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062017.07.01 PM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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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에도시대(江戸時代)까지 정좌(正座)라는 관습은 없었다

~ 정좌(正座)라는 관습이 보급된 것은, 빨라도 에도시대(江戸時代) 말기에서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이후라는 말인데, 원래 에도시대까지 정좌라는 관습은 없었다. 

 정좌를 한 것은 오시라스(御白洲: 에도시대에 죄인을 문초하던 곳)로 끌려 나온 죄인들 뿐으로, 실은 가부좌나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게 정식으로 행하는 앉는 방법이었다. 가부좌라고는 해도, 현대풍의 가부좌가 아니라, 양 무릎을 크게 좌우로 벌려서 발바닥을 밀착시키는 방식이다(이렇게 앉는 방식은 어릴 때부터 길들이지 않으면 하기 어려웠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의 무사(武士)나 부인의 초상화에도 정좌한 모습이 묘사된 게 존재하지 않는다. 토쿠가와(徳川) 가문의 역대 쇼군(将軍)들의 초상화는 인터넷에서 간단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알기 어렵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누이동생인 오이치노카타(お市の方)의 초상화를 확인해 볼 생각으로 살펴 보면, 그런식으로 앉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좌가 정착된 것은 빨라도 메이지 중반 이후이며(1889년에 발행 된 사전『言海』에도「正座」라는 단어는 없다), 오늘날 말하는「정좌」는 사실, 에도시대 때의 가볍게 내려 앉는 방식을 가르킨다. 다도(茶道)는, 최초에는 유유자적한 장소에서 이뤄지는 교제였기 때문에「정좌」였는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격식화되어「이것이 바르게 앉는 법」이라는 의식으로 변화했다. 

 토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의 사진을 보면, 의관속대(衣冠束帯)한 정식 차림으로는 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평상복 차림을 하고있을 때에는 정좌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어째서 이러한 흐름이 되었는가 하면, 당초에는 마루방이 태반이었던 것이, 점차 타타미방에서의 생활 시간이 늘어났고, 나아가서는 방석의 보급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할 것이다. 

 원래 에도시대 중기까지는, 건강한 사람이 방석을 사용하는 관습이 없었다. 노인이나 환자들만 사용하던 것으로, 무심코 손님에게 방석을 내주거나 하면,「나를 늙은이 취급하는건가!」라며 화를 내게 만드는... 무례한 행위이기도 했다. 

 실제로, 마루방에서 장시간에 걸쳐 앉아있는 데에는 어릴 때부터 훈련받아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정좌한 자세가 가장 편안하며, 다리저림도 없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손님에게 방석을 내어준다거나, 아직 보급되지 않은「정좌」라는 말(카이바라 에키켄이 사용하긴 했지만 일반화되지는 못 했다)을 사용하고 있는 시대극이 시대고증에 상당히 철저한 작가의 작품에도 등장한 채로 보여지곤 한다.

 또, 본서의 공동저자인 나가노 슌야(長野峻也) 씨가「예법(礼法)의 움직임은 전술을 감추고 있어서, 예의(礼儀)에 적합한 움직임 중에 상대가 갑자기 공격해 올 경우를 상정하여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부케(武家)의 자녀에게도 적용된다.

 예를 들자면, 부케의 자녀는 손님의 방문이나 주인이 돌아갈 때에, 고개 숙여 인사하지 않았다. 상대를 깊이 존경하는 인간관계일 경우, 좀 더 깊게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숙이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고개를 전혀 숙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는 것은, 고개를 깊게 숙이면 마게(髷)의 형태가 망가지기 때문에, 이를 싫어한 요시와라(吉原)의 유녀(遊女)가 시작한 "中途半端なお辞儀(어중간한 인사)"가 기원이다. 부케의 자녀는,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인사했다. 

 이는, 어느 하타모토(旗本) 가문 출신인 분에게서 배운 작법인데, 손님에게 얼굴을 보일 때에, 바닥에 앉아서 두 손으로 맹장지를 열어서 인사하면서 들어오는 장면이 TV 시대극 같은 데에서 빈번하게 보이는데,「저건 상인들의 인사법이야. 부케에서는 저런식으로 하면 안 돼」라는 것이었다.

「부케에서는, 아주 약간... 손톱 끝이 들어갈 정도까지만 선 채로 문을 열고, 언제라도 빠져나갈 수 있게 품 안에 검을 뽑을 수 있도록 한 손은 칼과 가까이 하면서, 맹장지는 발로 열고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사례긴 하지만, 그러한 가문이 있었다 해도, 마음가짐으로서 항상 전투를 염두해 둔 부케라면 이상할 게 없다.

 부케의 저택이 표례(表礼)를 절대로 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같은 이유에서이다. 어디에 누가 살고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표례를 하다간 언제 적에게 습격받을지 안심할 수 없다.

 태평한 세상이 이어지면서 "불시의 습격"이 탁상공론화가 되었다고는 해도, 부케 저택에 있어서는 센고쿠시대(戦国時代)의 풍습이 답습(踏襲)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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