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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번역] 시대극의 오류 찾기 #192017.07.21 PM 02:59
제 01장 -사람에 관한 거짓과 진실
◎ 오니와반(御庭番)이「그림자적인 존재」가 아닌 시기가 있었다
~ 앞 항목까지가 오니와반(御庭番)의 결성 초기로, 오니와반의 활동 내용은, 당시까지의 이가모노(伊賀者) 같은 닌쟈(忍者)들의 활동과 큰 차이가 없다.
음지에서 음지로, 사람들이 모르게「그림자(影)」로서 행동하면서, 때로는 정찰, 때로는 암살에도 손을 대는... 이것이 센고쿠시대(戦国時代)까지의 닌쟈의 이미지로, 결성 초기의 오니와반도 그 전신인 쿠스리코메야쿠(薬込役)도 그러했겠지만, 라이벌인 오와리 토쿠가와(尾張徳川) 가문이 약체화 하여, 토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정권이 반석에 오름에 따라서 오니와반 조직은 변질되어 갔다.
「그림자」같은 존재였던 것이, 각각 하타모토(旗本)로서 출세하여 제대로 된 저택을 갖출 것을 허락받음과 동시에, 주된 임무도 바뀌었다.
요시무네에게 있어서의「적(敵)」은 라이벌인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도, 유력한 토자마 다이묘(外様大名)도 아닌, 기근(飢饉)이라던가 풍수해(風水害) 같은 자연으로 변해갔다. 요시무네 시대의 다이묘 개역(改易)은, 대부분이 무시 단절(無嗣断絶)... 즉, 상속자가 없었던 것에 의한 것이지 모반 혐의가 있다거나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었다.
에도시대(江戸時代)에는「4대 기근」이라 일컬어지는 기근이 일어났다. 최초가 이에미츠(家光) 시대인 칸에이 대기근(寛永の飢饉: 1642), 그 다음이 요시무네 시대인 쿄호 대기근(享保の大飢饉: 1732), 그 다음이 4대 기근 중에서 최대의 피해를 낸 텐메이 대기근(天明の大飢饉: 1781~89), 또 텐포 대기근(天保の大飢饉: 1833~37)이다.
칸에이 기근 이외에도 겐나 기근(元和の飢饉: 1615), 엔포 기근(延宝の飢饉: 1674), 겐로쿠 기근(元禄の飢饉: 1695) 같은 중소 규모의 기근도 일어났으며, 그러한 일들을 염두해 두고, 요시무네는 오니와반들에게 온미츠 업무(隠密任務)와 병행하여 전국 각지의 구황 작물(救荒作物) 수집에도 종사시켰다.
특히, 그런 임무에서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긴 이가 야부타 죠하치(薮田定八) 휘하에 있던 우에무라 사헤이지(植村左平次)로, 우에무라 가문은 대대로 코마바야쿠엔(駒場薬園)의 엔칸(園監)을 맡고 있었다. 우에무라의 봉록(俸禄)은 100섬 3인 후치(扶持)로, 하타모토로는 최저 레벨이었기 때문에, 그보다 상위에 있는 오니와반들은 200섬 정도는 봉록을 받고있었으리라 여겨진다(표면적으로는 30섬 2인 후치).
그런데, 본격적인 기근이 일어나자 오니와반 겸임으로는 도무지 손 쓸 수가 없어서, 요시무네는 오니와반에게 그 방면에 수완이 있는 민간인을 발굴해서 등용하라는 스카웃 업무도 맡겼다. 이 과정에서 등용된 것이 아오키 콘요(青木昆陽), 노로 겐죠(野呂元丈), 타나카 큐구(田中丘隅), 이자와 야소베에(井澤弥惣平衛) 같은 백성들로, 최종적으로 하타모토로까지 발탁된 자가 많았다.
또, 요시무네는 금지 종교였던 크리스트교 이외의 문헌을 다수 수입하여, 위기 타개 대책으로 여러 외국의 지혜를 얻으려 했다.『解体新書(해체신서)』의 번역, 일본 최초의 천문대 창설 등은,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
요시무네 자신도 공부에 열심히였기에, 일본 최초의 기상예보사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날씨 예측에 관한 조예가 깊었다.
구황 작물, 약용 작물 도입 재배와 병행하여 미누마(見沼) 간척, 인바누마(印旛沼) 간척, 토네가와(利根川)의 동천(東遷: 당시의 토네가와는 오늘날처럼 쵸시 방면이 아니라, 에도 만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아라카와와 합류하는지라 홍수 범람이 잦았다) 같은 대규모 수목 공사도 행했다.
토네가와 동천 사업은 토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시절부터 행했던 일이지만, 요시무네 시대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본격화하였으며, 신덴 개발과 함께 치러졌다.
이것은, 농경지의 면적을 늘리는 것으로 연공 수입을 늘리는 것과, 소규모 기근이 일어날 때마다 발생하는 난민을 공사에 투입시키는 것으로 인해 일자리를 주어 구제한다고 하는... 요시무네나 그 후계자인 타누마 오키츠구(田沼意次)가 좋아라 하며 준비한 일석이조의 정책이었다.
요시무네가 취한 쿄호 개혁의 해설서를 읽어 보면, 연공의 취입 방식을 케미호(検見法)에서 죠멘호(定免法)로 변경하는 것에 의해 세율이 극심해진 것 처럼 쓰여진 게 많은데, 이는 착각으로, 죠멘호 쪽이 세율은 낮았으며, 죠멘호 쪽이 연공 계산에 관여하는 역인(役人)들의 숫자를 줄여 다방면으로 돌리는 게 가능했기 때문에 합리적인 것이다.
케미호 → 죠멘호의 변경으로 백성의 부담이 늘어나 봉기가 늘었다는 식으로 쓰여있는 책도 있는데, 에도시대를 통틀어 3000번 이상이나 일어난 백성 봉기가 쿄호 연간에만 늘어난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시기 동안은 적었을 정도다.
요시무네는 위와 같은 기근 대책을 실시함과 동시에, 이에미츠 시대부터 츠나요시 시대에 걸친 방만한 치세를, 쿄호 개혁에 의해 바로 잡은 것으로, 거의 비어있다시피 한 에도 성 금고에 수만 량이나 저축할 수 있을 정도로까지 성공시켰는데, 그 태반을 이 쿄호의 기근으로 난민 구제를 위해 내놓기까지 했다. 당시의 기근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상케 한다.
에도시대 후기가 되면서, 오니와반은「외무 관료(外務官僚)」로서 투입되어 갔다.
요시무네 시대부터 러시아가 극동 방면으로 진출하게 되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여러 외국까지 일본 근해로 오게 되었는데, 당초에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는 러시아였다.
니혼카이(日本海: 한국에서의 동해) 방면의 방위는 각 다이묘 가문에 맡겨두었지만, 이걸로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생각한 오니와반 조직은 로츄(老中) 등으로부터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니혼카이 방면의 밀무역을 적극적으로 적발하였으며, 해당 지역의 다이묘를 힐책, 고료(御料)로서 몰수, 그곳을 지배하는 부교로서 투입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필해야 할 이는 초대 니이가타 부교(新潟奉行: 당시에는 니이가타가 일본 최대의 무역항이었다)로서 파견된 카와무라 나가타카(川村修就)와, 하코네 부교(箱根奉行: 마츠마에 부교)가 된 무라가키 사다유키(村垣定行)이다.
이 두 사람은 온미츠로서도 상당히 유능했는데, 부교가 된 이후의 활약은 더더욱 빛이 났다.
카와무라는 텟포(鉄砲), 대포의 명수로서 알려져있는데, 니이가타로 부임하자마자 당지의 방위체제의 빈약함에 격노하여 막각(幕閣)에 니이가타 포대 설치를 건의했다. 그런데, 이 때의 로츄들의 수장은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로, 텐포 개혁 도중이었다는 것과, 대기근으로 재정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그런 데에 쓸 예산은 없다!」며 쌀쌀맞게 각하했다.
그래서 카와무라가 어찌했는가 하면, 사비로(물론 다른 오니와반도 협력해주었을테지만) 니이가타에 포대를 설치한 데다,「앞바다 전망이 지나치게 좋다」는 이유로, 당시까지는 톳토리(鳥取)와 비슷한 사구지대(砂丘地帯)였던 연안에 3만 6천 그루나 되는 흑송(黒松)을 심어, 이곳을 곡창지대로 바꿔버린 것이다. 현재, 니이가타 시(新潟市) 내에 있는 서해안 공원에는 카와무라의 위업을 예찬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 후에 카와무라가 오오사카 마치부교(大阪町奉行), 나가사키 부교(長崎奉行)로 전전하면서 여러 외국이나, 토막(討幕)에 매달리려 하던 사이고쿠(西国)의 유력 다이묘의 동정에 눈을 돌렸다는 것만 보더라도, 오니와반이 단순한「온미츠 닌쟈」가 아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또, 무라가키 사다유키는 수많은 오니와반들 중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원국어용(遠国御用: 토자마 다이묘의 영지 등에 잠입하여 온미츠 임무를 완수한 것)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어학(語学)의 달인으로도 유명하다. 잠입처의 사투리를 귀로 한 번 듣고도 바로 써먹을 수 있지 않을 경우 온미츠 임무를 완수하지 않으려 했을 정도였다.
이 무라가키가 수하로 부린 사람들 중에 마미야 린조(間宮林蔵)가 있다. 마미야는 오니와반 가문 출신이 아니라, 스카웃되어 온미츠가 된 자였다. 마미야도 어학의 달인이라, 재빠르게 아이누(アイヌ) 말을 배워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무라가키는 러시아나 중국(청나라)의 동정을 정탐하기 위해「일본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라는 국법을 무릅쓰고 카라후토(樺太)부터 러시아 연해주의 흑룡강(黒竜江) 방면으로 마미야를 파견,『東韃地方紀行(토다츠 지방 기행)』이라는 보고서를 제출시켰다.
마미야가 마치 독단으로 실행한 모험처럼 쓰여있는 책도 있지만, 상사인 무라가키의 재량이 없었더라면 허가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며, 원정 자금도 내주었을 리가 없다. 그 후의 무라가키는 마미야의 파견에 관련해 막각으로부터 질타를 받기는 커녕, 칸죠 부교(勘定奉行)로까지 승진했다가 그 생애를 마감했다.
에도시대 말기가 되면서, 오니와반 조직은 로츄 등의 막각들의 머리 굳은 짓에 진절머리가 나서 바쿠후의 운명이 걸릴 정도의 중대사안에도 독자적인 분석력과 판단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센고쿠시대의... 어디까지나「그림자」에 철저했던 닌쟈들의 흔적의... 편린마저 사라져 있었다.
무라가키의 적손이 미일 우호 통상 조약의 수석 사신으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상황을 정찰하고 다닌 무라가키 노리마사(村垣範正)로, 카와무라 나가타카의 의조카에 해당한다.
카와무라도 무라가키 일가도, 그 외의 다른 오니와반 가문도 보신 전쟁(戊辰戦争)에 의해 바쿠후가 붕괴된 뒤에 메이지 신정부를 받든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의약품을 제조 판매하는 제약업으로 전업한「그 후」가 너무나도 닌쟈답다면 닌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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