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052017.02.14 AM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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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章 야규 일족(柳生一族)의 허(虚)와 실(実)

 

 

◎「천하의 검(天下の剣)」이 된 인연(縁)

~ 이야기를 검술(剣術)로 되돌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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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剣聖)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

 

 야규 세키슈사이(柳生石舟斎)의 스승이자 신카케류(新陰流)의 개조(開祖)인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上泉伊勢守)는, 죠슈(上州) 오오고(大胡) 씨라는 코쿠진(国人: 재지 무사)의 지류(支流)인 카미이즈미(上泉) 씨 출신이다. 이 가문은 대대로 칸토 칸레이(関東管領)인 우에스기(上杉) 씨, 시대가 변하며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에게 귀속해 있었다.

 카미이즈미 성(上泉城: 군마 현 마에바시 시 카미이즈미)을 거점으로 두고 있던 카미이즈미 씨는, 이세노카미 시절에는 우에스기 씨의 모쿠다이(目代: 다이칸)인 미노와 성(箕輪城: 군마 현 타카사키 시 미사토 쵸)의 성주인 나가노 나리마사(長野業正) 휘하에 있었다. 

 카미이즈미 씨는, 신분이 낮은 지자무라이(地侍)들의 일상이 그러하듯, 칸토 중원(中原)에서 패권을 다투던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들의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 유린당한 일족이다. 그러한 점에서, 야마토(大和)의 야규 씨의 운명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다.

 불리한 입장에 있었던 이러한 소규모 씨족은, 자신들의 생활 기반인 토지를 타국의 침략자로부터 지켜야할 필요에 내몰렸고, 무력(武力)을 모으고 병력을 편성하여 요새를 구축한다거나 작은 성을 쌓는다거나 하며 어지럽게 변해가는 침략 세력의 강약을 구분하여, 강자의 편에 서거나, 약자와 적대하여 싸움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것은 일족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처세술이었다.

 이세노카미 역시, 일족의 그러한 운명을 짊어지고있던 무장이었다. 그는 미노와 성이 카이(甲斐)의 타케다 신겐(武田信玄)에게 공격받자, 앞장서서 그 신겐의 군문(軍門)에 항복하였고, 결국에는 귀속했다.

 이보다 먼저,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는 일찍부터 병법(兵法)에 관심을 가져 여러 유의(流儀)을 익혀나갔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깊히 연구했던 것은, 아이스 이코사이(愛州移香斎: 1452~1538)를 개조로 하는 카게류(陰流)였다. 이세노카미는 이 병법의 술리(術理: 기술과 이론)를 근본으로 삼아 새로이 검의(剣意)를 더하여 신카게류를 일으켰다.  

 그 무렵,「上り兵法、下り音曲(올라가는 것은 병법이고, 내려가는 것은 악곡이라)」라는 속언(俗諺)이 있었다. 음곡(音曲)은 쿄토(京都)를 중심으로 하는 카미가타(上方)로부터 동쪽으로 내려가 전파되는 것이 상식이었던 데에 반해, 병법은 토고쿠(東国)에서 카미가타로 올라가 전파되는 것... 이라는 의미이다.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도 그런 유행을 따라 자신의 병법을 세상에 알리고 확산시키기 위해 수도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세노카미가 탄생한 해를 알 수 없기에 이때가 몇살이었는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에이로쿠(永禄) 6년(1563)의 일이었던 듯 하다. 죠슈를 뒤로한 해에 대해서, 이렇게 불확실한 기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미노와 성 함락의 연대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나오고있기 때문인데, 어찌됐든, 이세노카미는 제자와 종자를 이끌고서 상경길에 올랐다.

 도중에 이세(伊勢)의 코쿠시(国司)인 키타바타케 토모노리(北畠具教)의 저택(미에 현의 미스기 마을, 현재의 츠 시 내부)을 찾아갔다. 

 토모노리는 원래 공경(公卿) 출신인 탓에 수도 사정에 밝아, 이세노카미에게 있어서 쿄토 정계나 사회 상황에 대한 예비 지식을 가르쳐줄 상대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토모노리를 방문한 목적 중 하나는 여기에 있었으리라 사료된다.

 또 하나는, 병법자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이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 없다. 키타바타케 토모노리의 무명(武名)을 경모하여 저택을 방문한 병법자들 중에서, 자신의 신카게류의 실력을 시험할만한 상대를 추천받았을 것이다.

 토모노리는, 자신과 같은 신토류(新当流) 수련자로는 오키나이 유일(五畿内随一)이라 칭송받고있던 야규 세키슈사이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병법에 있어서 세키슈사이와 교류를 맺고있던 호조인 인에이(宝蔵院胤栄)에게 소개를 맡겼다.

 호조인(宝蔵院)은 남도(南都) 코후쿠지(興福寺)의 탓츄(塔頭) 중 하나로, 주지인 인에이는 승려였으면서도 창술(槍術)에 뛰어났다. 이를 다행이라 여기고 이세노카미는 나라(奈良)로 가서 호조인의 손님 신분이 되었다.

 멀리 죠슈(上州)에서 찾아온 병법자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가 머물고있음을 알게된 세키슈사이는 대단한 관심을 가져 야규 마을에서 달려왔고, 예를 다하여 상대해주었다. 3일간 단 세 번 검을 겨루었다 한다. 세키슈사이는 이 세 번의 대련에서 모두 패해 즉각 이세노카미에게 입문한다.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와 야규 세키슈사이의 이 만남이, 훗날 신카게류 병법을 토쿠가와 쇼군(徳川将軍) 가문의 유의(流儀)... 이른바「천하의 검(天下の剣)」으로 정해진 인연(縁)이 된 것이다.

 일찍이, 야규 마을에서 신카게류를 세키슈사이에게 가르치게 된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는, 익년인 에이로쿠 7년(1564)에 이 여행의 목적이었던 상경을 하게 된다.

 이후, 쿄토와 야규 사이를 자주 왕래하던 중에 가르침을 계속 이어갔던 이세노카미는, 결국 세키슈사이에게 인가(印可)를 내려주었다.

 인가라는 것은 불교 용어지만, 무도(武道)에서는 유의의 극의(極儀)를 깨달은 자에게 전수하는 최고의 면허장이었기에, 이를 얻은 신카게류 병법은 야마토 야규 가문에서 명실공히 전해지게 되었다. 때는 에이로쿠 8년(1565)... 세키슈사이가 서른일곱살 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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