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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일본의 일왕제와 관련한 이야기들2019.05.09 AM 05:17
한 일주일 전 쯤인가 여기 뉴스에 달린 댓글들을 보니 옆나라 일왕제가 동북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잘 모르는 댓글들이 보인데다, 그런 댓글들이 하나같이 '그렇다면 정리를 좀 해달라'는 식으로 나와서 한번 정리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간략하게 적어보려 합니다. 저도 글을 풀어놓기야 했지만 틀린 것이 분명 있을테니, 댓글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지난 메이데이에 옆나라가 '헤이세이(平成, 아키히토 일왕)' 시대를 마치고 '레이와(令和, 나루히토 일왕)' 시대를 시작했죠.
작년 초에 봤던 기억으로는, 원래 일왕 선위는 금년 2월 28일에 있을 예정이라고 들었으나 연호 발표일인 4월 1일을 조금 앞두고는 최종적으로 5월 1일이 됐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여러 곳에서 본 합당한 이유가 있었네요.
(이번 메이데이에도 선위만 받았고, 실제 제례를 갖춘 즉위식은 10월 22일에 예정되어있다 합니다.)
A. 가장 간단한 이유로는 제례 때문. 퇴위 전 곳곳의 사직묘들을 돌면서 형식적인 제례를 올리는 이유로 실제 선위 일자가 조금 늦춰짐.
B.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진짜로 선위를 한다 만다'를 두고 궁내청(일왕 측)과 내각(총리대신 중심) 사이에 신경전이 계속되고 있었으나, 결국 궁내청이 내각의 꾀(특별법을 통한 선위)에 항복함으로서 일정이 조금 미뤄짐.
C. 이미 나루히토 일왕으로 후위가 꽤 오래 전에 확정되었으나, 내각 측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아키시노노미야(후미히토) 친왕을 옹립할 것을 지속적으로 주장함. 일왕의 의지로 완강하게 거부의사를 못박는 데 시간이 좀 걸림.
D. 이미 정해질 건 다 정해졌으나 연호를 정하는 데 시간이 살짝 걸렸고, 서력 뿐만 아니라 연호병기까지 같이 하는 일본의 사정상 날자표기 전자시스템의 안정적인 변경을 위해 연휴 한가운데로 최종 낙점.
이런 네 가지 이유가 있었구요. 이제 아래에서는 뉴스에 댓글을 썼던, 왜 이런 일이 일어난 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뭔가를 좀 적어보고자 합니다.
설명을 하려고 일부러 풀어서 쓰는 것이니 만큼, 이런 데서도 댓글에 '세줄 요약 좀' 같은 말이 붙으면 많이 서운할 것 같습니다.
1. 아키히토 일왕이 선위를 한 이유
일왕(천황)제는 입헌군주제로 정치 관여가 불가하며, 기본적으로 왕정의 형태를 따르다보니 종신제입니다.
여태까지의 일왕사를 조금 훑어보면, 후위가 있더라도 선위를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보니 이번 선위 자체도 나름 신선(?)한 걸로 여겨지는 편입니다.
아키히토 현 상왕 역시 세기말 정도까지만 해도 선위를 할 의사가 그리 크진 않았습니다. 다만 본인의 몸이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보니, 후사를 미리 잘 챙겨두긴 했었습니다.
일단 뒷 얘기를 하기 전에 간단히 짚고 넘어가면, 일본의 총리 선출 절차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원내 다수당의 총재 혹은 선출대표가 총리대신 직을 겸한다'를 골자로 합니다.
일본 역시 영국처럼 양원제(영국 귀족원/평민원, 일본 참의원/중의원)를 채택하고 있으나, 원내 당 구성은 양원 모두 비슷합니다.
형식적으로 총리대신이 임명될 때는 영국이나 일본 모두 입헌군주제 상의 군주(여왕/일왕)에게서 '내각총리대신(영국은 '영연방 영국령 내각총괄총리') 임명칙서'를 받습니다.
아베 내각 1기가 출범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베 신조, 조슈 번 후기의 유명한 정외론(征外論) 인사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이런 간단한 이력을 일왕이 모를 리가 없겠죠.
원체 야망이 큰 걸로 알려진 아베 신조가 평당원에서부터 차곡차곡 커리어를 쌓아 자유민주당(자민당) 총재에까지 올랐고, 전통적으로 원내 다수당을 점하기 수월한 보수당이다보니 총리대신이 되는 건 당연지사였습니다.
그런 아베가 총리가 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기자회견에서 밝힌 말 중 가장 일왕을 자극한 건 '일본은 약하다' 였습니다, 정확히는 '일본은 아직 아름다움이 완성되지 않았으니, 마저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였지만요.
경제적으로 그리 엄청난 문제도 없었고, 외교적으로도 꽤나 입지를 다진 일본의 내각총리 입에서 '약하다, 아직 덜 아름답다'고 나올 만한 분야는 딱 하나, 군사 분야 뿐이었습니다.
일본의 군사 파트, 내각 방위성 산하 '자위대(육상, 해상, 항공)'는 국제조약 및 자국 헌법에 의거 정규편제 군사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실질적으로 자국 국민들에게 인식되는 자위대는 '총 들고 군복 입은 경찰' 정도입니다.
대외 분야가 아닌 오직 국방만을 위한 조직으로서, 헌법에서부터 '일체의 대외 군사활동을 금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군사 분야를 조금 들여다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군사'라는 건 나라 안에서만 굴린다고 수월하게 기틀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분야가 아닙니다. UN의 승인을 통해 해외로 파견을 나가는 경우도 포함하여, 대내외 적으로 군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규모의 경제가 같이 형성되어야 성장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군사 파트니까요. 이런 얘기가 극단적으로 커진 케이스가, 방산 분야가 비대한 미국이죠. (UN 얘기가 나왔으니 첨언하면, 자위대도 UN 승인으로 한 군데 정도 해외에 평화유지인력을 파견 중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군사 분야에서 재미를 보고 싶었던' 아베는 이 쪽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든지 군사 분야는 괜한 이유를 대가며 건드리는 게 아닙니다. 궁내청은 이미 여기에서부터 동향에 눈치를 채고 일왕에게 보고를 올리지만, 일왕이 '이미 칙서를 내줄 때부터 그럴 낌새 정도는 알고 있었다'고 이를 갈았다는 후문이 있습니다.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에 궁내청은 한동안 아무 것도 못하고 예의주시하기로 합니다.
이 후 슬로건 마저 '전후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일본'으로 정한 적도 있어서 궁내청이 열심히 부글부글 끓고 있던 가운데, 내각에서 몇몇 스캔들이 터지고 참의원 선거에서 다수당 지위를 상실하면서 내각안정의 책임을 묻는 여론에 떠밀려총리에서 물러나고 아베 1차 내각이 끝납니다.
이후 양원 다수당이라는 입지까진 흔들리지 않은 자민당에서 총재가 계속 갈리고 내각도 갈리면서 쭉 물살을 타다가, 아베 신조 2기 내각이 출범하나 이 때는 슬로건을 제외하고는 별 내용이 없으니 3기 내각에서 함께 얘기하겠습니다.
참고로 이 당시 슬로건이 그 유명한 '일본을 되찾는다(日本を取り戻す)' 입니다. 전후 평화질서를 일관적으로 유지해 온 일왕과 궁내청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게 미쳤구나' 하죠.
3기 내각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불이 붙습니다. 2기 내각에서부터도 이미 얘기가 나왔었지만, 군사 분야에서 재미를 보려면 '움직이는' 것이 필요한데 평화헌법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는 게 힘들다고 판단한 아베 내각이 개헌 카드를 꺼내고 쭉 여론을 만들던 시점입니다. 물론 일왕은 정치 참여가 불가능하니 우회적인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국내외 사회에 호소를 시작합니다. 주로 쓴 방법은, 나이 든 일왕보다는 활동이 왕성하기 마련인 왕자(후위지명 황태자)에게 대내적으로는 평화의 가치를 역설하고, 대외적으로는 지구공동체 속에서 일본의 평화적 책임을 이어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히게끔 지시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현 일왕인 왕자 역시 어릴 적부터 상왕에게 교육을 (대외적인 시각에서 봤을 때) 잘 받은 편이라, 상왕이 지시한 평화 관련 미션(?)을 잘 소화해냅니다. 그렇지만 내각이 봤을 때는 골치아픈 사항에 불과했으므로, 글 쓰기 전에 얘기한 C 파트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후 발생하는 사건부터 현 시기의 아베 4기 내각(경우에 따라 현 내각이 3기 내각의 '대규모 개각'에 불과하다고 하는 시각도 있습니다)까지는 위에서 줄줄이 정리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간단하게 설명이 가능합니다. 궁내청과 내각 사이에 카드게임을 하는 형세가 됐습니다.
가. 일왕이 지속적으로 대내외 설파를 이어나갔으나, 내각에서 헌법을 이유로 들며 궁내청에 일왕의 정치 관여 자제를 요구합니다.
나. 그래도 안 멈추자 내각에서 궁내청에 지원되는 예산을 삭감합니다. 이 당시 일왕이 '다른 식구들은 건드리지 마라'면서 대노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다. 실질적으로 설파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상황에서, 일왕이 선위를 살며시 얘기합니다. 이 당시 내각에서는 '선위하시면 갑작스럽게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데 진짜로 하시게요?' 정도로 넘겨버렸습니다.
라. 이 와중에 아키히토 일왕이 병환으로 입원합니다. 알려진 걸로는 '갑작스러운 발작'이었죠.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한 닷새 정도 일본 지상파 TV 전체에서 일왕이 입원한 뒤 하트레이트를 화면 한 구석에 계속 띄우는 일이 있었죠.
마. 퇴원한 뒤 일왕이 내각에게 최후통첩을 합니다. '봤냐? 선위할거다.' 전후 일본국 헌법, 그리고 이하 수많은 법들이 만들어진 이래 궁내청의 '선위'와 관련한 법제가 마련된 적이 없었던데다 '일왕'과 관련한 현안을 처리해야 하는 대형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이 때 FM대로라면 아베가 주장하던 평화헌법 개정이 아니라 일왕제에 관한 근본적인 헌법 수정을 했어야 하니, 일왕의 생각은 '평화헌법 건드릴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바쁘게 만들어주마' 였습니다.
바. 그런데 아베 내각이 '아직 한 발 남았습니다'라고 꺼내든 것이, 특별법을 통한 우회적인 선위 처리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특별법이라는 것이 헌법보다는 당연히 아래이지만, 일반적인 법안보다 우선하는 일종의 긴급조치이기 때문에 일왕으로서도 더는 어찌 할 방법이 없이 항복을 선언합니다. 이 부분이 위에서 설명한 B 파트입니다.
이 때문에 상왕이 된 아키히토 일왕도 후위 나루히토 일왕이 계승한 이후로는 그저 '아들내미가 내 뜻을 잘 이어주길 바랄 뿐'일 것입니다. 아베 내각 역시 현 일왕이 상왕과 같은 정치적인 유지를 받들기 때문에 난색을 표하고는 있지만, '양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약간은 혼란스러운 국면을 이용하여 개헌을 이전보다 더 빠르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뉴스에도 나왔다시피, 현재 아베 내각이 개헌 마지노선으로 잡는 시기는 내년 도쿄올림픽 이전입니다.
2. 일왕제 반대파가 내세우는 이유들과 그 배경
메이데이 이후로 일본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있는 뉴스는, 현 나루히토 일왕의 후위로 지목되는 히사히토 친왕(나루히토 일왕 슬하에는 아들이 없고, 아키시노노미야 친왕의 아들이다보니 왕자(황태자)는 아닙니다)의 학교 책걸상에서 흉기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입니다. 해당 사건의 배후로는 일왕제 반대를 주장하는 시민단체가 지목됐고, 범인 중 일부 인원도 검거됐죠. 이 얘기는 국내 언론에서도 많이 찾아보실 수 있으니 검색하시면 쉽게 나옵니다.
문제는 이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 '일왕제 혁파' 수준이 아니라 '반대'라는 것입니다. 일왕제 반대의 역사는 좀 많이 거슬러 올라갑니다만, 오래된 얘기는 한 줄 정도로 끝내고 주로 근현대사 이후의 반대 지론만 짚어보겠습니다.
현대의 반대 지론과 가장 맞닿아있는 논리를 멀리까지 찾아가면 전국시대까지 갑니다. 주로 이마가와 막부 쇼군 지위 상승의 극한을 보기 위한 이벤트성 일왕제 폐지 시도였으나, 이 당시의 사유는 '꼭두각시 일왕따위 있어봤자 뭐하냐' 정도였습니다. 말은 좀 많이 다르지만, '쿠데타(?) 완성'을 위한 명분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되겠습니다.
이후 일왕제 폐지는 2차 대전 이후에 나타납니다. 오히려 2차 대전 당시에는 일왕제를 아주 요긴하게 써먹은 쪽에 속하는데, 당시 전쟁을 주도한 군부 쪽에서 '혹시라도 잘못되면 모든 것을 덮어씌울 상대'로 보험 삼아 일왕을 잘 받들었으니까요. 물론 당시 일왕이 아무 잘못도 없이 그저 보험 역할만 했을 뿐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이 얘기는 지금 쓰는 글 만큼이나 길어지니 나-중에 다뤄보죠.
핵을 맞고,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소위 '인간 선언'을 한 이후로 일왕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론이 돌기 시작합니다. 특히나 미 군정에서 전후 일본국 헌법 초안을 작성할 당시에는 일왕 폐위를 대놓고 제기했을 정도라고 하니 꽤 심각했죠.
헌법이 어떻게든 마련이 되고, 쇼와(히로히토) 중반을 넘기면서 전공투의 확산과 함께 일왕 문제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에는 나름 철학적인 접근도 있었고 해서 '과연 일왕제는 존립 가치가 있는가'라는 꽤 광범위한 논제를 두고 이리저리 싸우기 시작합니다. 주된 입장으로는 '민주정으로의 완전한 탈바꿈을 위해 왕정은 소멸해야 한다'가 있었고, 반대(일왕제 유지) 입장으로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근간 보전을 위해 일왕제는 유지되어야 한다'가 있었습니다.
90년대에는 동북아 정세가 그리 안정되어있지 않았던 탓에 일본에서 여러 꿈틀거림이 있었다, 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이 때도 '일본은 자위대 중심 방위 정도면 충분하다'가 국제적인 대세로 굳어져서 군사적 변화를 꾀하진 못했습니다.
신세기 이후로는... 그리 크게 다루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현 시기에서 일왕제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전공투의 입장과 동일하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인 이유로 간주합니다.
갑. 옛 전공투가 내세웠던 일왕제 소멸의 연장선
전공투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80년대 학생운동이라고 보실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성질이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주로 군부와 독재에 저항하며 민주사회의 온전한 성립을 위한 전국민적 투쟁의 성격을 띄었지만, 전공투의 경우는 주로 철학적인 사유의 결과로 사회의 격동적인 변화를 요구한 조직적인 운동으로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는 일본어 교양수업에서 교수님과 따로 얘기할 기회에 이렇게 운을 띄웠다가 교수님께 웃으면서 한 대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정지어버리긴 힘들다는 뜻이죠.)
이 당시 일본이라는 국가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일단 일왕부터 사라지는, 사회적인 대격변 수준의 Top-Down 변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공투의 주장이었습니다. 일본이라는 사회가 워낙 보수적이고 굳건하다보니, 아주 큰 진동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에서 착안한 주장이었죠.
이 주장의 연장선상으로 현재도 '일본 사회의 민주적인 격변을 위해서는 가장 전통적인 것부터 사라져야 한다'는 기치 아래 일왕제의 소멸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을. 정치적인 노림수
위의 '갑' 정도면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는, 비교적 건전한(?) 주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지만, 이게 '정치적인 노림수'가 되면 일본이 2차 대전 당시에 일왕을 보험으로 썼던 것과는 180도 다른 상황으로 일왕을 역이용하는 꼴이 됩니다.
오로지 힘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일왕을 정략적으로 '제거'하려는 노림수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상왕이나 현왕 모두 마찬가지로 평화를 핵심 기치로 내걸고 있는데다, 일본 사회의 정신적인 중심이 일왕가에 있는 만큼 '일왕이 천명한다면 국민 여론도 크게 돌아서지 않는다'는 설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여론을 점진적으로 개헌 찬성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핵심'을 건드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 역시 가능한거죠.
마침 선위를 통해서 일왕제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많이 집중되어있는데다, 마찬가지로 선위 때문에 정국이 약간은 혼란해져있는 틈을 타서 왕족을 건드린 셈이 됩니다. 더군다나 다른 왕족들에 비해 많이 어린 편이라 비교적 수월하게 건드릴 수도 있고, 사람이라면 응당 어릴 적에 큰 일이 있으면 가질 수 있는 콤플렉스 내지는 후유증(?)을 만들기 위한 계책이 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 배후에는 시민단체 정도가 아니라 우파가 있겠죠. 더 나아간다면야... 너무 소설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음모론으로 빠지는 것 같아 굳이 얘기하진 않겠습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어느 정도는 됐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계속 글을 쓰다보니 정리가 잘 안 돼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싶은 생각 밖에 지금은 안 드네요.
다 써놓고 보니 너무 두서없이 생각을 늘어놓은 꼴이 됐습니다. 기왕이면 많은 분들의 댓글을 통해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더 긴 얘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향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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