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64칸의 왕에게 패배란 무엇인가2015.08.17 AM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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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게임에서 이길 생각이 없다."

인터넷 체스 세계랭킹 1위 속칭 '건틀렛' 에게 따라다니는 말이었다. 세계적인 인터넷 체스게임 카멜롯은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아이디를 생성하면 난수값으로 된 해시번호만 있고, 자신의 핸들네임은 옵션이었다. 하지만 보통 랭커정도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핸들네임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랭킹 1위인 건틀렛 만은 자신의 핸들네임이 없고 해시번호만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게임 내 모션인 건틀렛을 낀 사람의 손이 체스 말을 움직이는 모션에서부터 그는 건틀렛이라 불리고 있었다. 그 건틀렛은 본래 카멜롯의 게임 튜토리얼을 전부 클리어하고나면 게임 내 아이템창에 생기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만, '왕의 손은 유일하리라'는 게임의 룰, 다시말해 랭킹 1위가 사용하고 있는 모션 아이템은 누구도 사용할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사용하는 본래는 일말의 희소성도 없는 기본 아이템인 건틀렛은 '왕의 상징' 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의 게임 플레이 스타일은 상당히 특이한 편이었다. 정석을 따르는 말의 이동인 듯 하면서 약간 달랐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착실히 게임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변칙적인 수 였고, 접전이라 생각되는 게임은 결과를 보면 언제나 건틀렛의 체크메이트로 끝이 났다. 그러나 그가 게임에서 이길 생각이 없다고 평을 듣는 것은, 이러한 변칙적인 수들은 그다지 이기기 위해서 시험해보고 있다기 보다는, "이런 수를 둬도, 내가 이길 수 있을까?" 라고 생각되는 형태의 수 였기 때문이다. 일견 상대방에게 유리하지도, 자신에게 유리하지도 않을 수를 그는 즐겨 뒀다. 처음부터 게임에서 이길 생각으로 둔다면, 그 상황에서는 결코 그렇게 두진 않을 그런 수들, 버릴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취하기엔 너무나도 미지의 변수가 많은 수. 그런 수를 그는 자주 두었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결과적으로 그것으로 인해 이겼고, 95 퍼센트라는 말도 안될 정도의 승률은 그것을 뒷받침 해주고 있었다.

그런 건틀렛을 어느날 나는 카멜롯에서 만났다.

"좋은 게임"

카멜롯은 관전하는 사람들 끼리는 대화가 된다만, 정작 게임을 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는 대화가 되지 않는다. 다만, 기본 문구로 "좋은 게임", "훌륭합니다", "항복하십시오", "졌습니다" 같은 것들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건틀렛은 팬이 많았으니까, 그가 대국하는 방에는 기본적으로 2, 30 명의 사람이 관전하고 있었다.

내가 선이었다. 랭킹 1위의 실력을 보고자하는 떠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난 처음부터 꽤나 공격적인 수를 뒀다. 아마 관전하는 쪽에서는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떠들고 있겠지. 나의 모션 아바타인 기계의수로 된 팔이 나이트를 옮겼다.

몇 초 되지 않아 건틀렛이 말을 옮겼다. 그의 건틀렛이 폰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정석적인 수 였다. 하긴, 처음부터 재미있을 수는 없겠지. 체스나 바둑이나 어느정도 실력에 오르면 처음 부분은 빠르게 진행되는 법이다. 정석이란게 있고, 상대 말과의 거리가 있으니까 말을 움직이는데 있어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적은 편이다. 나도 빠르게 말을 옮겼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이미 여러번 관전한 적도 있고, 평가도 들어 왔기에 알고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찾아낸 것은 하나다. 그에게 이기고 싶다면 속전속결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겨루는 시간이 길면 길 수록 패배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보지 못한 승리의 가능성'을 캐내는 능력이 있는 듯 했기에, 그것이 발휘되기 전에 목에 쳐야했다. 그 결과가, 공격적인 수 였던 것이다.

공격적인 체스는 알기 쉽다. 내 말과 상대방의 말을 교환할 타이밍에서 별 고민하지 않고 이득만 맞으면 빠르게 상대방과 자신의 말을 교환해가면서 말의 숫자를 줄여버리기 때문에 게임에서 말이 빠르게 사라져간다.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결전의 순간까지 그와 나는 진행했다. 그때 건틀렛이, 정석에는 결코 나오지 않을 듯한 수를 뒀다.

"..."

순간, 머릿속이 얼어붙었다.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수, 하지만 그 수는 내게도, 건틀렛에게도 거의 의미가 없었다. 분명히 이길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수는 둘 리가 없다. 아니, 둬서는 안된다. 승리나 패배로 가는 길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코 이 길은 아니다. 기껏해야 스테일메이트(~빅장)로 가는게 다 일 듯한 그런 수. 분명히 계속해서 방어한다면 내가 지진 않겠지만, 이기지도 않을 그런 수다. 이 다음에 내가 둬야할 곳은 정석대로라면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둔다면 몇번 수읽기를 시도해도 비기는게 다다. 이 상황으로 오게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어째서, 그는 그 순간에, 이런 수를 둔 것인가.

대충 30초 가량의 생각 끝에, 내가 받아친 수는 나 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수였다. 평상시라면 결코 나오지 않을 그 수는, 랭킹 1위인 건틀렛과 대국하고 있다는 그 상황과 그의 희안한 수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 그 수로 본래라면 비길 수 밖에 없는 게임이 순간, 내가 유리한 상황으로 역전되었다.

"훌륭합니다"

상대방 쪽에서 온 메시지였다. 그리고 몇초도 되지 않아, 건틀렛은 다음 수를 뒀다. 그 이후에는 빠르게 대국이 진행되어, 결과적으로 건틀렛의 그 "이길 생각이 없는 수" 이후 일곱 수 만에, 나는 건틀렛에게서 승리를 이뤄냈다.

내게 있어서는 흔치 않은 승리, 그에게 있어서는 흔치 않은 패배. 하지만 뭔가, 난 오히려 대국에서 승리한 것은 건틀렛 쪽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히려 그 상황을 만들어내서, 내가 어떤 수를 만들어 내는지 보려고 한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그 이후에 난 건틀렛과 몇 번 대국해보았지만, 단 한번도 이긴적이 없다. 그때 그 승리는 도대체 뭐였을까. 지금도 건틀렛은 여전히 승률 95 퍼센트의 최강의 랭킹 1위다. 그 은색 철장갑의 밑에 있는 왕의 손이란 도대체 체스에서부터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에게 있어서 패배란, 과연 패배일까, 아니면 진화의 가능성일까.
댓글 : 2 개
우리는 많은 종목의 고수들에게 이야기를 듣습니다. '승패를 초월하라'고 말입니다. 심지어는 이순신 장군님조차 말씀을 하셨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고 .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고수들이 최종 승부의 열쇠로 그 초연함을 들고 나온 것은 그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도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그만큼 승부에 연연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애초에 초연해지려고 한 이유가 이기기 위해서이니까요.

히카리와 사이가 찾던 '신의 한수'는 이기기 위한 승리의 마스터키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바둑의 기예를 대표하는 궁극의 아름다움, 그 한 수 가 바로 그들이 찾던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보니 그들은 '신의 한수'를 찾아내기 힘들어하는 것이죠. 건틀렛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두다 보니 이겼고, 두다 보니 지게 되었다. 단지 날 1위로 명명하게 된 이유는 진 날보다 이긴 날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건틀렛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요. 만약 건틀렛의 비밀이 진정 그것이라면 아마도 그를 절대무적의 왕좌에서 절대 끌어내리지 못할 겁니다. 자원이 제한된 대국에서 승리의 비밀이 없다는 것은 반대로 약점의 비밀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말입니다.

재밌는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다음에 다시 뵙겠습니다. ^^
  • χ
  • 2015/08/17 AM 09:22
이게 어딘가의 칼럼인지, 마이피 주인장님의 경험담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의 단편소설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멋진 글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인상적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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