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진설(真説) 야규 일족(柳生一族) #432017.04.07 PM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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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이후의 야규 일족(柳生一族)

 

 

◎ 야규 무네후유(柳生宗冬)의「사람(人)」과「검(剣)」

~「에도 야규(江戸柳生)」의 보다이지(菩提寺)인 엔만산 코토쿠지(円満山広徳寺)는, 원래 호죠 우지마사(北条氏政)의 차남이자 이와츠키 성(岩槻城: 사이타마 시 이와츠키 구)의 성주인 오오타 우지후사(太田氏房)가 소운지(早雲寺)의 시인(子院)으로서 소슈(相州) 오다와라(小田原)에서 연 선사(禅寺)였는데, 텐쇼(天正) 18년(1590)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 함락으로 소실, 이것을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江戸) 칸다(神田)에서 재흥시킨 것이 분로쿠(文禄) 2년(1593)의 일이었다. 시타야(下谷)로 옮겨진 것은 이에미츠(家光)의 치세 때인 칸에이(寛永) 12년(1635)으로, 지금의 타이토 구(台東区) 히가시우에노(東上野) 4쵸메 5번지 근처에 있는 것으로 대략 290년 정도 되었는데, 제 2장에서 다뤘던대로, 칸토 대지진으로 사역(寺域)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묘지가 타이쇼(大正) 14년(1925)부터 현재의 코토쿠지 별원(別院)이 있는 땅인 네리마 구(練馬区) 사쿠라다이(桜台)로 이장되었다. 

 이 사찰에는 야규 종가(柳生宗家) 역대를 포함한 야규 가문의 묘가 이십여기(基)가 모셔져 있는데, 이장이 한창이던 쇼와(昭和) 2년(1927) 6월,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의 셋째 아들인 무네후유(宗冬)의 묘에서 발굴된 부장품 중 하나가 당시 화제가 되었다. 

 바로 의치(入れ歯)였다. 

 지하 깊숙한 곳에 매장되어 있던 독(瓶)에는 와키자시(脇差)나 인롱(印籠), 담뱃대, 빗, 방울, 또 다기(茶器)나 쵸코(猪口: 회나 초친 음식을 담는 잔 모양의 작은 접시) 등이 함께 매납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 의치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탈착식으로 된 상하가 붙은 틀니(総義歯)로, 쇼(床: 부착하는 부분으로 속된 말로 "턱"이라 부르는 부분)는 빗 등을 만들 때 사용되는 목재인 회양목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앞니는 납석(蝋石), 어금니에는 못 등이 사용되어 있다.

 의치(義歯) 중에서도 오늘날에 말하는 브릿지와 비슷한 것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틀니는「근세 치과의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우는 프랑스인 의사인 피에르 포샤르(Pierre Fauchard: 1678~1761)가 1728년에 현대의 의치와 가까운 것을 제작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다. 야규 무네후유가 죽은 해는 1675년(엔포 3년)이기 때문에, 그보다 반세기 정도 전에 일본에서 틀니가 탄생했다는 뜻이 된다.

 소재만 제외하면, 그 의치의 구조는 현대의 그것과 지극히 가까워 당시의 치의학계의 주목을 모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소견이 학자들의 논문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세계 최초의 상하 구조의 틀니라 해야할 법한 무네후유의 그것을 테마로 한 연구는 그 이후에도 끊임이 없었으며, 백과 사전의「의치(入れ歯)」항목에서도 이를 다루고 있지 않는 경우가 없을 정도다. 이 의치를 만든 것은, 무네후유가 죽기 3년 전인 만지(万治) 원년(1648)에 에도 코지마치(麹町)에 구중 치료(口中治療)를 개업한 구과의(口科医) 오노 겐뉴(小野玄入)가 아닐까 하는 추고(推考)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 의치는 실제로 사용된 흔적은 없으며, 흑갈색 광택을 띄고 있다. 고미 야스스케(五味康祐)의 장편 소설『柳生武芸帳(야규 무예장)』에서는, 무네후유가 여성으로 변장하기 위해 오노 겐뉴에게 만들어 달라 부탁했다고 묘사되어 있어, 이것도 꽤 화제가 되었다. 

 무네노리에게서 시작되어 쥬베에(十兵衛)에게 계승된 야규 가문의 3대째인 마타쥬로 무네후유(又十郎宗冬)라 하면, 이「문화재(文化財)」를 후세에 남긴 것을 흔히 거론하고 있는데,『玉栄拾遺(교쿠에이슈이)』에 따르면, 겐나(元和) 원년(1615)에 야규 고(柳生郷)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부친인 무네노리가 2대째 쇼군(将軍)인 토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를 모시며 아직 3천석을 받는 하타모토(旗本)였던 시절이다. 

 3대 쇼군 이에미츠(家光)의 치세가 되고, 열네살 때인 칸에이 5년(1628)에 코쇼(小姓)로서 출사한 무네후유는,「적취병(積聚の病: 적병)」이 있어 검술을 배우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즉 울화병을 가졌었다. 

 호방한 성격의 큰형 쥬베에, 천재적 소질을 지닌 둘째 형 토모노리(友矩: 무네후유에게 있어서 이복형)... 둘 중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았던 신경질적이고 창백한 소년이라는 인상이 떠오르는 무네후유가 작심하고 가예(家芸)인 병법을 연마하기로 뜻을 둔 것은, 열여덟살 때(칸에이 9년)였다. 

 그 해 모일, 도이 토시카츠(土井利勝: 훗날의 타이로)의 저택에서 키타 시치다유 나가요시(喜多七太夫長能)의 사루가쿠(猿楽)의 묘기를 접하게 되면서 눈이 번쩍 뜨인 것이다. 쇼인반(書院番)으로 뽑혀 3백석을 영유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일 것이다.

 세월이 흘러 쇼호(正保) 3년(1646)에 무네노리가 세상을 떠났다. 무네후유가 서른두살 때의 일이다. 이때, 부친이 남긴 영지 중에서 4천석을 상속받게 되는데, 4년 후인 케이안(慶安) 3년(1649)에 큰형인 쥬베에가 급사하자, 그의 남은 재산인 8300석을 계승한 것을 대신해서 4천석은 공수(公収)되었다. 이윽고 마흔두살때인 메이레키(明暦) 2년에 4대째 쇼군인 이에츠나(家綱)로부터 기청문(起請文)을 받아 그의 병법 사범이 되었으며, 익년에는 종 5위하 히다노카미(飛騨守)로 서임되었다. 

 무네후유는 오와리 야규(尾張柳生)의 당주인 렌야(連也)보다 열살 연상이었기에 렌야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렌야와 관련된 일화는 다수 전해지고 있지만,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간 무네후유에게는 그런 것이 적다. 만년에 연못가를 산책하고 있었을 때, 연못 속의 장구 벌레의 움직임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류인(柳陰)」이라는 호를 붙였다는 이야기는 그와 관련된 얼마 안 되는 일화 중 하나이다. 

 4대 쇼군 이에츠나의 병법사범이자, 훗날 5대 쇼군 츠나요시(綱吉)로부터 입문하겠다는 기청문을 받은 무네후유의 전서(伝書)로는, 부친인 무네노리, 형인 토모노리(사몬), 타쿠안(沢庵) 등의 가르침을 어수선하게 기록한『兵法聞書(헤이호키키가키)』가 있으며, 또, 신카게류에 대한 견해는, 무네노리의 수제자인 쇼다 키자에몬 소신(庄田喜左衛門宗心)이 정리한『宗冬兵法物語(무네후유 헤이호모노가타리)』에서 나타내고 있다. 

 야규 가문이 다이묘(大名)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네후유가 정력적으로 쇼군을 보필한 것을 평가받았기 때문이나 다름 없다. 칸분(寛文) 8년(1668), 야마토(大和)에서 1700석을 가증받아서 옛 영지와 합쳐 1만석의 다이묘가 되었으며, 이후에 야규 한(柳生藩)이라는 작은 한을 가문의 역대 당주들이 영유하게 된다. 

 그런데, 무네후유의 작은형인 토모노리는 스물일곱살 때 야규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무네후유는 병법에 있어서는 토모노리를 존경하고 있었던 듯 하다.『헤이호키키가키』에「兄左門云(형님이신 사몬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는 식으로 신카게류의 다양한 교리(教理)에 대해 토모노리의 견해를 첨부해 두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동서에 쥬베에의 가르침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쥬베에가 오랜세월 야규에 틀어박혀 있었고, 직후에 그것을 부탁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토모노리가 죽은 뒤, 무네후유는 그의 보제(菩提)를 모시기 위해 그가 남긴 영지 내의 야마시로노쿠니(山城国) 미나미오오카와라 무라(南大河原村: 쿄토 부 미나미야마시로 무라)에 쥬린지(十輪寺)라는 한 채의 당(堂)을 세웠다. 또, 이 땅에 있는 코이시다니 진쟈(恋志谷神社)의 토리이(鳥居)는, 무네노리가 죽은 다음해(쇼호 4년)에 이 땅을 나눠받은 무네후유가 기부한 것인데, 죽은 토모노리에 대한 마음도 거기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다이고 텐노(後醍醐天皇)의 소실이었던 코이시다니히메(恋志谷姫)를 모시는 이 진쟈는, 텐만구우(天満宮)와 합사(合祀)되어 있어, 현지에서는「텐진 씨(天神さん)」라며 친근하게 불리우고 있다. 

 무네후유는 신심이 극진한 사람이었던 듯 하다. 오늘날, 야규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야규 야사카 진쟈(柳生八坂神社: 나라 시 야규 마치)에 참배하는 것이리라. 옛날에는 시노미야 다이묘진(四之宮大明神)이라 불리우는 진쟈로, 카스가 타이샤(春日大社)의 제 4전(第四殿)에 진좌(鎮座)하는 히메가미(比売神)를 제신(祭神)으로 삼고있다. 세월이 흘러 죠오(承応) 3년(1654), 야규 씨가 다이묘로 복귀하기 이전의 일인데, 무네후유가 오오보(大保)라는 곳에 있는 야사카 진쟈의 제신인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嗚尊)를 분령(分霊)하여 개칭된 진쟈이다. 

 그가 죽은 것은 엔포(延宝) 3년(1675)이다. 그해 4월부터 부친과 같은「암」을 앓기 시작한 무네후유의 곁에는 신카게류를 수련한 로츄(老中) 쿠제 히로유키(久世広之), 와카토시요리(若年寄)인 도이 토시후사(土井利房)들의 병문안이 있었는데, 9월 29일 술시(오후 8시가 경과했을 때), 수많은 제자와 친족들이 지켜보던 중에 예순한살의 생애를 마감했다. 

 모두에서 말한 코토쿠지(広徳寺)로 이장된 것은 10월 1일의 일로, 유언에 따라 화장되었다고『교쿠에이슈이』에 기록되어 있다. 동서에는, 제자, 가족들에게 나눠줄 유품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데, 의치는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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