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202016.12.12 PM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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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 ~유연한 발상과 결단력으로 살아남은 「표리비흥자(表裏比興者)」~


◇ 하치가타 성(鉢形城) 공략과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의 종결

~ 홋코쿠(北国)군의 다음 목표는, 무사시(武蔵) 하치가타 성(鉢形城: 사이타마 현 요리이 쵸) 공략이었다.

 성주는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숙적(宿敵)」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호죠 우지쿠니(北条氏邦)였으며, 그 역시 하치가타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종래에 마사유키는 우지쿠니의 공세를 누마타(沼田)에서 막아내는 형세였지만, 여기서는 처음으로 우지쿠니의 본거지인 하치가타를 공격하는 측에 서있었던 것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의향은 지키신(直臣)인 키무라 하지메(木村一), 아사노 나가마사(浅野長政: 나가요시)가 이끄는 토카이도(東海道) 본대의 지군(支軍)과 홋코쿠군이 연계하여 하치가타 성 공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무라와 아사노군은 무사시 남부, 시모우사(下総) 남부의 여러 성 공략에 힘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느렸다. 또, 이러한 정세였기 때문에, 홋코쿠군도 하치가타로 진군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상황에 불쾌한 내색을 비췄으며, 5월 13일에 홋코쿠군을, 5월 20일에 키무라, 아사노군을 질타, 즉시 합류하여 하치가타를 공략하라 명령했다. 하지만, 마에다 토시이에(前田利家), 우에스기 카게카츠(上杉景勝)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합류를 목도에 둔 6월 초순에 들어선 뒤부터였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갑자기 방침을 바꿨고, 홋코쿠군은 6월 7일에 무사시 오시 성(忍城: 교다 시) 공략을 명령받았다. 이 때문에, 아사노, 키무라군과 합류한 홋코쿠군은, 오시 성을 향했으리라 여겨진다. 6월 13일, 오시 성으로 진군해 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는, 키무라 하지메, 아사노 나가마사와 오시 성 공략에 대한 합의를 보고 공성 병기 인도를 받았다. 오시 성 공략은 이시다 미츠나리에게 맡겨지게 되었고, 마에다 토시이에, 우에스기 카게카츠와 키무라 하지메, 아사노 나가마사는 하치가타 성으로 진군하게 된다. 

 우지쿠니의 관할 병력은 5천으로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 당시의 호죠 가문에서 최대였으며, 그중 3천5백을 이끌고 하치가타 성에서 농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격하는 토요토미군은 5만을 넘었기에, 불과 하루만에 호죠 우지쿠니는 항복을 결단한다. 6월 14일의 일이다. 『管窺武鑑(칸키부칸)』에 따르면, 우지쿠니가 가독(家督)을 이은 무사시 쿠니슈(国衆)인 후지타(藤田) 가문의 서류(庶流)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모시고 있던 후지타 노부요시(藤田信吉)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말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항복한 우지쿠니는 즉시 호죠 측인 여러 성으로 공격을 중지해달라고 탄원했지만, 히데요시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애당초 우지쿠니는 対히데요시 온건파였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전쟁의 조기 종결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우지쿠니의 가로(家老)인 이노마타 쿠니노리(猪俣邦憲)가 일으킨 「나구루미 성 사건(名胡桃城事件)」이 개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너무나도 얄궂은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우지쿠니는 토쿠가와 가문의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榊原康政)에 의한 「전대미문의 비겁자」라는 비판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오시 성을 공격하고 있던 이시다 미츠나리는 히데요시의 지시로 「수공(水攻め)」을 치르게 되었다. 이미 성내에서 구명탄원이 나왔고, 수공의 충격으로 성안의 의논을 조속히 개성으로 모을 것이라 의도한 것이었다. 20일, 사나다 마사유키는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하치가타를 벗어났고, 아사노 나가마사를 따라 오시 성 공략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기대는 벗어났고, 제방이 파괴되면서 수공은 불완전한 상태가 되어 결국 성안의 장병들과의 교전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大鋒院殿御事蹟稿(다이호인덴고지세키코)』는 다양한 군기물류를 인용하여, 노부유키(信幸)가 데마루(出丸: 외성)를 함락시킨 군공을 칭찬하고 있지만, 『里見吉政戦功覚書(사토미요시마사센코카쿠쇼)』에 따르면, 마사유키 자신의 활약은 신통치 않았던 듯 하다. 그럼에도 7월 14일이 되면서 오시 성도 개성했다. 사실 이보다 열흘정도 전인 7월 5일에 오다와라 성이 개성하고 있어, 오시 성은 유일하게 남은 호죠 쪽의 저항 거점이었다. 마사유키는, 오다와라 전투의 종국를 지켜보게 된다.

 오다와라에서는, 호죠 우지나오가 탁발하고 토요토미군의 진을 방문, 자신의 할복과 맞바꿔 성안의 병사들의 구명을 탄원했다. 히데요시는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사위임을 배려하여 살려줬지만, 책임자의 처벌을 엄격히 했다. 우지나오를 대신해 할복하게 된 것은 은거 중이었던 우지마사(氏政), 이치몬(一門) 필두인 호죠 우지테루(北条氏照: 우지마사의 동생), 가로인 마츠다 노리히데(松田憲秀), 다이도지 마사시게(大道寺政繁)였다. 

 여기서 오다와라 전투는 종결되었으며, 칸토(関東)의 패자로서 100년의 영화를 누린 호죠 씨는 멸망하게 된다. 우지나오는 코야 산(高野山)으로 유배당하게 되는데, 이에야스의 사면 운동이 효과를 거둬 익 텐쇼(天正) 19년(1591)에 카와치(河内) 사야마(狭山: 오오사카 사야마 시) 1만석으로 다시 다이묘 신분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음 고생이 심했던건지, 불과 두달 뒤에 병으로 세상을 뜨고만다. 가독은 우지나오의 숙부이자, 토요토미 정권과의 종속 교섭을 맡았던 우지노리(氏規)의 아들 우지모리(氏盛)가 상속하였으며, 에도시대(江戸時代) 이후에도 존속하게 된다. 

 호죠 씨가 다스렸던 칸토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전봉(転封)되어 입부하게 되었으며, 히데요시의 지시로 무사시 에도(江戸)가 본거지로 정해졌다. 동시에, 사나다 노부유키는 호죠 씨에게 할양해주었던 누마타(沼田)령을 회복하여, 코즈케 누마타의 다이묘로서 재출발을 도모하게 된다. 덧붙여, 이에야스에게 종속되어 있던 시나노 쿠니슈들은 모두 칸토로 전봉되었는데, 요리키 다이묘(与力大名)로 대우받았던 마사유키는 전봉을 면하게 되어 히데요시의 직속인 토요토미 다이묘로서 치이사가타 군(小県郡) 우에다(上田)령 지배를 계속하게 되었다. 일련의 사나다 가문에 대한 처우에 대해,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감사인사를 올렸다. 

 오다와라진에는, 당시까지 종속 태세를 보여주지 않았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도 참진해 있었기에, 여기서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호죠 씨의 멸망이,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종언이라 여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마사무네가 「소부지령(惣無事令)」을 무시하여 아시나(蘆名) 씨를 멸망시켜 점령한 아이즈(会津)를 몰수, 가모 우지사토(蒲生氏郷)에게 주기로 정한다. 시모츠케(下野) 우츠노미야(宇都宮: 우츠노미야 시)에서 내려진 결정이었기 때문에 「우츠노미야시오키(宇都宮仕置き)」라 불리운다. 덧붙여, 히데요시는 아이즈로 떠날 예정이었기에, 사나다 노부유키는 누마타령에서 고자쇼(御座所) 정비와 가도 보수를 명령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트러블이 발생했다. 오다와라에 참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역당한 무츠(陸奥)의 명문가 카사이(葛西), 오오사키(大崎) 씨의 옛 가신이 새로운 다이묘로서 입부한 키무라 요시키요(木村吉清)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텐쇼 18년 12월, 토쿠가와 이에야스, 사타케(佐竹) 씨들에게 구원을 지시했으며, 마사유키도 무츠 이와세(岩瀬: 스가가와 시)로의 출진을 명령받았다. 카사이, 오오사키 봉기의 배경에는, 아이즈를 몰수당한 데에 불만을 품은 다테 마사무네의 선동이 있었으리라 의심된다. 이 때문인지, 텐쇼 19년의 반란 진압 뒤, 마사무네는 본령인 다테 군(伊達郡)을 몰수당하고, 그 대신에 키무라 씨의 옛 영토가 주어지게 된다.    

 

 

 

◇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의 가신화

~ 호죠(北条) 씨 멸망 후, 생각지 못한 인물이 마사유키(昌幸)를 의지해 왔다. 사위인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였다. 시게마사는 일반적으로 타케다(武田) 씨가 멸망했을 때에 타카토오 성(高遠城: 이나 시)에서 분전하다 전사한 오야마다 마사시게(小山田昌茂)의 아들이라 전해지고 있지만, 실은 카이(甲斐) 츠루 군(都留郡)의 쿠니슈(国衆)인 오야마다 노부시게(小山田信茂)의 이치몬(一門)으로, 사카이(境: 츠루 시), 쿠라미(倉見: 야마가타 현 니시카츠라 쵸)를 영유한 오야마다 아리마사(小山田有誠)의 아들이다. 아리마사의 가문은 군내에 오야마다 씨들 중에서 이치몬 필두에 위치하고 있다고 여겨지며, 타케다 씨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은 일도 있었다. 사실은 에도시대(江戸時代)에 오야마다 노부시게의 모반이 불평을 샀기 때문에, 시게마사의 아들인 유키토모(之知) 시대에 오노(小野)로 성(姓)을 고쳤다고 하는 경위를 가졌다(유키토모의 아들이 오야마다로 복성). 이 때문에, 충신으로서 알려진 오야마다 마사시게의 자식이라고, 근세에 들어 자신들의 출신을 숨기려했던 듯 하다. 군내의 오야마다 씨의 이치몬들 중에는 그러한 인물들이 그 이외에도 발견된다.

 시게마사의 부친인 아리마사는, 텐쇼(天正) 10년(1582)의 타케다 씨 멸망 때에 호죠 씨 아래로 망명했다. 오야마다 씨의 영지인 츠루 군은, 「텐쇼 진고의 난(天正壬午の乱)」에서는 호죠 씨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한때는 본령으로 돌아왔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호죠 씨와 토쿠가와(徳川) 씨가 화친을 맺은 결과, 카이는 토쿠가와 가문에게 할양되었기 때문에, 다시 츠루 군을 떠났을 것이다. 군내의 오야마다 씨들 중에는 호죠 씨를 의지했던 일족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시게마사는 타케다 씨가 멸망했을 때에 스물한, 두살이었다 한다. 텐쇼 3년에 오야마다 노부시게로부터 「茂」 글자를 받고서 성인식을 치렀으며, 헤이조 시게마사(平三茂誠)라 칭했다. 딱 열네, 다섯살 때이니, 성인식을 치를 연령적으로는 적절하다. 마사유키의 장녀인 무라마츠도노(村松殿)와의 결혼 시기는 확정할 수 없지만, 적자인 유키토모는 타케다 씨가 멸망했을 때에는 아직 유아여서 몸을 숨겼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타케다 가신 시절에 결혼했으리라 추청된다. 

 텐쇼 18년 12월 11일, 마사유키는 시게마사에게 무라마츠 고(村松郷: 나가노 현 아오키무라)의 장납(蔵納) 연공 300문을 주었다. 거의 버리는 것마냥 준 땅이었지만, 이 땅이 그후에 시게마사의 본령이 되었으며, 또 정실인 무라마츠도노의 호칭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케이쵸(慶長) 3년(1598)에 이키노카미(壱岐守)라는 즈료나(受領名)를 받았으며, 사나다(真田) 카바네(姓)를 쓸 수 있도록 허락도 받았다. 사나다 카바네는 아들인 유키토모도 칭했기에, 이치몬으로서 대우받았음을 알 수 있다(정작 유키토모 대에 사퇴).

 그후, 가증(加増)을 받아 지행지는 323관 400문까지 올라갔으며, 마츠시로한(松代藩)에서는 차석 가로의 자리까지 올라갔다. 덧붙여, 필두 가로는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의 자손들이다.

 마사유키는 타케다 씨 멸망 후의 세력확대에 따라, 타케다의 옛 가신들을 대거 고용, 가신단 조직을 정비해 갔다. 시게마사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시게마사는 처남인 노부시게(信繁)와의 교류가 깊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중에 다뤄보기로 한다. 

 덧붙여,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 이후, 마사유키는 카오(花押)를 타케다 시절부터 쓰고 있던... 이른바 타케다요카오(武田様花押: 신겐의 카오를 모방한 것)에서, 완전히 독자적인 형태로 바꿨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에 맞춰 심기일전을 도모한 것이라 여겨진다.

 텐쇼 20년(분로쿠 원년 / 1592) 5월 20일, 또는 분로쿠(文禄) 2년 8월 1일, 마사유키의 생모인 카와라(河原) 씨가 세상을 떠났다. 법명(法名)은 키잔리케이다이시(喜山理慶大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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