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62016.12.03 AM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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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 ~사나다 가문을 재흥시킨 지장~

 

◇ 운노타이라 전투(海野平の合戦)

~ 여기까지 말해온대로, 16세기 초두의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는 사나다 고(真田郷)를 본거지로 하는 소규모 세력이며,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를 따르는 존재였다. 구체적으로는 「쿠니슈(国衆)」라 불리우는 영주였다. 

 쿠니슈에 대해서는 「머릿말」에도 간단하게 서술했지만, 옛날에는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와 마찬가지로 코쿠진 영주(国人領主)라 불리우는 존재였다.

 무로마치시대까지는 영지가 각지에 산재해 있었지만,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들어선 단계에서 본령(本領)을 중심으로 한 일원지배(一円支配)를 행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변 소영주를 가신화하였으며, 거대한 가문은 군(郡) 규모의 영역 권력으로 성장한다. 여기서 무로마치시대의 코쿠진 영주와의 차이가 지적가능하다. 쿠니슈는 권력은 질(質)에 있어서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와 거의 같았다. 하지만, 단독으로는 강대한 센고쿠 영주(일국 규모의 영역 권력)의 군사력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근의 센고쿠 다이묘에게 종속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다이묘와의 관계는 일반적인 가신들과 달리, 군사력을 제공하는 대신에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쌍무적(双務的) 계약 관계에 있었다. 다이묘 아래에서는 군역 등 일부의 역부과(役賦課)에 응하는 의무를 제외하면 자치 지배권을 보장받았으며, 차츰 종속된 다이묘를 따르는 형태로 문서행정을 행하게 된다. 

 앞에서 서술한대로, 센고쿠시대 초기의 사나다 씨는 시게노(滋野) 일족의 소료케(惣領家)인 운노 무네츠나를 따르는 쿠니슈였다. 시나노(信濃)는 슈고(守護)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씨와 시나노 북부의 무라카미(村上) 씨가 세력을 늘리긴 했지만, 일국을 통일한 센고쿠 다이묘급 권력은 얻지 못했다. 이 때문에, 특히나 사쿠(佐久)와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은 아직 독립을 유지한 쿠니슈가 할거하는 상황이었다.

 유키츠나가 따랐던 운노 무네츠나도 센고쿠 다이묘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치이사가타 군 안에서는 유력한 쿠니슈가 있었지만, 치이사가타 군을 통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보다 큰 세력의 군사개입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텐분(天文) 10년(1541) 5월 13일, 카이(甲斐)의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와 시나노의 스와 요리시게(諏方頼重: 중세에는 「諏訪」를 「諏方」로 쓰는 게 일반적이었다),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가 연합하여 운노령(領)을 공격했다. 운노령은 세 방향에서 포위당해 공격을 받았다. 운노 무네츠나는 오노야마 성(尾野山城: 우에다 시)에서 농성했지만, 즉시 함락당하고만다.

 익일, 운노타이라(海野平)와 네즈(禰津)도 공략당했다. 불행하게도 근년에 드물게 보이는 폭우가 쏟아져 이렇다할 싸움도 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5월 25일에 다시 운노타이라에서 결전을 노렸기 때문에, 운노 세력은 분위기를 바꿔보리라 도모했지만, 사실상의 센고쿠 다이묘 연합군이 상대였다. 중과부적으로 대패, 무네츠나의 적자인 유키요시(幸義)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여겨진다. 다만, 타케다 노부토라, 하루노부(晴信: 후의 신겐) 부자의 귀진은 6월 4일이기 때문에, 운노 쪽의 저항은 당분간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소료인 운노 무네츠나는 칸토 칸레이(関東管領: 카마쿠라 쿠보의 보좌역)이자 히라이 성(平井城: 군마 현 후지오카 시)을 거성으로 삼고 있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 가문의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를 의지해 코즈케(上野)로 달아났다. 유키츠나도 코즈케로 망명했지만, 무네츠나와는 거취가 나뉘어져 우에스기 씨의 중신이자 미노와 성(箕輪城: 군마 현 타카사키 시)의 성주인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를 의지했다 한다(『滋野世紀』 『真武内伝』/ 양쪽 모두 사나다 가문의 역사를 기록한 군기물). 한편, 동생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와 시게노 일족인 네즈 모토나오(禰津元直)는 스와 요리시게에게 항복한다. 야자와, 네즈 두 씨족의 이 이후의 활약은 확정하기 어렵지만, 스와 타이샤(諏訪大社)의 신관(神官)이 기록한 고기록 『神使御頭之日記(신시오토노닛키)』에 「こなたより召し帰され」라 나와있기 때문에, 요리시게로부터 영지 복귀를 허락받았을 것이다. 그후,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치이사가타 군에서 사쿠 군 북부 일대는 무라카미 가문의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렇듯, 운노 무네츠나, 사나다 유키츠나, 야자와 요리츠나 세 사람은, 각각 다른 길을 선택했다. 

 어째서 무네츠나, 유키츠나는 코즈케로 달아났던걸까? 그것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시나노 동부(치이사가타, 사쿠 양 군)는 코즈케를 포함한 칸토와 관계가 깊었던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옛날에는 시나노에서 거병한 키소 요시나카(木曽義仲)가 코즈케 타고노쇼(多胡荘: 군마 현 후지오카 시 일대)에서 군세를 모았다. 에이쿄의 난(永享の乱: 1438~39)에서 패사한 카마쿠라 쿠보(鎌倉公方) 아시카가 모치우지(足利持氏)의 남겨진 아들인 만쥬오마루(万寿王丸)는 시나노 사쿠 군의 유력 코쿠진 오오이(大井) 씨에게 은밀히 보호받았다 전해진다.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에게 있어서 시나노는 바쿠후가 직접 슈고를 두고 관할하는 나라였는데(무로마치도노 고분고쿠), 카마쿠라 쿠보가 관할하는 카이, 코즈케(무로마치도노 고분고쿠)와도 인접해 있었다. 카마쿠라 쿠보는 무로마치 바쿠후 쇼군(将軍)에 의해 임명되는 칸토의 지배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쇼군의 자리를 노려 자주 바쿠후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그 경계선상에 위치하는 시나노는 바쿠후, 카마쿠라 쌍방으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져 쌍방 모두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었다.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 경위도 있는 망명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타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추방과 야마우치 우에스기(山内上杉) 씨의 시나노(信濃) 출병

~ 당연한 일이겠지만, 코즈케(上野) 망명 이후의 운노 무네츠나(海野棟綱),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는 옛 영지 회복에 대한 바람을 계속해서 갖고있었다. 특히 운노 무네츠나는 야마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山内上杉憲政)에게 모든 것을 걸고있었고, 그 기대는 컸을 것이다. 그 호기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6월 4일에 카이(甲斐)로 막 복귀한 타케다(武田) 가문에서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텐분(天文) 10년(1541) 6월 17일, 타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 신겐)가 쿠데타를 일으켜 부친인 노부토라(信虎)를 스루가(駿河)로 추방해버리고 실력으로 가독(家督)을 이었다.

 이 이유로 노부토라의 다양한 악정과 폭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에도시대(江戸時代)의 군기물(軍記物)에 의한 창작이지 사실이 아니다. 어쩌면 문제점은 두가지로 집약된다.

 먼저, 노부토라의 외교방침이다. 노부토라의 외교는 이정면 작전(二正面作戦)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으로, 가령 한 다이묘(大名)와 화친을 맺어도, 다른 다이묘와 개전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면서 획득한 국외의 영토는 텐분 9년(1540)에 사쿠 군(佐久郡)에 영국을 확대한 것을 시작으로, 국내 세력에게 배풀어 주는 게 적었다.

 또 하나는, 대기근의 도래였다. 텐분 9년, 카이는 폭풍우가 잦아 그 영향 때문인지 텐분 10년 봄은 100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규모의 아사자를 낳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국외 출병을 멈추지 않았던 노부토라의 행동에, 타케다 가신들에게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는 마음도 싹텄을 것이다.

 쿠데타 수단은 6월 14일에 데릴사위인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방문하기 위해 카이를 떠나있던 노부토라의 귀로를 아시가루(足軽)들을 이용해 봉쇄하는 것이었다. 타케다 하루노부의 오른팔이 된 코마이 코하쿠사이(駒井高白斎: 분국법인 「코슈핫토노시다이」의 기초자)조차 몰랐던... 은밀한 작전의 승리였다. 

 한편, 이것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에게 있어서는 생각지 못한 호기로 비춰졌다. 실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타케다 가문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우에스기 가문을 의지하려한 무네츠나, 유키츠나의 행동은 그야말로 적절치 못했다. 물론, 평화 뒤의 교섭을 바탕으로 복귀한다는 수단을 취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노리마사는, 타케다 씨는 아직 정변의 여파로 몸을 쉬이 움직이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듯 하다. 타케다 가문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시나노(信濃)로 침공해도 동맹관계에 지장은 없다... 그렇게 판단했으리라 생각된다. 노리마사는 7월에 삼천여 군세를 시나노 사쿠, 치이사가타(小県)로 파견했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 밖의 사태가 일어났다. 스와 요리시게(諏方頼重)가 타케다, 무라카미(村上) 두 가문에 상담하지 않고 단독으로 대응해, 4월에는 치이사가타 군 나가쿠보(長窪: 나가노 현 나가와 쵸)에 포진한 것이다. 

 이래서는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만약 고전하다 재진이 길어지게 된다면, 타케다, 무라카미 세력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에스기 세력은 즉시 나가쿠보 공격을 단념하고, 사쿠 군 아시다 고(蘆田郷: 나가노 현 타테시나 쵸)를 어지럽힌 것만으로 화친을 맺고 물러나버렸다. 요리시게는 여기에 눈을 돌렸다. 반대로 황폐화한 아시다 고를 제압하여, 아시다의 요다(依田) 씨를 항복시켰다. 요리시게의 귀진은 17일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에스기 세력은 겨우 열흘정도동안 재진했을 뿐이었으리라. 여기서 무네츠나의 바람은 짓밟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스와 요리시게도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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