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02016.12.05 PM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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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 ~나가시노 전투에서 사라져간 비극의 장수~

 

◇ 사나다(真田) 가문의 당주,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장(城将)으로서...

~ 에이로쿠(永禄) 11년(1568) 12월, 노부츠나(信綱)는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제 1차 스루가(駿河) 침공에 참진하고 있었다(『本藩名士小伝』).

 에이로쿠 12년 12월 6일, 유키츠나(幸綱)와 노부츠나는 신겐을 통해 서장을 보내어, 스루가 칸바라 성(蒲原城: 시즈오카 시 시미즈 구) 공략을 전했다.

 익 겐키(元亀) 원년(1570) 4월 14일, 신겐은 카이즈 성(海津城)의 성주대리인 카스가 토라츠나(春日虎綱)에게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에 대한 대응을 지시했을 때, 사나다 노부츠나가 있는 곳으로 빈번하게 히캬쿠(飛脚)를 파견하여 켄신이 철수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라 명령했다. 

 이때부터 사나다 가문의 가독(家督)이 노부츠나에게로 옮겨갔으며, 코즈케(上野)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거성은 이와비츠 성(岩櫃城)이라 봐야할 것이다. 

 겐키 3년, 분국(分国)에서 추방당한 무리들이 영내를 배회하고 있을 경우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이 시나노(信濃)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의 쿠니슈(国衆)에게 내려졌다. 구체적인 수신자는 네즈 죠안(禰津常安), 사나다 노부츠나, 운노슈(海野衆), 무로가 미츠마사(室賀満正), 우라노 겐이치로(浦野源一郎), 코이즈미 마사무네(小泉昌宗)이다.

 운노슈만이 「衆」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당주가 타케다 신겐의 차남이자 맹인이었던 류호(龍芳)였으며, 실질적인 정무는 가로(家老)인 오구사노 타카요시(小草野隆吉)를 중심으로 한 가신 담합에 맡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외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모두 이 시점에서의 당주였기에, 역시나 노부츠나는 사나다 가문의 당주로서 대우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텐쇼(天正) 원년(1573) 11월 22일에는, 사촌형제인 카와라 마타지로(河原又次郎)를 겐푸쿠(元服)시켜 츠나이에(綱家)라는 이름을 주었다.

 텐쇼 2년 윤 11월 11일, 아즈마야 벳토(四阿別当)를 이전과 마찬가지로 렌게도지인(蓮花童子院)에게 안도했다. 앞에서 말한대로, 아즈마야 산(四阿山)이야말로 사나다 씨의 신앙의 중심이었기에, 그 벳토직 안도는 그야말로 당주로서의 행동이라 할 수 있다. 

 텐쇼 2년의 부친 유키츠나가 죽기 직전에는 타카텐진 성(高天神城: 카케가와 시) 공략의 전황, 텐쇼 2년 9월에는 미카와(三河) 나가시노 성(長篠城: 신시로 시) 공격의 상황을 묻고 있어, 각각 카츠요리(勝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따라서, 노부츠나는 기본적으로는 이와비츠 성의 성장(城将)으로서, 아가츠마 군(吾妻郡)의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봐야할 것이다. 토카이도(東海道)를 전전하고 있던 신겐, 카츠요리의 군세에는 동생인 마사유키(昌幸), 마사하루(昌春)가 종군하고 있었다. 

 다만 유키츠나, 노부츠나 부자는, 아가츠마 군에서의 행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부자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은, 칸바라(鎌原), 유모토(湯本) 같은 아가츠마 군슈(郡衆)에 대한 군사 지휘권 뿐이었다. 또, 유키츠나가 고생해서 재복속시킨 오오도 우라노(大戸浦野) 씨는, 미노와 성(箕輪城)의 성주대리 겸 코즈케 서부의 군지(郡司)인 아사리(浅利), 나이토(内藤) 씨의 관할하에 놓여 있어, 아가츠마 군 일원의 지휘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재차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유키츠나, 노부츠나 부자가 센보슈(先方衆: 토자마 쿠니슈)였기 때문으로, 타케다 가문의 행정기구로 편입되지 않았던 결과이다. 그럼에도 군 규모의 거점 방어를 맡았던 것이 특필되어 있으며, 『甲陽軍鑑末書(코요군칸 맛쇼)』(『코요군칸』의 보유편)가 사나다 씨를 코즈케 서부 최대의 쿠니슈 오바타(小幡) 씨와 함께 「御譜代同前(후다이 가신과 동등)」라며 특별대우받고 있다는 기록대로의 처우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대한 가증(加増)을 받고, 사나다 고의 소쿠니슈(小国衆), 그것도 영지에서 쫓겨난 망명자 신분에서 「신슈 센보슈」필두로 성공했으리라 생각된다. 

 

 

 

◇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

~ 텐쇼(天正) 3년(1575) 5월, 토쿠가와(徳川) 가문의 내분을 틈타는 형태로,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는 미카와(三河) 나가시노 성(長篠城)으로 병력을 보냈다. 전년의 미노(美濃) 동부 공략의 승리로 타케다 영국(領国)의 판도가 최대 규모에 달해 있어, 카츠요리의 용명(勇名)은 그야말로 절정에 달해 있었다.

 나가시노 성을 시작으로 하는 오쿠미카와 일대는 한번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적이 있어, 이 땅을 탈환하여 신겐 만년의 군사행동을 재현해 보고자 했던 게 그 의도였다. 또, 토쿠가와령을 공격하는 것에 의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는 키나이(畿内)의 동맹 세력을 간접적으로 지원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여기에 대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서 처음으로 오다 가문과 타케다 가문의 본격적인 충돌이 치뤄지게 된다. 이 일전에 오랜만에 노부츠나(信綱), 마사테루(昌輝) 형제도 종군하게 되었다.

 오다, 토쿠가와 세력은 타케다 가문의 「우마노슈(馬之衆)」에 의한 「우마이리(馬入り: 기마돌격)」라는 전술을 경계하고 있었다. 토고쿠(東国)의 전투에서는 진귀하지 않은 전술이라 생각되지만, 사이고쿠(西国)와 가까운 오다, 토쿠가와 씨에게 있어서는 익숙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구축해 놓은 것이 이른바 마방책(馬防柵)이다. 인구에 회자되는 그 명칭에 반하여 야전축성이라 할 수 있는 규모였다는 설도 있지만, 여기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甲陽軍鑑(코요군칸)』은 3중으로 된 방책이었다고 묘사되어 있어, 현재 이 땅에 재현해 놓은 한겹짜리 방책 복원은 정확한 것이 아니었던 듯 하다.

 카츠요리는 여기서 판단 미스를 저질렀다. 카츠요리의 눈에는 마방책 안에서 모여있는 오다, 토쿠가와 세력이 약하게 보였던 듯 하다. 그런데다, 노부나가는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통솔하고 있던 군세를 숨기고 실제보다 적은 수로 보이게 했다(『信長公記』). 이것을 오인한 카츠요리는, 적은 이렇다 할 책략도 없이 수비만 하고 있다고 전투 전날에 보낸 서장에 기록해 놓고 있다.

 하지만, 실제 군세의 수는 오다, 토쿠가와 연합군이 타케다세를 능가하고 있었다. 수로 열세인 측이 어리석게 손을 써서는 안 되었다. 오다의 가신인 오오타 우시카즈(太田牛一)는 노부나가의 전기(伝記) 『信長公記(신쵸코키)』 안에서 「(카츠요리가) 토비노스야마(鳶ノ巣山)에 올라 진을 쳤더라면 (노부나가)는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을텐데」라고 술회하고 있다. 하지만 카츠요리는 신겐 이래의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전을 결의했다. 

 5월 21일 묘각(卯刻: 오전 6시경), 전투가 개시되었다. 여기서 오다 측이 대량의 텟포(鉄砲)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의 절반 정도 밖에 표현하지 않고 있다. 타케다 측도 상당수의 텟포를 준비해서 싸움에 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양에는 차이가 있으며, 타케다 측의 텟포슈(鉄砲衆)는 모조리 붕괴, 타케다세는 원호사격 없이 마방책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타케다 측은 거기다 마방책을 제거하지 않아 적에게서 달아날 수 없었는데, 이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신쵸코키』의 기술을 통해, 타케다세는 전군이 일제히 밀려들어 온 것이 아니라, 부대를 교대하면서 공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전장이 좁았기 때문이라 말하는 『코요군칸』의 기술과도 일치한다. 이것이 전투의 장시간화를 초래했다.

 이윽고, 타케다 측의 공세는 한계점에 도달한다. 미각(未刻: 오후 2시경), 반나절에 달하는 격전 끝에, 카츠요리는 철수를 선택한다. 오다, 토쿠가와세가 마방책으로부터 뛰쳐나와 맹렬한 반격에 나선 것은 이때이다. 일반적으로 철수전은 어렵기 마련이다. 하물며, 피로가 극한에 달해 있는 군세를 대군이 쫓아온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러했을 것이다.

 이 패주 중에, 사나다 노부츠나는 전사했다(『信長公記』). 향년 서른아홉. 수급은 가신인 시라카와 카게유(白川勘解由) 형제가 노부츠나의 진바오리(陣羽織)에 싸서 가지고 돌아와 보다이지(菩提寺)인 신코지(信綱寺: 우에다 시 사나다 쵸)에 매장했다. 법명(法名)은 신코지덴다이시츠도야다이코지(信綱寺殿大室道也大居士)이다. 시라카와 형제는 그후 순사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코지의 노부츠나 묘 곁에 묘석이 세워져 있다. 

 쿄호(享保) 연간(1716~36), 신코지를 이축했을 때에 노부츠나의 묘 안에서 갑옷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피로 물든 진바오리와 함께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노부츠나가 사용했던 갑옷이라 봐도 틀림 없을 것이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사나다 관계자는 노부츠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가장 유명한 이는 동생인 효부노쇼 마사테루(兵部丞昌輝)일 것이다. 텐분(天文) 12년(1543) 혹은 텐분 13년에 태어났다. 『코요군칸』 「甲州武田法性院信玄公御代惣人物数事」에 신슈 센보슈(信州先方衆), 기마 50기라 기록되어 있으며, 형인 노부츠나의 지휘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법명은 후잔료쿤다이젠죠몬(風山良薫大禅定門)으로 되어 있다. 향년 서른셋, 혹은 서른넷이 된다. 분세이(文政) 연간(1818~30)에, 료바이인덴(嶺梅院殿)이라는 인덴호(院殿号)가 추증되었다. 또, 텐쇼 19년(1591) 5월 21일, 사나다 가문의 코야 산(高野山)에서의 보다이쇼(菩提所) 렌게죠인(蓮華定院)에서, 형제의 17주기 법요(法要)가 치러졌다.

 이 이외에도, 중신층에서 다수의 전사자가 나왔다. 먼저, 카와라 쿠나이노스케 마사요시(河原宮内助正吉), 신쥬로 마사타다(新十郎正忠), 토키타 즈쇼노스케 나가노리(常田図書助永則)가 전사했다. 이 세 사람은 노부츠나의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구체적으로는 노부츠나의 생모인 카와라 씨의 오빠인 타카마사(隆正)의 자식들이다. 토키타 즈쇼노스케는 사나다 유키츠나(真田幸綱)의 동생인 토키타 타카나가(常田隆永)의 아들 도교(道堯)에게 양자로 들어가 있어, 카와라 씨가 사나다 가문 안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노부츠나의 측근이었다고 여겨지며, 그것이 오히려 전사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이 일로인해 카와라 가문의 가독은 노부츠나가 스스로 가관(加冠)하여 겐푸쿠(元服)시킨 츠나이에(綱家)가 뒤를 잇게 된다. 이를 감안하면, 츠나이에의 형들의 실명이 마사요시, 마사타다, 나가노리라는 게 이상해진다. 이 시점에서의 사나다 씨의 츠지(通字)인 「綱」를 주었어야 했을 것이다. 전승 속에 뭔가 잘못된 점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 이외의 전사자는, 이시이 우쿄노신 시게마사(石井右京進重政: 사나다 유키츠나의 막내동생인 이시이 츠나시게의 손자라 전한다), 이소다 겐자에몬노죠(磯田源左衛門尉), 카와노 타효에(河野多兵衛), 마치다 쵸효에 마사무라(町田長兵衛正村)가 있다. 이러한 인물들이 현재 확인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더욱 더 많았을 것이다. 또, 사나다 씨의 요리키(与力)였던 아가츠마 군(吾妻郡) 쿠니슈(国衆) 칸바라 시게즈미(鎌原重澄)도 전사했다. 덧붙여, 같은 시게노 산케(滋野三家)에서는, 네즈(禰津) 가문의 당주인 네즈 츠키나오(禰津月直), 모치즈키(望月) 가문의 당주인 모치즈키 노부나가(望月信永)가 전사해, 역시나 중신들 중 많은 수가 전사자를 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뒤를 이은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正行)의 남겨진 과제가 되었다. 

 그런데, 『코요군칸』 「甲州武田法性院信玄公御代惣人物数事」 에, 노부츠나의 깃발 색은 「黒四方(쿠로시호: 검은색의 정방형 깃발)」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 유명한 「무츠렌센(六連銭: 로쿠몬센)」 가문(家紋)은, 마사유키 시대 때부터 사용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쪽도 있는 듯 하다. 에이세이분코(永青文庫)가 소장하고 있는 『大坂冬の陣布陣図(오오사카 겨울 전투 포진도)』에 따르면, 노부시게(信繁)는 「우마지루시(馬印)」로 「쿠로시호」 깃발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어, 이는 마사유키 이후의 것이라 한다(히라야마 마사루 씨의 교시에 의한다). 이 깃발은, 『코요군칸』이 기록한 노부츠나의 그것과 일치한다. 우마지루시는 타이쇼(大将)의 소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노부츠나 측에게만 걸려 있었던 것으로, 가문과는 관계가 없다.

 에이로쿠 4년(1561)에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만들게 한 「関東幕注文」에는, 시게노 일족인 오오도 우라노(大戸浦野) 씨와 하네오(羽尾) 씨의 바쿠몬(幕紋: 진막에 그려놓은 가문)은 「六れんてん」... 즉, 「무츠렌센」이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유키츠나의 시대에 사나다 씨는 무츠렌센 가문을 사용하고 있었다 봐도 좋다. 당연히, 노부츠나의 가문도 무츠렌센이 된다. 덧붙여, 『御先祖御武功之書付(고센조고부코노카키츠케)』(사나다 가문 문서)에는, 사나다의 가문은 무츠렌센이지만, 운노(海野)의 가문은 스하마(州浜)라 나와있기 때문에, 센고쿠시대(戦国時代) 이전에는 스하마가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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