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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092016.12.04 PM 03:05
2장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 ~나가시노 전투에서 사라져간 비극의 장수~
◇ 정실 「오키타(於北)」와 노부츠나(信綱)의 가독(家督) 상속
~ 노부츠나(信綱)는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의 적자(嫡男)로서, 텐분(天文) 6년(1537)에 태어났다. 칸도나(官途名)는 겐타자에몬노죠(源太左衛門尉)였기 때문에 케묘(仮名)는 겐타로(源太郎)였을 것이다. 「信」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으로부터 받은 편휘(偏諱)이다.
정실(正室)는 「오키타사마(御北様)」라 불리운다. 「御北」라는 것은, 통상적으로 귀인의 정실인 키타노카타(北の方)를 의미하지만, 이 여성의 이름 자체가 「키타(北 = 於北)」였다고 한다.
문제는 오키타의 출신으로, 타케다 가문과 적대하고 있던 우에스기(上杉) 측 쿠니슈(国衆)인 타카나시 마사요리(高梨政頼)의 누이동생, 또는 딸이었다고 여겨진다(세대를 봤을 때 딸일 가능성이 높다). 일견 기묘한 이야기 중에, 사나다 씨를 배신케 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사나다 가문의 공식 역사서 『信綱寺殿御事蹟稿(신코지덴고지세키코)』는 기록한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츠나가 시나노(信濃) 북부의 쿠니슈 조략(調略)에 대비해 시나노 북부의 유력자와 인척관계를 구축해두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는 타카나시 마사요리 쪽도 마찬가지라, 타케다 가문의 시나노 북부 경략의 중심인물인 사나다 유키츠나의 적자에게 딸을 출가시켜놓는 것으로 인해, 관계 개선의 여지를 찾았던 게 아니었을까? 무라카미 요시키요(村上義清)의 몰락과 나가오 카게토라(長尾景虎: 우에스기 켄신)의 시나노 진출 개시(제 1차 카와나카지마 전투)가, 텐분 22년(1552)였다는 것도 고려해 보고 싶다. 이때, 노부츠나는 이미 열일곱살이 되어 있었다. 연령적으로 봐도 혼인은 이 이전이었을 것이다. 타카나시 씨는 오랜동안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적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나다 유키츠나와 인척관계를 맺을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
또, 쿠니슈의 적자의 혼인이기 때문에, 타케다 신겐의 승인을 바탕으로 치러졌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쿠니슈끼리의 거래는 이처럼 복잡했다.
덧붙여, 타카나시 마사요리의 딸(누이동생)로서 시집을 간 게 아니라, 일문(一門)인 이노우에 사에몬노죠(井上左衛門尉)의 양녀라는 대우로 출가한 것이라고도 여겨진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문의 접촉을 보다 간접적인 것으로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오키타는 텐쇼天正 8년(1580) 2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법명(法名)은 카오묘에이다이젠죠니(花翁妙永大禅定尼). 노부츠나와 사이에 요에몬(与右衛門)이라는 아들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딸이 하나 있었으며, 노부츠나가 죽은 뒤에 동생인 마사유키(昌幸)의 적자인 노부유키(信幸)에게 출가했다.
일반적으로 노부츠나의 가독 상속은 텐쇼 2년(1574)에 부친인 유키츠나가 죽었을 때라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이 익년의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했기 때문에 불과 1년짜리 단명한 당주로 이해되어버리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노부츠나는 에이로쿠(永禄) 10년(1567) 3월에 이미 가독을 상속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서가 되는 것이 문서의 전래이다. 이 이후, 유키츠나, 노부츠나 부자 앞으로 보내어진 문서는, 노부츠나의 바로 아래 동생인 사나다 마사테루(真田昌輝)의 자손 가문에서 전래되고 있으며, 노부츠나가 전사한 뒤, 가독을 이은 동생 마사유키의 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다, 부친인 유키츠나와의 연명(連名)이 아니라, 노부유키 한 사람 앞으로 보낸 문서로 이행되게 된다. 이것은, 이러한 문서가 일괄되게 보관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일련의 문서는, 아무리 수신인이 부친인 유키츠나와 연명되어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는 노부츠나 앞으로 보내도록 되어 갔다.
이 「가전문서(家伝文書)」를, 사나다 가문의 가독을 이은 마사유키는 이어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사나다 가문의 당주로서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가전문서가 마사테루의 가문에서 전해지게 되었던걸까? 그것은, 사나다 요에몬이라는 인물이 존재했다는 근세의 기록이 있으며(『見夢雑録』), 노부츠나의 자식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 요에몬과, 마사테루의 자식들은 모두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에치젠 한(越前藩)의 한시(藩士)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요에몬의 존재를 기록한 『見夢雑録(켄무자츠로쿠)』는, 요에몬의 자식으로서 마사테루의 자손을 계보에 실어놓고 있다. 어쩌면, 요에몬에게는 자손이 없어서 가전문서를 마사테루의 자손에게 양도한 것이었을까?
사정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에이로쿠(永禄) 10년 이후에도 유키츠나의 활약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어디까지나 유키츠나가 당주를 계속 맡고 있었다는 생각은 뿌리 깊다.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가독 양도는 「편안한 은거 생활」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가독을 양도하더라도 후견인을 맡는다거나, 개별적으로 활동을 계속하는 경우는 진귀하지 않았다. 사나다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유키츠나는 가독을 노부츠나에게 물려주긴 했지만, 그 이후에도 신겐, 카츠요리(勝頼)의 명령이 있으면 활동을 계속한 것이다.
하지만, 사나다 씨의 당주가 노부츠나라는 것은 틀림 없다. 이 때문에, 유키츠나가 이끌고 있던 군세와,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장(城将)이라는 지위는 노부츠나가 상속하게 되었다. 『甲陽軍鑑(코요군칸)』에 「甲州武田法性院信玄公御代惣人物数事」라는 타케다 씨의 가신단 구성을 기록한 개소(箇所)가 있다. 대체로, 신겐 사망 전후의 상황과 일치하고 있어, 참고자료로서의 이용가치는 있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거기에 기록된 것은 어디까지나 「真田源太左衛門尉(사나다 겐타자에몬노죠)」 였지 「一徳斎(잇토쿠사이)」가 아니다. 즉, 신겐 만년의 사나다 가문 당주는 노부츠나라는 것이 『코요군칸』의 견해이다.
「甲州武田法性院信玄公御代惣人物数事」는, 노부츠나의 입장에 대해 「信州先方衆(신슈 센보슈)」의 필두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마 200기를 통솔했다고 나와있다. 거기다, 동생인 마사테루의 50기는 노부츠나의 통솔하에 놓여있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250기를 통솔했다는 뜻이 된다. 이 숫자는 동시대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실제 군역량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비교하는 데에 있어서 기준 밖에 안 된다. 하지만 「신슈 센보슈」 제 2위인 쿠리타(栗田) 씨가 160기, 3위인 아시다 요다(蘆田依田) 씨, 시모죠(下条) 씨가 150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동원 병력은 다른 이들보다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센보슈」의 「센보(先方)」라는 것은 (과거) 적이었다는 의미로, 타케다 가문에서 토자마 쿠니슈(外様国衆)를 부를 때 사용되는 말이다.
노부츠나의 지행(知行)은 동생인 마사유키가 상속한 단계에서 1만5천관문이었다고 한다(마사테루의 몫도 포함 / 『真武内伝』). 이것은 시나노의 어떤 쿠니슈보다 많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같은 타케다 씨 밑에서 대두한 아시다 요다 씨의 지행은 1만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칸다카(貫高)라 하면 와닿지 않으실 분도 많으리라 생각하지만, 이는 돈의 단위이다. 물론, 변동도 크긴 하지만, 중세의 1관문은 대강 현재의 5만엔에서 20만엔에 상당한다고 한다. 반 딱 잘라서 10만엔이라 이해하면 알기 쉽다. 1문이 100엔이 되면 파악이 쉬우며, 보다 실상에 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약 15억엔이라는 수입을 얻을 수 있다고 평가된 영지라는 것이다. 이 안에서 노부츠나는 가신을 고용하고, 또, 타케다 씨로부터 부탁받는 다양한 역부담에 응할 수 있게 된다. 군역, 보수역을 시작으로 하는 역부과의 기준액이 이 1만5천관문이었다.
이렇듯 칸다카제(貫高制)라는 것은, 토지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은,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사용된 코쿠다카제(石高制)일 것이다. 코쿠다카제는 토지의 가치를 쌀로 평가하는 방법이다. 칸다카와 코쿠다카의 환산비율은 지역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비교하기 어렵지만, 사나다 가문의 본거지인 시나노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에서,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行)는 1관문 = 3석이라는 환산치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영지가 전부 치이사가타 군에 있다고 친다면, 코쿠다카로 바꿔보면 4만5천석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치이사가타 군에는 본령 안도를 받은 쿠니슈령(領)이 많았기 때문에, 타케다 신겐이 사나다 씨에게 상으로 줄 수 있었던 직할령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사나다 씨의 지행지는 유키츠나, 노부츠나가 공략하고 관할한 코즈케(上野) 아가츠마 군(吾妻郡)에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아가츠마 군은, 치이사가타 군과 비교해 산이 많았기 때문에, 코쿠다카로 환산할 때에는 다른 비율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테지만, 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4만5천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 내린 수치이자, 과대한 참고치라 생각해 줬으면 한다.
어쨌든 사나다 씨는 본령인 사나다 고(真田郷) 이외에 막대한 가증(加増)을 받고 있었음이 확실해지게 된다. 사나다 씨라는 자들은, 그야말로 타케다 씨에 의해 발탁된 쿠니슈였다.
◇ 아즈마야 산 신앙(四阿山信仰)과 사나다(真田) 씨
~ 시나노(信濃), 코즈케(上野) 국경에 우뚝 솟은 산들 중에 아즈마야 산(四阿山)이 있다. 아즈마야 산 그 자체가 「하쿠산곤겐(白山権現)」으로서 산악 신앙(山岳信仰)의 대상이 되어 있으며, 시나노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에서 코즈케 아가츠마 군(吾妻郡)까지 전개되어 있는 시게노(滋野) 일족의 숭경(崇敬)을 한 데에 모았던 듯 하다. 아즈마야 산의 정상에 오쿠인(奥院), 시나노, 코즈케 국경의 토리이 고개(鳥居峠)에 츄인(中院), 사나다 고(真田郷)에 사토미야 야마가 진쟈(里宮山家神社)가 놓여 있다. 사토미야라는 것은, 본전(本殿)이 산 위에 있어서 참배가 용이하지 않을 경우, 산 기슭에 마련된 진쟈를 가르킨다. 그것이 사나다(真田) 씨의 본거지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나다 씨도 아즈마야 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야마가 진쟈를 극진히 보호하고 있었다. 에이로쿠(永禄) 5년(1562) 6월 13일, 유키츠나(幸綱)는 야마가 진쟈의 궁전 수복을 행하고 있다. 그때, 보수한 문의 일부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유키츠나와 노부츠나(信綱)의 이름이 주서(朱書)되어 있다. 이것이 노부츠나의 이름이 처음으로 발견되는 사료이다.
이 수복을 맡았던 게 슈겐(修験)의 렌게도지인(蓮花童子院)이다. 렌게도지인은 아즈마야 산의 별당(別当)으로 임명되었으며, 텐쇼(天正) 2년(1574)에 노부츠나, 익 3년에 마사유키(昌幸)에 의해 별당직(別当職)을 안도받았다.
텐쇼 15년(1587)에는, 마사유키에 의해 조영령(造営領) 7관문이 기부된 것 이외에, 아즈마야 산에서의 목재 벌채가 금지되었다. 이것에 의해, 아즈마야 산이 야마가 진쟈의 관리하에 있었다는 것, 사나다 씨가 극진하게 보호를 더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겐나(元和) 5년(1619)에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가 행한 사령(寺領) 개정에서는, 야마가 진쟈 벳토지(別当寺: 신불습합의 시대였기 때문에, 진쟈와 사원이 동거하는 형태였다)인 하쿠산지(白山寺)령으로서 45관7백문, 롯쿠슈(六供衆)령 12관문, 하쿠산 네기(禰宜)령으로 2관2백문이 안도되었다. 합계 59관9백문이나 되서, 아즈마야 산에 대한 숭경이 얼마나 두터웠는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아즈마야 산 및 사토미야 야마가 진쟈에 대한 사나다 씨의 보호는, 신앙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 아즈마야 산은 본령인 사나다 고에 야마가 진쟈가 존재했던 것 만은 아니다. 사나다 씨의 관할령에 있는 성, 그리고 타케다(武田) 씨 멸망 후의 사나다 영국은, 시나노 치이사가타 군, 코즈케 아가츠마 군으로 전개되어 갔다. 아즈마야 산은 그야말로 결절점(結節点)에 존재하고 있다. 사나다 씨의 아즈마야 산 보호는, 자신이 두 군의 영주임을 정치적으로 어필함과 동시에, 아즈마야 산을 숭배하는 영민들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으리라 생각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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