 텐노로 계보를 이으려 하고 있었으니까...
이렇듯, 근세 사나다 씨는 자신들의 가문의 유서를 꾸미는 데에 필사적이었다. 바꿔 말하면, 누가 선조인지 알 수 없는 가문이었다. 사나다 일족이 명확한 형태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센고쿠시대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무엇보다, 센고쿠 다이묘, 근세 다이묘들 치고는 그리 진귀한 케이스가 아니기 때문에, 사나다 씨만 책망해서는 공평성에 어긋난 짓이리라.
◇ 시게노(滋野) 씨의 발상(発祥)
~ 시게노(滋野) 씨의 기원은 나라시대(奈良時代)에 다이가쿠노카미(大学頭) 겸 하카세(博士)였던 나라하라노아즈마히토(楢原東人)에 있다. 『続日本後紀(쇼쿠니혼코키)』에 따르면, 아즈마히토는 텐표쇼호(天平勝宝) 원년(749), 스루가노카미(駿河守) 재임기 때에 산출한 황금을 헌상하여 「근면성실하도다(원문은 勤しき哉)」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 소리를 따서 이소시오미(伊蘇志臣)라는 카바네(姓)를 하사받았다. 그후, 아즈마히토 - 후나시로(船白) - 이에오사(家訳)로 이어진다.
이 이에오사가 엔랴쿠(延暦) 17년(798)에 이소시오미를 고쳐 시게노노스쿠네(滋野宿禰)를 하사받았고, 코닌(弘仁) 연간(810~24)에 스쿠네를 고쳐 아손(朝臣)을 쓰게 되었다 한다. 이에오사의 자식으로 사다누시(貞主)와 사다오(貞雄)가 있었는데, 특히나 사다누시는 학자나 정치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사다누시의 딸인 츠나코(縄子)는 닌묘 텐노(仁明天皇)의 비(妃)가 되어 모토야스 친왕(本康親王)을 낳았으며, 오쿠코(奥子)는 몬토쿠 텐노(文徳天皇)의 비가 되어 코레히코 친왕(惟彦親王)을 낳았다.
코레히코 친왕은 세이와 텐노(清和天皇)의 형에 해당한다. 따라서, 시게노 씨라는 가문은 세이와 텐노에게서 나온 씨족이 아니다. 세이와 겐지(清和源氏)인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頼朝)가 바쿠후(幕府)를 열었기 때문에 만들어낸 이야기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덧붙여 사다오의 딸 미네코(岑子)도 몬토쿠 텐노의 비가 되어 두 황자와 두 황녀를 낳았다. 시게노노아손 사다누시는 닌쥬(仁寿) 2년(852)에 예순여덟살의 나이로 죽었다.
즉, 시게노 씨는 나라시대 말기부터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초기에 걸쳐 형성된 씨족이다. 다만, 그 입장은 어디까지나 나라조와 헤이안조의 귀족이었으며, 이 단계에서는 아직 시나노(信濃)와의 관계는 엿보이지 않는다.
- 공허의 윤미래♡
- 2016/12/01 AM 11:5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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