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382017.03.31 PM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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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장 또 하나의 야규(柳生) 가문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와 신카게류(新陰流)

 

 

◎ 두 야규(柳生) 가문「불화(不和)」설의 배경

~ 오와리 야규(尾張柳生) 가문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뤄지는 이야깃거리는, 에도 야규(江戸柳生) 가문과의 관계이다. 에도시대(江戸時代)의 두 가문 사이에서 특별히 소요 사태(騒擾沙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 관계에 대해「불화(不和)」「사이가 나쁘다」라는 식의 말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조사해보면, 두 가문간의 교류가 거의 전해지지 않는 것은 확실하다. 그 몰교섭에 가까운 관계가 증폭되어, 적대 관계, 냉전 관계 운운하는 경우도 있는데, 원인으로 당시에 억측되던 사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세키슈사이(石舟斎)의 장남인 요시카츠(厳勝)의 차녀로, 초혼 상대(이가의 야마자키 소자에몬이라 한다)와의 사이가 좋지 않은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효고노스케 토시토시(兵庫助利厳)의 누이동생이자, 무네노리(宗矩)에게는 조카딸이었다. 무네노리는 이 조카딸을 야규 가문의 당주라는 입장에서 친가에서 떠맡아 야규 가문의 로쇼쿠(老職)인 사노 슈메(佐野主馬: 후에 야규 성을 하사받는다)라는 자에게 재가시켰는데,『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서, 이 슈메는「조선인 출신(원문은 朝鮮国の種也)」이라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동서는 그때문에 토시토시가 분노하여「무네노리 공과 절교하였으며, 현재(이 책이 저술된 호레키 3년 = 1753 무렵을 가르킨다)에도 에도 야규와 오와리 야규 두 가문은 사이가 좋지 않다」고 기록하며, 적어도 에도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두 가문이 절교 상태였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무네노리는 토시토시에게 끊임 없이 조카딸의 혼담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듯 하다. 하지만, 젊었을 때라면 몰라도, 선(禅)을 갈고 닦아 인격이 원만해졌을 토시토시가 이런 일로 숙부인 무네노리가 한 짓에 대해, 교류를 끊을 정도로 화를 낼 필요가 있었을까? 

 필자는 여기에 또 다른 설을 주장하고 싶다.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 가문에 대한 대항 의식이, 두 야규 가문의 관계에 미묘한 영향을 끼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칸에이(寛永) 10년(1633) 9월부터 11월에 걸쳐, 쇼군(将軍) 이에미츠(家光)는 병세가 깊어졌고, 한때는 위중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풍문을 접한 토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는 에도로 서둘러 갔지만, 오다와라(小田原)에 이르렀을 때, 이에미츠가 쾌유됐다는 보고를 받았기에 조용히 에도 저택에 들어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이에미츠는 요시나오가 윗선의 명령을 어기고 무단으로 출부(出府)한 것을 수상히 여겨, 사카이 타다카츠(酒井忠勝)로 하여금 의도를 묻게 했다. 요시나오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쇼군께서 위중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온 데에는, 별다른 뜻은 없소. 아직 후계자가 없는 몸이신지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사변이 일어나고 나아가서는 신군(神君: 이에야스)께서 이루신 대업(大業)이 무(無)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럴 경우엔 토쿠가와 카바네(姓)를 쓰는 이들의 수장인 내가 잠깐동안이나마 국사(国事)를 감독하지 않으면 아니 되오. 이러한 마음으로 서둘러 달려왔소」


 논리정연한 요시나오의 말에, 이에미츠가 재심문하지는 않았다. 

 요시나오는 이에미츠보다 네살 연상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에미츠는 이에야스의 손자이고 자신은 친자식이라는 의식이 있었던 데다, 오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여 전장을 경험했다고 하는 자부심도 있었다. 고산케(御三家) 중 가장 큰 한(藩)의 주인으로서, 토쿠가와의 천하의 존망이 위기에 몰렸을 때에, 솔선하여 여기에 대처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이런 자부심의 반증이나 다름 없다. 그점이 이 이후에도 이에미츠가 그를 경계한 원인이 되었다.  

 익년(칸에이 11년)에 이에미츠가 상경했을 때의 일이다.「다이카와리(代替り: 쇼군의 대가 바뀜)」를 천하에 과시하기 위한 이 상경은 총세 30만 7천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행차로, 후다이(譜代)와 토자마(外様) 다이묘 대부분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에미츠는 6월 20일에 에도를 출발하여 상경하였으며, 8월 5일에 쿄를 떠났는데, 돌아오는 길에 나고야에 들렸다 가려다 얼마 안 가 예정을 변경해 그대로 에도로 돌아가버렸다(8월 20일 도착). 

 이에미츠의 이러한 변덕에 격노한 것은 다름 아닌 요시나오였다. 몇일간에 걸쳐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헛수고로 만들어버린 것은, 온 천하의 평판에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체면을 잃게 한 것이라며 요시나오는 분개했다고 한다. 

 이는 분노에만 그치지 않고 키슈(紀州) 와카야마 한(和歌山藩)의 한조(藩祖)인 요리노부(頼信: 이에야스의 열번째 아들)에게「이렇게 된 이상 농성이라도 하겠다」라는 말까지 꺼냈다고도 한다. 이에미츠에 대한 요시나오의 반발은, 요리노부의 끈질긴 충고에 아무 일 없이 수습되긴 했지만, 그러한 풍문은 이에미츠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보는 사가(史家)도 적지 않다. 

 또 있다.

 칸에이 19년(1642) 2월, 이에미츠의 후계자(훗날의 4대 쇼군 이에츠나)가 에도 성의 진수사(鎮守社)인 산노샤(山王社)에 첫 참배를 하게 되었을 때, 요시나오 등 고산케의 당주들도 수행하라는 취지의 명령서가 전달되었다. 여기에 요시나오는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이에미츠의 명령을 전하러 온 사카이 타다카츠와 마츠다이라 노부츠나(松平信綱)에게「관직도 없는 이를 관직을 가진 사람이 수행한 선례는 없소. 다이나곤(大納言)으로 임명된 내가 수행하는 것이, 있을 법한 일이오?」라고 답하는 요시나오를 두 사람은 열심히 설득하였으나,「아들바보라는 식의 경멸을 쇼군께서 받으시는 게 견딜 수 없다 이 말이오」라며 거절, 결국 고산케의 당주들이 먼저 참배를 하는 형태로 이에츠나(家綱)를 보필하는 식을 취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에미츠에 대한 요시나오의 대항 의식은 이 정도로 왕성했던지라, 한조 요시나오의 긍지는 아주 멋 훗날에까지 한의 풍조로 침투해 갔다.

 주군 가문의 그러한 부자연스런 관계가, 각 가문을 모시던 두 야규 가문의 교류를 소원하게 만든 배경이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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