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32016.12.01 PM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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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시게노(滋野) 씨와 시나노(信濃)

~ 하지만, 죠간(貞観) 10년(868), 시게노 아손 츠네카게(滋野朝臣恒蔭)는 시나노노스케(信濃介)로 임관하여 10년동안 재임한다. 이어서 죠간 12년부터 4년동안 시게노 아손 요시네(滋野朝臣善根)가 시나노노카미(信濃守)가 되었다. 여기서 시게노 씨와 시나노의 연결고리가 발견된다.

 요시네는 사다누시(貞主)의 차남, 요시카게는 사다누시의 적손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덧붙여, 시게노 일족의 계보에서는, 시게노 씨의 초대로는 「요시부치오(善淵王)」라는 인물이 위치해 있다. 이것이 시게노노요시네라는 발음이 와전되었다는 이해가 주류이다. 

 문제는 이 중앙귀족인 시게노 씨가 어떻게 해서 시나노에 「뿌리를 내렸나」이다. 자식을 시나노로 입부(入部)시켰다고 보는 게 가장 쉽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여겨진다.

 유력한 생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게, 운노(海野), 네즈(禰津), 모치츠키(望月) 씨는 원래 시나노의 토착 호족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라는 것이다. 시나노노카미, 시나노스케를 역임한 시게노 씨는, 고대 호족 운노 삼씨(海野三氏)에게 있어서 가장 가까운 중앙 귀족이었다. 그래서 시게노 씨와 인척관계를 맺는 것으로 인해 「시게노 씨」를 칭한 게 아니었을까?

 근년의 연구에서는, 중세 무사단은 그 성립 과정에서 임국(任国)으로 부임해 온 중앙 귀족에게 딸과 관계를 맺게 해,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가독(家督)을 물려줌으로 해서 조정과의 관계를 다짐과 동시에, 지역 사회에서의 우위에 섰다고 지적받고 있다. 그럴 때에는, 「우지(氏)」(겐페이토키츠로 대표되며, 시게노도 그 중 하나다)를 부계(귀족)으로 고쳤다고 한다. 

 시게노 씨에 대해서도, 요시네의 계보를 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시게노 아손 요시코토(滋野朝臣善言)가 칸코(寛弘) 6년(1009)에 시나노로부터의 공마(貢馬) 처치를 담당하고 있어, 메료(馬寮)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시나노코쿠시(信濃国司)를 역임한 시게노 씨는 시나노의 목축과 깊은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대표적인 목장 중 하나로, 모치즈키마키(望月牧)가 있으며, 그것을 관리하던 모치즈키, 네츠 및 운노 씨와 인척 관계를 맺어 현지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했다.

 한편, 시게노산케(滋野三家) 측은 중앙의 귀종(貴種)인 시게노 씨의 자손이라 칭하는 것에 의해 히가시시나노(東信濃)에 지반(地盤)을 쌓았다고 보는 게 훨씬 무리가 없다.

 즉, 시나노의 고대 호족 「시게노산케」는, 중앙귀족 시게노 씨와 연결되는 것으로 인해, 지역 사회에서의 지위를 확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 운노(海野) 씨의 발흥(勃興)

~ 사료상에 시게노 소료케(滋野惣領家)가 되는 운노(海野) 씨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정기(院政期) 말기이다.

 처음 발견되는 것은 『保元物語(호겐모노가타리)』로, 「宇野太郎(우노 타로)」라 나와있다. 이것이 호겐의 난(保元の乱: 호겐 원년. 1156)에서 미나모토노요시토모(源義朝)의 아군이었다고 하는 운노 코타로 유키치카(海野小太郎幸親)였을 것이다(『信州滋野氏三家系図』).

 지쇼(治承), 쥬에이(寿永)의 내란(이른바 겐페이 전쟁)에서는,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 군에 속해 있었다. 이것은 키소 요시나카가 시나노(信濃)를 기반으로 하여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리라. 유키치카의 적자인 유키히로(幸広)는 빗츄 미즈시마 전투(備中水島合戦)에 타이쇼(大将)로서 출진하여 전사했다. 

 그런 유키히로의 동생이라 여겨지는 인물이 유키우지(幸氏)이다. 키소 요시나카의 적자인 요시타카(義高)가 인질로서 카마쿠라(鎌倉)로 떠났을 때에 함께했다. 요시타카와 유키우지는 같은 나이였다고 한다. 겐랴쿠(元暦) 원년(1184) 4월 21일, 요리토모는 요시나카와의 관계 결렬을 계기로 인질인 요시타카를 처형하기로 결단한다. 이를 알아 챈 키소 측은 요시타카를 도주시키려 했지만 실패,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吾妻鏡』). 이때, 유키우지는 요시타카로 변장하여 요시타카가 달아날 수 있게 시간벌이를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반대로 요리토모의 눈에 띄었다. 요리토모는 유키우지의 충절을 칭찬하며 본령(本領)을 안도해 고케닌(御家人: 카마쿠라 바쿠후의 지키신) 대열에 서게 되었다 한다. 확실히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의 정사인 『吾妻鏡(아즈마카가미)』에는, 분지(文治) 5년(1189) 정월의 와카기미(若君: 요리이에)가 처음 활을 잡았을 때 사수를 맡았던 것을 시작으로, 유키우지에 대한 기술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특히 궁술이 뛰어났던 듯 한데, 카테이(嘉禎) 3년(1237) 7월 19일에는, 「幕下将軍御代、八人射手之内歟」라며 싯켄(執権) 호죠 야스토키(北条泰時)로부터 칭찬받았으며, 손자인 토키요리(時頼)의 지도를 요청받고 있다(『吾妻鏡』).

 켄포(建保) 4년(1216) 10월 5일, 운노 유키우지가 코즈케(上野) 미하라노쇼(三原荘: 아가츠마 군 서부에 위치한 장원)의 범위에 대해 삼대째 쇼군(将軍) 미나모토노사네토모(源実朝)에게 진상하고 있어, 고케닌이 된 이래, 코즈케 아가츠마 군(吾妻郡)에서 세력을 늘리고 있었던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닌지(仁治) 2년(1241) 3월 25일에는, 미하라노쇼를 둘러싸고 타케다 노부미츠(武田信光)와 싸워 승소했다(『吾妻鏡』). 이것을 통해 보자면,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명확화한 시게노 일족의 아가츠마 군에 대한 전개는, 카마쿠라시대 초기에 만들어져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나다(真田) 씨는 언제 운노 씨로부터 갈라져 나왔을까?

 근세 사나다 씨가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가문을 운노 씨의 직계로 자리잡으려 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타카(真田幸隆)의 동생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의 보다이지(菩提寺) 료센지(良泉寺)에 남겨진 계보에 따르면, 요리츠나는 사나다 우마노스케 요리마사(真田右馬佐頼昌)의 셋째 아들이라 한다. 이 요리마사가 바로 유키타카의 부친이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요리마사에 대해서는 「従昔真田氏」라 기록되어 있다. 굳이 자신의 가문을 깎아내리는 유서주장(由緒主張)을 할리가 없기 때문에, 이 일족은 이 이전부터 사나다 씨를 칭하고 있었다 보는 쪽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즉, 사나다 가문은 센고쿠시대에 운노 가문에서 분리된 게 아니며, 하물며 직계 자손도 아니다.

 그래서 주목해 본 게 『信州滋野氏三家系図(신슈시게노시산케케이즈)』로, 운노 유키우지의 손자 중에 「幸春 真田七郎(유키하루 사나다 시치로)」라는 기술이 있다. 이 인물이야말로 사나다 씨의 선조가 아닐까? 부친인 나가우지(長氏), 큰형인 시게우지(茂氏)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 의한 뒷받침은 부족하지만, 바로 위에 형인 스케우지(助氏)는 『아즈마카가미』에서 기술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이 시기의 같은 계보의 내용은 신뢰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즉, 사나다 가문은 카마쿠라시대 초기에 운노 씨로부터 나온 서류(序流)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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