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322016.12.31 PM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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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마츠시로(松代) 10만석의 기반을 굳힌 한조(藩祖)~

 

◇ 코즈케(上野) 재성(在城)과 두 아내

~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는 케이쵸(慶長) 5년(1600)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까지 실명을 「信幸(똑같이 "노부유키"라 읽는다)」라 칭했으며, 익 6년 이후에 「信之」로 개명했다. 

 에이로쿠(永禄) 9년(1566)에 사나다 마사유키(真田昌幸)의 적자로 태어났다. 장소는 토이시 성(砥石城: 우에다 시)이었다고 하며(『加沢記』), 이것이 토이시 성이 사나다 가문에게 맡겨져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어 있다. 겐푸쿠(元服)하여 겐자부로 노부유키(源三郎信幸)라 칭했다. 「信」는 타케다(武田) 가문의 츠지(通字)이며, 타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의 적자인 노부카츠(信勝)가 오하구로(お歯黒: 이를 검게 물들이는 의식)를 했을 때에 함께 오하구로를 해, 노부카츠로부터 「信」를 받았다 한다(『真武内伝附録』 외). 오하구로라 하면 쿠게(公家)의 풍습처럼 여겨지기 쉽상이지만, 센고쿠시대(戦国時代)까지는 부케(武家)도 오하구로를 하고 있었다(『おあむ物語』). 노부카츠는 텐쇼(天正) 7년(1579) 12월에 겐푸쿠를 했기 때문에, 이때 노부유키는 열네살에 겐푸쿠했다는 뜻이 된다. 당초에는 인질로서 코후(甲府), 신푸(新府)로 출사하고 있었다(『加沢記』).

 아내로는,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전사한 백부 노부츠나(信綱)의 딸인 세이인인덴(清音院殿)을 맞이했다. 이는 사나다 가문이라기 보다도, 부친인 마사유키에게 있어서 불가결한 처치였다. 사나다 마사유키는 서류(庶流)라는 입장에서 가독(家督)을 상속한 인물이었기에, 앞에서 말한대로 노부츠나 앞으로 전해진 가전 문서도 상속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가독상속자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해결 방법이 적자인 노부유키에게 적류 가문인 노부츠나의 딸을 보내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세이인인덴은 겐나(元和) 5년(1619) 9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법명(法名)은 세이인인덴토쿠요엔쥬다이시(清音院殿徳誉円寿大姉)이다. 

 타케다 가문 멸망 뒤, 노부유키는 작은 할아버지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 누마타 성의 성주대리)의 지도를 받으며 코즈케(上野) 이와비츠 성(岩櫃城)의 성주대리가 되었다. 제 1차 우에다 전투(第一次上田合戦)에 참가하였으며, 토쿠가와(徳川) 측의 1300여기를 무찔렀다고 하는 전승보고를 자신의 빈자리를 지켰던 아가츠마슈(吾妻衆)에게 전했다. 

 토요토미(豊臣) 정권하에서는 누마타(沼田)령 2만 7천석을 받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요리키 다이묘(与力大名)가 되었다. 이것을 인해 사나다 가문이 코즈케 토네(利根: 누마타령), 아가츠마 군(吾妻郡: 이와비츠령) 영유를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이다. 

 무엇보다, 오다와라 전투(小田原合戦)나 조선 출병에서 히젠(肥前) 나고야(名護屋) 진지 등, 실제로는 부친인 마사유키와 행동을 함께 하고 있었다. 덧붙여, 부친과 마찬가지로 조선으로 건너가지는 않았다. 

 그후, 혼다 타다카츠(本多忠勝)의 딸인 코마츠도노(小松殿: 이나히메 혹은 네이히메, 다이렌인덴)를 아내로 맞이했다고 하는데, 시기는 확실할 수 없다. 혼다 가문의 계보 『参考御系伝(산코고케이덴)』(야마자키 혼다 한 기념관 소장)이나 『幕府祚胤伝(바쿠후소인덴)』에 따르면, 텐쇼 14년(1586)에 히데요시의 중개로 성사된 결혼이라 하는데, 마사유키의 토요토미 정권 출사는 그 다음해이다. 다만, 혼다 가문이 사나다 가문과 화해하자마자 바로 이 혼사를 치른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안하면, 텐쇼 15년 무렵의 혼인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타다카츠는 두 말할 필요 없이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중신이다. 일반적으로, 코마츠도노는 이에야스의 양녀로서 시집을 갔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혼다 가문의 『산코고케이덴』에도 그렇게 나와있다. 하지만, 에도 바쿠후(江戸幕府) 및 사나다 가문에서는 누군가 귀인의 양녀로서 출가할 수 있었다고 하는 애매한 기억만이 남겨져 있으며, 하필이면 노부유키의 손자인 유키미치(幸道)조차 「히데요시의 중매로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의 양녀」로서 시집을 왔다고 바쿠후에 보고하고 있다. 이는 코마츠도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다이에이지(大英寺: 나가노 시 마츠시로 쵸)의 카키아게(書上)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정말로 이에야스의 양녀로서 시집을 왔는지는 재검토해봐야하겠지만, 토요토미 다이묘라는 사나다 가문의 가격(家格)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분로쿠(文禄) 4년(1595)에 태어난 적자 사나다 노부요시(真田信吉)의 생모는, 비교적 성립 시기가 이른 기록에는 세이인인덴이라 기록하고 있어, 그녀가 낳은 자식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마사유키의 권위를 확립한다는 목적은 달성되어 있던 시기라, 그녀를 노부유키가 아내로서 대우할 의미는 희박해져 있었다. 뒤늦은 시기의 기록에 이르면 노부요시의 생모는 「家女(신분이 낮은 여성)」이라 기록되게 되어, 측실 대우를 받았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어쨌든, 안방 관리권이 코마츠도노에게로 옮겨진 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덧붙여, 노부요시의 생모는 최종적으로 코마츠도노라 기록되게 된다. 이는, 코야 산(高野山) 렌게죠인(蓮華定院)에서 노부요시가 코마츠도노의 공양을 치렀을 때, 코마츠도노를 「悲母(亡母)」라 불렀던 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당시의 오쿠(奥)에서는 생모가 아니더라도 정실 부인을 「어머니」라 부르는 경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어, 이는 증거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적자인 노부요시는, 세이인인덴의 자식이라 봐도 틀리지 않다.

 코마츠도노는 겐나 6년(1620) 2월 24일, 에도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무사시(武蔵) 코노스(鴻巣: 코노스 시)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다이렌인덴에이요코게츠다이젠죠니(大蓮院殿英誉皓月大禅定尼)라는 법명(法名)이 붙여졌다.

 

 

 

◇ 토요토미(豊臣) 정권하의 노부유키(信幸)

~ 영지인 누마타(沼田)령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재정(裁定)에 의해 2/3가 호죠 우지나오(北条氏直)에게 인도되었다는 것은 제 3장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사나다(真田) 측의 거점인 나구루미 성(名胡桃城: 군마 현 미나카미 쵸)을 호죠 씨에게 빼앗겼고, 이것이 오다와라 전투(小田原の合戦)의 원인이 되었던 것도 마찬가지다.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는 부친인 마사유키(昌幸)와 함께 홋코쿠(北国)군을 따라 코즈케(上野), 무사시(武蔵)를 전전했다. 

 텐쇼(天正) 18년(1590)의 오다와라 전투 이후, 호죠 씨에게 인도되었던 누마타령 2/3는 노부유키에게 반환되었다. 다만, 에도시대(江戸時代) 초기의 쇼군 주인장(将軍朱印状)의 내용을 살펴보면, 토네(利根), 아가츠마 군(吾妻郡) 일원이라는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히데요시에 의한 재정 이전에, 호죠 우지나오가 제압하고 있던 영역을 제외한 결과였을 것이다. 한편으로, 세타 군(勢多郡)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던 듯 하다. 

 누마타령 반환 후, 노부유키는 즉시 검지(検地)에 착수한다. 검지장에는 8월 25일이라 나와있기 때문에, 호죠 씨가 항복하고 한달여 후인 아주 빠른 대응이었다. 부친인 마사유키와 마찬가지로, 칸다카제(貫高制) 검지였다. 노부유키는 여기서는 종래의 1.5배에서 3배의 증가분이 나왔다고 하고 있어, 그는 재정 안정을 우선시했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노부유키는 이어서 분로쿠(文禄) 2년(1593) 10월에도 검지를 행했는데, 이때의 검지 부교(奉行)는 작은 할아버지인 야자와 요리츠나(矢沢頼綱)였다. 동년, 칸토(関東)에서는 가뭄이 심했다고 하니, 그에 대한 대책이라 생각된다. 야자와 요리츠나는 이 임무를 완수한 뒤, 케이쵸(慶長) 2년(1597)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여든. 일족의 장로의 죽음이었다.

 노부유키의 영지 경영도 부친인 마사유키처럼 타케다(武田) 가문의 방식을 답습하고 있어 「精福萬(세이후쿠만)」이라 인쇄된 주인 등을 사용했다. 봉자(奉者)가 붙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분로쿠 3년 11월 2일, 정식으로 종 5위하 이즈노카미(伊豆守)로 임관한다. 동생인 노부시게(信繁)와 동시 서임이었다. 

 앞에서 말한대로, 노부유키에게도 후시미 성(伏見城) 보수역이 맡겨졌다. 하지만, 마지막 해는 보수역을 면제받아, 영지에 머무르며 영지 경영에 전념하도록 허락받았다. 그런데, 후시미 성 보수가 생각처럼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과 열흘 뒤에 취소되어 2월에 상경하도록 재차 지시를 받았다. 보수 기간은 3월부터 9월까지였기 때문에, 꽤 오래도록 상경해 있었다. 다만, 특별한 명령이었기 때문인지 1/5역(役)으로 감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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