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사나다 사대와 노부시게(真田四代と信繁) #0332017.01.02 PM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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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 ~마츠시로(松代) 10만석의 기반을 굳힌 한조(藩祖)~

 

◇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와의 교우(交友)

~ 실로 의외라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幸)가 가장 친했던 토요토미(豊臣) 정권의 가신은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였다. 「사나다 가문 문서」에는 미츠나리로부터 노부유키 앞으로 보내진 서장이 열네통이나 남겨져 있다.

 예를 들자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손자인 히데노부(秀信)가 병에 걸려 노부유키의 영지 안에 있는 쿠사즈(草津: 군마 현 쿠사즈 쵸)에서 탕치(湯治)를 하러 가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히데노부는 병에 걸려있었기 때문인지, 잘 모르는 땅에서의 여행이 불안해져, 미츠나리를 통해 노부유키에게 자리를 비우는 동안이라도 자신을 잘 돌봐줄 수 있도록 서장을 한통 써줬으면 한다는 부탁을 했다. 그때, 미츠나리는 「그대와 나 사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셨는지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미츠나리와 노부유키의 교우관계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에는, 미츠나리의 자식이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노부유키는 자주 안부를 묻는 서장을 보냈다. 미츠나리는 「자식의 병은 괜찮아졌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간병하다 보니 약간은 몸상태가 좋지 않아졌습니다. 하루이틀 정도만 지나면 출사할 예정입니다. 귀국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모두 오오사카로 내려와있으나 오늘 중에 돌아갈 것이니 일이 마무리 되면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노부유키에게 보낸 미츠나리의 서장은 간단명료하다. 이는 두 사람이 사이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라, 친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증거다. 예를 들자면, 「서장은 잘 읽었습니다. 숙소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만 쓴 단신도 있고, 「성을 지키는 당번도 근시일 내에 끝날터이니, 그때 쌓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등이라 쓴 서장도 있다. 후자에서는 「급한 용무가 있으시면 『糊付(노리즈케)』로 서장을 써주십시오」라고 잇고 있다. 「노리즈케」라는 것은 센고쿠시대(戦国時代)에 드물게 보이는 것으로, 그 명칭대로 풀(糊)로 봉한 서장이다(근세에 들어서면서 일반화된다). 통상적인 서장은 지노(紙縒)로 묶었을 뿐이었기에, 노리즈케는 은밀한 내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은, 밀서를 주고 받기도 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제 3장에서 말한대로, 이시다 미츠나리가 「토리츠기(取次)」로서 사나다 가문을 후견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부유키는 요리오야(寄親)인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토리츠기인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두가지 루트로 토요토미 정권과의 관계를 쌓고 있었다. 

 

 

 

◇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의 지행 변경과 우에다(上田)령 부흥

~ 케이쵸(慶長) 5년(1600)의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사나다 노부유키(真田信之)가 부친인 마사유키(昌幸), 동생인 노부시게(信繁)와 절연한 뒤, 토쿠가와(徳川) 측(동군)에 가담했다는 것은 이미 말했다.

 노부유키는 7월 24일에 마사유키의 편에 서지 않은 것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부터 칭찬받았고, 27일에는 우에다(上田)령은 「親之跡」다 라며 보상을 약속했다. 그때, 우에다로 돌아가려 한 마사유키가 누마타(沼田)를 통과할 때, 비어있던 성을 지키는 자를 속여 성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노부유키의 정실(正室)인 코마츠도노(小松殿)는 그것을 간파하여 성문 열기를 거부, 마사유키의 목적은 무너졌다는 이야기이다.

 이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긴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몇가지 의문이 든다. 토요토미(豊臣) 정권하에서는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들은 후시미(伏見), 이어서 오오사카(大坂) 저택에 집주시켰기 때문이다. 어째서 코마츠도노만 귀국을 허락받았던걸까? 또, 오오타니 요시츠구(大谷吉継)는 거병할 때에 노부유키의 아내도 보호하고 있다고 마사유키에게 전했다. 이 아내가 사나다 노부츠나(真田信綱)의 딸(세이인인덴)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평범하게 생각해 보면 정실인 코마츠도노여야하기에,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지적해 두고 싶다.

 전후에 이에야스는 약속대로 마사유키의 옛 영지를 노부유키에게 주었고, 노부유키는 시나노(信濃) 우에다령, 코즈케(上野) 누마타령(이와비츠령을 포함)의 다이묘로서 재출발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信幸에서 信之로 개명했다. 부친인 마사유키의 「幸」를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다소 시간적 차이가 있다. 信之라는 이름이 처음 발견되는 것은 케이쵸 6년(1601) 7월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노부유키가 제 2차 우에다 전투(第二次上田合戦)에 참가한 가신에게 준 상은, 그다지 발견되지 않는다. 쿠사즈 온천(草津温泉)을 관리하고 있던 아가츠마슈(吾妻衆) 유모토 사부로에몬노죠(湯本三郎右衛門尉)에게 연공 미납이 거듭되고 있던 유센(湯銭: 입욕료) 상납을 과거분까지 면제해주었으며, 금후에는 유센 상납 그 자체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해준 게 몇 안 되는 사례이다. 이것에 의해, 유모토 사부로에몬노죠는 쿠사즈의 유센 모두가 자신의 지행(知行)이 되었다. 덧붙여, 유센이라 하면 꽤 쌀 것이라 여겨지겠지만, 전년의 유센은 황금 여덟냥이라 지적되고 있었기 때문에, 상당한 액수로 올랐던 듯 하다. 노부유키는, 케이쵸 6년 봄의 유센으로서 코마금(駒金) 한 장, 이나카메(田舎目: 지방에서 유통되는 순도가 낮은 금) 두 장을 유모토 사부로에몬노죠로부터 받았으며, 이후에는 유센을 상납하지 않아도 된다고 통달했다. 

 이어서 노부유키가 착수한 것은, 치이사가타 군(小県郡)에 있어서의 영지 변경이었다. 이것은 마사유키의 옛 가신을 고용하기 위해 필요한 처치였으며, 검치(検地) 증가분도 나온 것이 확인된다. 케이쵸 6년(1601) 8월부터 매형인 오야마다 시게마사(小山田茂誠)나 야자와 요리유키(矢沢頼幸)의 영지를 안도하였으며, 또 새로이 영지를 주었다. 이 지행 변경은 종래대로 칸다카제(貫高制)로 치러졌으며, 우에다령과 누마타령에서는 다른 다이묘와는 달리 코쿠다카제(石高制)를 채용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중에 에도 바쿠후(江戸幕府)의 역인(役人)이 이를 수상하다 여겨, 마을의 노인에게 물었더니 검지를 행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나다 씨는 노부츠나 시대에는 검지를 행했으며, 또, 마사유키는 토요토미 정권 복속 후에도 몇번인가 마을에서 검지를 행했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어째서 검지를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코쿠다카제로 이행하지 않았던걸까?

 이 점에 대해, 사나다 가문의 세금이 다른 다이묘와 비교해 1.2배에서 1.4배 높아, 코쿠다카제로 변경할 경우 검지를 하면 오히려 세금이 감소되어버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확실히, 사나다 가문이 설정한 세금은 꽤 무거웠던 듯 한데, 매년 「이리사게(入下)」라는 감세처치를 취하는 것으로 인해 조절을 도모하고 있다. 그렇지만, 코쿠다카제로 이행할 때의 환산 룰이 있었던 게 아니다. 칸다카제와 맞먹는 세율을 유지하면서 코쿠다카제로 이행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실제로 누마타 한(沼田藩)은 나중에 대증세를 단행해 코쿠다카제로 이행한다(다만, 이는 영지의 대폭적인 피폐를 초래했다).

 이는 토요토미 정권의 코쿠다카제를, 센고쿠 다이묘 단계와 다른 세제(税制)로, 측량에 따라 생산량을 가능한 한 파악한 특별한 것이라 이해하는 데에서 오는 오해이다. 이른바 「타이코 검지(太閤検地)」에 의해, 전국의 다이묘의 코쿠다카가 정해졌다는 것은 틀림 없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토요토미 정권의 부교닌(奉行人)이 전국을 돌며 검지를 행한 것도 아니었다. 다이묘의 재량에 맡겨진 경우도 있었으며, 부교닌이 탁상공론으로 코쿠다카 수치를 늘려버린 사례도 많았다. 애당초 몇일 밖에 안 되는 수확기에 모든 측량을 끝내는 일 따윈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타이코 검지」에서 얻은 수치는 생산량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토요토미 정권이나 각 다이묘가 군역이나 보수역을 부과할 때에 사용되는 편의적인 기준치였다. 즉, 센고쿠 다이묘 이전과 똑같았던 것이다. 

 사나다 가문의 경우도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 등 토요토미 정권 부교닌에 의한 검지는 행하지 않고 마사유키 부자에게 맡겨졌다. 당연하게도, 사나다 가문은 익숙한 타케다(武田)식 검지를 실시했다. 그리고, 토요토미 정권이나 에도 바쿠후와 주고받을 때에 한해서, 코쿠다카제로 환산한 수치를 제시한 것이다. 우에다령의 경우는 1관문 = 2석 4두 7변이라는 비율이었던 듯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코쿠다카제로 이행하지 않았는가 하면,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밖에 현시점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코쿠다카제가 쌀재배로 토지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인 데에 반해, 칸다카제라는 것은 금전으로 토지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받은 영지인 오우미(近江) 나가하마(長浜: 나가하마 시)가 코쿠다카제였기 때문에, 토요토미 정권은 코쿠다카제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여러 다이묘에게도 코쿠다카제로의 평가액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칸다카제가 계속해서 존재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사나다 가문은 칸다카제를 계속해서 사용하는 데에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불편한 코쿠다카제로의 이행 처리는 행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칸다카제를 채용해 온 다이묘로는 센다이 한(仙台藩)을 들 수 있는데, 다테(伊達) 씨는 1관문 = 10석으로 환산하고 있다. 또, 사나다 가문이 마츠시로(松代)로 전봉(転封)된 뒤에도, 우에다 한(上田藩: 센고쿠 가문, 후지이 마츠다이라 가문)은 막말(幕末)까지 칸다카제를 답습하게 된다. 

 노부유키가 지행 변경과 병행하는 형태로 도신(同心)의 편제 교체를 행해, 군세를 재편한 점도 주목된다. 각 가신이 이끄는 병과를 창이라면 창만, 텟포(鉄砲)면 텟포만으로 통일하였으며, 10명 단위로 알기 쉽게 부대 편제를 고쳤기 때문이다. 종래에 이러한 병과별 부대의 편제는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행하고 있었는데, 그 수고를 해소하게 된다. 이것은 노부유키가 세키가하라를 거친 뒤에도 여전히 전쟁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했음을 시사한다. 

 케이쵸 7년(1602) 12월, 노부유키는 누마타령 누마스(沼須: 누마타 시), 하라마치(原町: 히가시아가츠마 쵸)에서 새로운 마을을 설정하여 로닌(牢人) 집중 거주를 명령했다. 이 시점에서의 노부유키의 본거지는 어디까지나 누마타였기에, 영내의 숙소와 교통 정비에 힘쓰고 있었다. 누마타를 거성으로 사용한 이유는, 우에다 성(上田城)이 파각(破却)된 다음에 노부유키에게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무(政務)를 일단락 한 뒤, 노부유키는 황폐해져 있던 우에다령 부흥에 착수했다. 제 2차 우에다 전투는 그야말로 총력전의 양상을 띄고 있어, 우에다령의 촌락에서는 백성의 이탈이 연이어지고 있었다. 사나다 가문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쵸코쿠지(長谷寺: 우에다 시 사나다 쵸)도 소실되어 있어, 마사유키로부터 쵸코쿠지 재건을 의뢰받았다. 

 우에다령 부흥이 시작된 것은 케이쵸 8년 3월이다. 노부유키는 착실하게 백성들에게 촌락으로 돌아올 것을 부탁, 가신에게도 그것을 제촉했다. 돌아온 백성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이 기록되었으며, 쌀 한가마니씩 주어졌다. 

 그렇지만 백성의 귀환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듯 하다. 그래서 케이쵸 11년(1606), 아키와(秋和: 우에다 시)의 이탈한 백성들에게 돌아오면 3년동안은 부역 면제하며, 누구든 농사를 지으면 백성으로서 인정하겠다고 정했다. 동시에 현재 거주하고 있는 백성에게는 부역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통달했다. 불공평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와다(和田), 다이몬(大門), 나가쿠보(長窪: 나가와 쵸)에도 비슷한 통달이 있었으며, 달아난 백성들 뿐만 아니라, 타지의 로닌들도 모여살도록 했다.

 그중에서도 아키와는 사나다 가문의 본령(本領)이라 해도 좋을 장소였다. 그땅에서 조차 백성들의 이탈이 문제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했다.

 케이쵸 10년에는 우에다 성 아래의 하라마치의 저택을 재배치하여 저자마을 정비에 힘썼다. 익년에는 하라마치와 동시에 운노마치(海野町: 우에다 성 아래)에 있어서도 내객용 숙소를 정해두었기 대문에, 정비는 순조롭게 진전하고 있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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