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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132016.12.06 PM 01:05
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코즈케(上野) 북부의 군지(郡司)」로서...
~ 타케다(武田) 가문에 있어서는 각지의 성주대리를 「군지(郡司)」(군다이)로 임명하여 군사지위와 더불어 행정권을 부여해 직할령 지배의 원활화를 도모했다.
코즈케(上野)에 대해서는 사나다(真田) 씨가 군사지휘권을 관할하는 아가츠마 군(吾妻郡)을 제외한 7개 군이, 미노와 성(箕輪城)의 성주대리 겸 코즈케 서부의 군지 나이토(内藤) 씨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마사유키(昌幸)는 누마타(沼田) 공략에 성공한 것에 의해 확고부동한 타케다 가문의 가로(家老)가 되었다. 이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아가츠마 군에서의 군사지휘권과 더불어 누마타가 있는 토네 군(利根郡)에서는 군사지휘권, 행정권 쌍방을 부여받게 되었다. 이는 마사유키가 「군지」로 임명되었음을 의미한다. 아가츠마 군에서의 행정권은 불명확하지만, 행정권을 재차 부여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거성으로는, 종래의 이와비츠 성(岩櫃城)과 더불어 누마타 성(沼田城)도 관할하게 되었다. 덧붙여, 일찍이 누마타 성의 성장(城将)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 요도 신자에몬)는 누마타 부근의 누마스 성(沼須城)에 처자식을 두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加沢記』), 이곳을 거성으로 삼았을 것이다. 거기다, 누마타 성 영지 태반은 후지타 노부요시에게 주어져, 노부요시는 5700관문을 영유한 거물이 되었다고 여겨진다(『管窺武鑑』). 이 때문에, 상으로 줄 영지 부족은 심각화되었던 듯 하다. 앞에서 말한대로, 마사유키는 오가와 카유사이(小川可遊斎)에게는 누마타 제압 후에 아이마타(相俣), 미야노무라(宮野村)를 반환하리라 약속해놓고 있었다. 하지만, 누마타 부근에는 은상지(恩賞地)를 확보하지 못해 두 마을의 반환은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환지(替地)를 토네 군 안에서 찾게되었던 듯 한데,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는 카유사이에게 본령을 포함해 1110관문의 소령(所領)을 안도했다.
아가츠마, 토네 양군은 「호쿠모 지역(北毛地域)」에 속한다. 따라서, 양군의 지배를 위임받은 사나다 마사유키의 입장을 「코즈케 북부의 군지」라 부르기로 하겠다. 여기서 텐쇼(天正) 9년(1581) 6월에 카츠요리가 마사유키에게 준 「통치 지침」을 살펴 보도록 하자.
카츠요리가 내려준 방침은 전부 11개조로 이뤄져 있다. 이중 이와비츠, 사루가쿄(猿ヶ京), 누마타의 보수에 대한 지시가 3개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누마타를 공략하고 1년 뒤의 것으로, 아직 전란의 여진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리라. 카츠요리의 지시는 아주 상세했는데, 누마타 성 보수 부분에서는 향촌으로부터의 인부 징발은 당면 사면하라 정해놨기 때문에, 영주를 통해 모으도록 명령하고 있다. 누마타, 아가츠마 사이를 잇는 요충지인 군마 군(群馬郡) 나카야마 성(中山城: 군마 현 타카야마무라, 덧붙여 현재는 아가츠마 군에 속한다) 확보를 지시하고 있는 것도 방어 강화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아이즈(会津)의 아시나(蘆名) 씨와 히타치(常陸)의 사타케(佐竹) 씨와 서로 연락을 취해, 사자의 왕래가 잘 되도록 조치하라는 지시이다. 이는 누마타 성의 제압에 의해, 누마타가 있는 토네 군에서 무츠 아이즈(陸奥会津)로 빠지는 토구라고에(戸倉越: 근세에 들어 아이즈 가도로 정비된다)가 가능해졌다는 것에 의한다. 타케다 카츠요리는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와 싸우는 데에 있어서 히타치의 다이묘이자 칸토(関東) 북부(히타치, 시모츠게, 시모우사)의 소다이묘, 쿠니슈(国衆)의 맹주가 되어 있던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와 동맹을 맺어 동서로부터 협공한다는 전략을 취하고 있었다. 아시나 씨는 타케다 씨와도 우호관계에 있어, 아시나령을 경유하는 것에 의해 사타케 씨와 안전한 사자의 왕래가 가능해진 것이다. 마사유키에게 부분적인 외교교섭권이 주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① 누마타슈에 대한 영지 급여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잘 듣고 전해 혼란이 없도록 행할 것. ② 토네노쇼(利根荘: 토네 군)의 관습법은 이전의 것을 답습하라는 지시를 통해서는, 누마타가 있는 토네 군의 행정권이 영지 급여의 방침 결정까지도 마사유키에게 맡겼음이 명백해진다.
후지타 노부요시, 오가와 카유사이, 와타나베 사콘노죠(渡辺左近丞)의 거주지에 대해서 조치하라는 지시도 흥미롭다. 모두 토네 군의 유력자들이다. 카츠요리는 그들을 마사유키의 요리키(与力)로서 그 군사지휘하에 두었던 데다, 처우에 주의하도록 거듭 부탁한 것이다.
마사유키가 누마타를 공략하기 전인 텐쇼 8년 5월, 카츠요리는 스루가(駿河) 누마즈(沼津)에서 산마이바시 성(三枚橋城: 누마즈 시)을 쌓아 호죠 씨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그때의 보수 독촉장이 근년에 들어 발견되었다. 카스가 노부타츠(春日信達: 시나노 카이즈 성의 성주대리 겸 카와나카지마 군지), 나이토 마사아키(内藤昌月: 코즈케 미노와 성 성주대리 겸 코즈케 서부의 군지), 오야마다 마사시게(小山田昌成: 시나노 우치야마 성 성주대리 겸 사쿠 군 군지), 야마가타 마사미츠(山県昌満: 스루가 타나카 성의 성주대리) 같은 중신들과 나란히, 마사유키의 이름이 수취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친대부터 각지의 성주대리를 맡아온 슈쿠로(宿老)였기에, 마사유키는 타케다 가문 안에서 확고한 지위를 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사유키의 이름은 수취인 이름들 중 가장 먼저 기록되어 있어, 다섯명 중에서는 가장 지위가 낮았던 듯 하다.
코즈케 북부 군지가 된 다음해인 텐쇼 9년은,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숙청」의 해였다. 먼저, 일찍이 누마타 성의 성주였던 누마타 만키사이(沼田万鬼斎)의 아들 헤이하치로 카게요시(平八郎景義)가 누마타 탈환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한다(『加沢記』). 카게요시는 숙부인 카네코 미노노카미 야스키요(金子美濃守泰清)에게 수작을 걸어 누마타 성으로의 귀환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미노노카미는 카게요시를 배신하고 이와비츠 성의 성주대리인 운노 유키미츠(海野幸光)에게 사태를 보고. 카게요시는 누마타로 불려와 모살당해버렸다. 3월 14일의 일이라 한다. 마사유키가 수급 검사를 행했다고 전해지는 장소가 현재 누마타 성 안에 「헤이하치로세키(平八郎石)」로서 남겨져 있다.
마사유키는 운노 유키미츠를 이와비츠 성의 성주대리로 삼았으며, 동생인 테루유키(輝幸)를 누마타 성 호죠쿠루와(北条曲輪: 니노마루)에 두고 있었다. 같은 텐쇼 9년 여름, 테루유키는 호죠세력의 격퇴에 성공하긴 했지만, 그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둘러싸고 불만을 키웠다 한다. 아가츠마 군 전역을 상으로 내린다는 약속이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라 전한다. 이러한 약속을 마사유키가 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토네 군 누마타 땅은 과반이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에게 주어져 있었기에 마사유키가 은상지 부족으로 고생하고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따라서, 확실하게 상을 준다고 한다면 아가츠마 군 밖에 없다. 아가츠마 군 안에서 일정한 가증(加増)을 약속하긴 했지만, 이행하기가 꽤 어려웠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11월 상순, 아가츠마 군슈(郡衆)는 연명하여 운노 형제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마사유키에게 보고했다. 마사유키는 즉시 카츠요리에게 사태를 아뢰고 동생인 카즈노 마사하루(加津野昌春)들을 이끌고 출진했다.
유키미츠는 이와비츠에서 토벌당했으며, 하네오 성(羽根尾城) 기슭에 묘가 있다. 테루유키는 누마타 성을 나와 카시요잔(迦葉山: 누마타 시)으로 떠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하자, 적자인 유키사다(幸貞)와 함께 토벌당했다. 11월 21일의 일이라 여겨진다. 묘는 「운노즈카(海野塚)」라 불리우며 누마타에 남겨져 있다.
정말로 운노 형제가 모반을 꾀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羽尾記(하네오키)』에 따르면, 마사유키는 호죠세의 공격이 가까워졌다는 명목으로 마사하루를 누마타 성 본성으로 입성시켜 테루유키를 속였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운노 형제는 마사유키의 공격을 받으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던 게 아니었을까?
형제는 아가츠마 군의 유력자였기에,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따라서, 마사유키가 모반을 날조하여 유력자를 배척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이 일로 인해 마사유키는 아가츠마 군의 완전한 장악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아가츠마 군 내부의 운노 씨 영지는 몰수당했을 것이기 때문에 마사유키는 자신이 나눠줄 수 있는 영지 확대에 성공하게 된다. 역시나 운노 형제의 숙청은 「코즈케 북부의 군지」라는 발판을 굳히는 데에 필요불가결한 처치였으리라 여겨진다.
덧붙여, 운노 테루유키의 적자인 유키사다는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의 데릴사위였기 때문에, 유키사다의 딸은 요리츠나에게 보호를 받았다. 나중에 사나다 가문의 중신 하라 켄모츠(原監物), 네즈 시마(禰津志摩)에게 출가하게 되는데, 과연 그런 그녀의 심중은 어땠을까? 또, 운노 테루유키의 둘째 딸은 사나다 가문의 중신인 오오쿠마 고로자에몬노죠(大熊五郎左衛門尉)에게 출가했다(『羽尾記』).
◇ 타카텐진쿠즈레(高天神崩れ)와 신푸 성(新府城) 축성
~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와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의 화친으로 인해 발발한 타케다 씨와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의 동맹 파기는, 그 후에 타케다 가문의 유신(遺臣)들에게 있어서 타케다 씨 멸망의 원인이라 이해되게 된다(『甲乱記』). 텐쇼(天正) 8년(1580)이 되면, 호죠세가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 군나이 오야마다령)에 모습을 보이게 되면서, 신겐(信玄)으로부터 가독(家督) 상속 후, 끊이지 않았던 카이 본국에 대한 적세력 침공을 허락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쐐기를 박은 게, 텐쇼 9년 3월의 토토우미(遠江) 타카텐진 성(高天神城: 시즈오카 현 카케가와 시) 함락이었다. 카츠요리는 성장(城将)으로 이마가와(今川) 씨의 옛 가신이자,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の戦い)에서 용명(勇名)을 떨친 오카베 모토노부(岡部元信)를 두어, 영국으로부터 장병을 모아 만전을 기하게 했다. 그렇지만, 동쪽의 호죠 씨와의 전쟁에 너무나 힘을 쏟은 나머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타카텐진 성 주위에 츠케지로(付城)를 쌓아 포위작전을 개시해 온전한 원군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텐쇼 9년(1581) 정월, 성장인 오카베 모토노부는 타카텐진과 더불어 코야마(小山: 시즈오카 현 요시다 쵸), 타키사카(滝堺: 마키노하라 시) 두 성을 넘겨줄 것을 조건으로, 무혈개성을 바란다는 야부미(矢文)를 보냈다. 성을 넘겨줄 것이기에, 성의 병력을 무사히 타케다령으로 철수하게 해줬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는 자주 볼 수 있는 개성 작법이었다. 다만 특수했던 점은, 모토노부가 농성하고 있던 성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관할권을 가진 코야마, 타키사카 두 성도 넘겨준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성안에 있는 병사들은 다급했던 것이다.
야부미를 받은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대응을 협의했다. 그러자, 노부나가로부터는 예상외의 회답이 돌아왔다. 야부미의 요청은 무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대로 포위전을 계속하면서 타케다 카츠요리가 원군을 보내오면 싸워서 격파하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카츠요리는 타카텐진 성을 내버려뒀다」라는 소문이 온 스루가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타케다령 공략 따윈 손쉬워질 것이다... 라는 것이다. 즉, 타카텐진 성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철저하게 선전하려 한 것이 노부나가의 전략이었다.
3월 22일, 항복을 거절당한 타카텐진 성 농성부대는 포위하고 있던 토쿠가와세와 돌격, 괴멸했다.
「타카텐진쿠즈레(高天神崩れ)」라 불리우는 이 패전의 영향은 대단했다. 카츠요리에게 있어서 불행이었던 것은, 타카텐진에는 카이, 시나노(信濃), 코즈케(上野), 스루가, 나아가서는 히다(飛騨)까지... 타케다의 모든 영토로부터 파견된 장병들이 농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노부나가의 노림수는, 그 자신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효과를 발휘했다.
카츠요리를 따라봤자 더 이상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한... 소리 없는 목소리가 각지에서 울려퍼졌을 것이다. 타케다 가문이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서 구축해온 군사적 신용이 붕괴한 것은 그야말로 이 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타카텐진 성이 함락당했을 때에, 메츠케(目付)로서 파견되어 있던 아시가루타이쇼(足軽大将) 요코타 타다토시(横田尹松)는 간신히 난을 피할 수 있어, 카츠요리에게 함락된 양상을 전하고자 복명(復命)했다. 타다토시를 따라나선 니시오 큐사쿠(西尾久作)라는 인물도 타카텐진을 탈출했다. 니시오 큐사쿠는 나중에 의외의 형태로 사나다(真田) 씨와 상종하게 된다.
한편, 비슷한 시기인 텐쇼 9년 정월, 카츠요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침공에 대비해 니라사키(韮崎)에 신푸 성(新府城)을 축성, 새로운 본거지로 삼았다. 코후(甲府)에 있는 츠츠지가사키야카타(躑躅ヶ崎館)는 일종의 해자를 갖춘 정도의 거관(居館)이었지, 방어용 성곽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신푸 성 축성 때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가 관련되어 있었다는 문서가 근년에 들어 발견되었다. 종래에는 사본으로만 알려졌던 문서의 원본이 발견된 것이다. 정월 22일자로, 텐쇼 9년에 축성을 개시한 시기의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마사유키는 집의 마구치(間口) 10간(약 18m)마다 인부 한명씩을 징발해 30일간 보수에 종사케 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문서가 남겨져 있는 것은 사나다 마사유키 뿐이기 때문에, 마사유키가 신푸 성 보수 지휘를 맡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으나 사실은 아니다. 신푸 성보다 훨씬 규모가 작은 스루가 산마이바시 성(三枚橋城)조차 타케다 가문의 중신들의 몫이었다. 마사유키는, 어디까지나 신푸 성 보수에 관련된 가신 중 한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따금 마사유키가 자신의 가신에게 보수 징발을 명령한 문서만이 현재에 전해졌다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럽다.
신푸 성은 텐쇼 9년 9월 중에는 일단 완성해 보여 동맹국들에게 알렸다. 하지만, 호죠 씨의 이즈(伊豆) 토쿠라 성(徳倉城: 시즈오카 현 시미즈 쵸)의 성주대리인 카사하라 마사하루(笠原政晴)가 타케다 가문을 배신해버리는 예상 밖의 사건이 발생, 카츠요리는 그 처리에 분주하게 되어 신푸 성 이주가 늦어졌다. 오다 노부나가를 앞에 두고 패색이 짙어졌던 카츠요리였지만, 호죠 씨에게는 압도적으로 우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 자신이 동생인 우지쿠니(氏邦)에게 보낸 서장에서 「이대로는 우리 가문이 멸망한다」고 본심을 털어놔, 오다 노부나가에게 종신을 신청해 타케다 가문 협공의 길을 모색했을 정도였다. 우지마사는 노부나가에게 적자인 우지나오(氏直)에게 노부나가의 딸을 보내줬으면 한다고 간원, 그 준비로서 텐쇼 8년 8월에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따라서, 카사하라 마사하루가 정세를 착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 카츠요리의 신푸 성 입성은 12월 24일까지 늦춰졌다.
덧붙여, 근년에 들어 마사유키가 발급한 신푸 성 보수 명령서를 텐쇼 10년의 것이라 보는 설이 나오게 되었다. 『甲陽軍鑑(코요군칸)』은 신푸 성의 축성 개시를 텐쇼 9년 여름이라 하고 있어, 그것과의 정합성(整合性)은 파악이 된다. 또, 이 문서는 보수 개시후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있는 그대로 읽어보면, 이제부터 보수 인부를 동원한다는 문서가 있어, 통설대로 텐쇼 9년 정월이라 보는 쪽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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