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크랩.게임관련] 게임 속 남녀관계 변천사 [오래된 글]2021.12.28 AM 11:25

게시물 주소 FONT글자 작게하기 글자 키우기


이런 생각을 해봤다. 왜 GTA 시리즈에는 여자 주인공이 없을까? 

 

온갖 인간 군상들이 총 집합한 게임인데 유독 여성의 존재감은 미미하다.물론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다. 마약 중독자, 길거리 여성, 스트립 댄서 등 대부분 사회적 약자로 나온다. 

 

GTA의 매력은 자유다. 법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대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게임이다. 길가다가 무고한 사람을 두들겨 팰 수 있고, 경찰이나 군인 같은 공권력과 맞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유는 아직 남성 캐릭터에게만 허락된 모양이다. 스스로 '나쁜짓'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아직 여성 캐릭터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GTA 속 세상에선 말이다. 

 

게임 속에서도 남자와 여자를 보는 태도는 다르다. 남성 캐릭터는 숭고한 기사도 정신, 혹은 거친 마초성을 요구한다. 반대로 여성 캐릭터는 지고지순한 여성성을 내세우거나, 섹시한 몸매로 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 게임 속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권한과 책임을 부여 받는다. 

 

게임 속 남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왔을까. 

 

플로베르.jpg

"남성의 성격 형성에는 그 절반이 여성에 의해 결정된다"  

-플로베르(프랑스 출신 소설가?)- 

 

닌텐도 게임속의 남녀, 정말 사랑했을까 

‘여자’는 납치되고 ‘남자’는 구하러 간다. 납치된 여자는 청순가련 할수록 좋고, 구출하는 남자는 거칠수록 매력있다. 여자는 연신 "헬프미"를 외쳐대고, 그럴수록 남자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싸워야 한다. 초창기 오락실 게임의 흔한 문법이다. 

 

"여자친구 구출하는 게임" 

 

복잡한 서사를 넣지 않아도 확실한 목표의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두루두루 사용됐다. 비디오게임의 전성기를 가져온 닌텐도 명작들도 이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세히 뜯어보면 남녀 간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들어있다. 

 

스파르탄엑스.jpg

<고전 아케이드 게임 스파르탄 엑스, 여자는 납치 당하고 남자는 구하러가는 전형적인 문법의 액션게임이다> 

 

‘슈퍼마리오’에서 주인공 마리오는 악당 쿠파에게 납치된 피치공주를 구해야 한다.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피치공주는 지겹게도 납치당한다. 피크닉 중에 납치당하고, 별 축제 중에 납치당하고, 심지어 식사 도중에 납치 당한다.납치와 구출의 악순환이다. 

 

그녀는 항상 구원의 손길만 바라는 수동적 캐릭터로 그려져 있다.마리오는 그런 피치공주를 구해야 한다. 악당 쿠파는 버거운 상대. 혼자 안되면 가족까지 동원해서라도 그녀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이 남자의 숙명이다. 

 

닌텐도의 또 하나의 명작 ‘젤다의 전설’도 사정은 비슷하다. 이곳에도 ‘납치전문’ 공주와 ‘구출전문’ 용사가 살고 있다. 남자 주인공 링크는 납치된 여자 주인공 젤다를 구하고 왕국에 평화를 되찾아야 한다. 이런 구도는 시리즈 내내 계속된다. 남자에게는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악당을 물리치려면 수많은 퍼즐과 난관을 맨몸으로 헤쳐 나가야 한다. 

 

얼핏 보면 두 게임 다 전형적인 동화 속 이야기를 그린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의 남녀관계를 깊이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온다. 

 

 

마리오젤다.png

<닌텐도의 명작 슈퍼 리오(좌)와 젤다의 전설(우) 겉보기엔 동화속 백마탄 왕자 이야기 같지만 남녀관계에 대한 숨은 이야기가 들어있다> 

 

‘슈퍼마리오’에서 피치는 버섯왕국의 공주다. 왕이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만큼 실질적인 버섯왕국의 최고 권력자로 보인다. 

 

실제로 그녀가 다스리는 버섯왕군은 중세봉건제 국가와 같다.그녀는 다수의 지방 영주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재산 관계는 불투명하지만 ‘돈이 없다’는 묘사가 없는 것으로 봐서 가난한 왕족은 아닌 것 같다. 

 

피치공주.png

<피치공주는 버섯왕국을 다스리는 실질적인 권력자. 그녀의 납치는 왕국의 권력투쟁의 한 면이다> 

 

쿠파는 버섯 왕국을 노리는 악당이다. 쿠파가 피치를 납치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버섯왕국의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다. ‘마리오&루이지 RPG 3 쿠파 몸속 대모험’에서 쿠파가 자신을 ‘버섯 왕국의 국민’으로 칭하는 것을 보면, 지방 영주인 쿠파가 중앙정권을 차지하려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납치극이 아니라 버섯왕국의 내부 권력투쟁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남자 주인공 마리오가 등장한다. 그의 신분은 미천하다. 배관공인 그는 가장 밑바닥의 노동자 출신의 캐릭터다. 패션센스도 엉망이다. 비호감 콧수염에 촌티나는 멜빵바지를 입고 있다. 

 

딱 봐도 삶에 찌든 그런 캐릭터다. 출신성분상 마리오는 버섯 왕국의 국민이 아니다. 왕국의 시민권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미천한 신분이라는 것이다. 경기도 안 좋고 일용직 노동자로 살 길이 막막하다. 

 

하긴 정부가 허구언날 싸움질만 하고 있으니 경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그래서 마리오는 부업으로 '용병'일을 맡았다.먹고 살길 없으니 군대에 말뚝 밖는다 말은 현실이나 게임이나 같은 모양이다.  

 

사실 마리오와 피치가 처음부터 좋아하는 사이였다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처음엔 남남이었다. 시민권도 없는 노동자 출신 마리오와 왕국의 실질적 권력자 피치는 처음부터 어울린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납치당하고 구하기를 되풀이하니 정이 드는 모양이다. 

 

시리즈를 거듭하고 ‘슈퍼마리오 선샤인’부터 연인관계로 발전한 단서가 간간히 포착됐다. 결국 마리오는 피치를 구하면서 신분상승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서민이 귀족이 되기 위해선 귀족의 가족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엄연한 신분제 사회의 법칙이다.어떻게 보면 피치는 마리오를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로 선택한 셈이다. 

 

가끔 피치 공주가 마리오를 구하기도 한다. 닌텐도 DS게임 ‘슈퍼프린세스 피치’에선 피치가 마리오를 구하러 가는 모험을 그렸다. 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구하러 가는 설정이 낯설었는지 이 게임은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슈퍼마리오.png

<배관공 출신인 마리오는 왕국의 권력자 피치공주를 구하면서 신분상승의 꿈을 이룬다> 

 

Super_Princess_Peach.jpg

<피치공주가 납치된 마리오를 구하러 가는 슈퍼프린세스 피치> 

 

‘젤다의 전설’의 남녀관계는 더욱 건조하다. 여기서도 링크와 젤다가 서로 좋아했는지는 알 수 없다. 엔딩 후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의 묘사는 아무데도 없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넣을 법 한데도 말이다. 

 

굳이 둘의 관계를 유추해 본다면 어릴 적 소꿉친구라는 설정 정도만 있다. 그렇다면 둘은 어떻게 엮이게 됐을까. 젤다도 피치처럼 자신의 왕국을 지켜줄 힘이 필요했다. 

 

서민출신 링크는 그에게 있어서 써먹기 좋은 파트너다. 링크는 태생부터 젤다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링크는 젤다를 통해서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릴 수 있다.  

 

게임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은 링크지만 모든 명예는 젤다에게 돌아간다. 게임 제목이 ‘젤다의 전설’이기 때문이다. ‘젤다의 전설’이기 때문에 그의 활약이 빛나는 것이다.  

 

zelda1.jpg

<링크가 젤다를 구한 후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가 한군데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모험은 무슨 목적 때문일까> 

 

‘슈퍼마리오’나 ‘젤다의 전설’ 속 남자 캐릭터는 신분이 낮은 계급이다. 반대로 여자 캐릭터는 신분이 높다. 여성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남자를 이용한다. 온달과 평강공주처럼 말이다. 

 

두 남녀에게는 왕국의 권력을 지켜야 하는 공통된 목표가 우선이다. 애정은 그 다음 문제다. 마리오와 피치, 링크와 젤다, 어느 커플도 둘이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왕국이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는 결말은 항상 똑같다. 

 

플레이어가 받아들이는 것은 남자는 구하러가고 여자는 구출되는 단순한 사건뿐. 큰 맥락속의 두 남녀의 관계는 이토록 복잡미묘하다. 

 

젤다주인공.png

<게임 남녀의 관계는 이름으로 정해진다. 남 주인공 링크(좌)는 여 주인공 젤다(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결국 게임 제목은 '링크의 전설'이 아니라 '젤다의 전설'이니까>  

 

'용사'는 '엄마'가 되어간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게임 속 남녀관계도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구하러 가는 남자와 구출 받는 여자의 구도에서 벗어나 남녀의 역할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프린세스메이커가 변화의 시작이다. 

 

게임의 주인공은 용사다. 그것도 세상을 구한 최강의 용사. 강인한 남성의 상징이다. 초야에 묻혀 조용하게 살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신탁이 내려온다. 연약한 여자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달라는 것. 

 

이때부터 '용사'는 '엄마'가 된다. 

 

평생 전투와는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 딸을 제대로 키우려면 복잡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딸의 모든 상태는 수치로 표현되어 그 결과에 따라 엔딩이 결정된다. 

 

학식이 높으면 과학자나 선생님이 되고, 무술과 완력 수치가 높으면 아버지처럼 무사가 되는 엔딩을 볼 수 있다. 모든 조건을 완벽히 맞추면 궁극의 엔딩인 왕비를 만들 수 있다(에디터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정말 달성하기 힘든 극악의 난이도). 

 

프린세스메이커2.jpg

<프린세스메이커2는 가장 남성적인 캐릭터가 여성의 역할인 육아를 맡으면서 독특한 재미를 줬다> 

 

자식을 키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돈을 벌려면 딸에게 아르바이트를 시켜야 한다. 너무 혹사시키면 병에 걸릴 수 있다. 술집 같은 이상한 곳에 보내면 엇나갈 수도 있다. 교육과 아르바이트는 게임의 핵심이다. 

 

꾸준한 관심도 필요하다.딸과 대화를 하지 않으면 가출할 수 있다. 반항심이 강한 딸은 주인공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런 딸을 볼수록 모니터 밖 게이머들은 애간장이 녹는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 부모가 된 기분이다. 

 

프린세스메이커는 여자의 역할로 알려진 ‘육아’를 남자가 하는 과정에서 색다른 재미와 함께 짠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게임은 현대 가족제도의 성역할을 그대로 반영했다. 프린세스메이커가 발매된 1990년대부터는 가부장적인 가족제도가 무너지고 남자도 육아에 적극 참여하는 가정이 늘었다. 

 

밖에서 일하고 안에서 육아를 돕는 남편들이 늘기 시작했다. 젊은 아빠들에게 ‘딸바보’라는 명칭이 붙은 시기도 이때부터다.가장 여성적인 ‘육아’가 가장 남성적이 ‘전투’보다 더 재미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게임은 감성의 영역까지도 접근했다. 엔딩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이 "아빠 키워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할 때는 코끝이 찡하다. 성역할을 바꾸었더니 이렇게 근사한 게임이 됐다. 

 

프린세스.jpg

<딸의 미래는 아빠에게 달렸다. 지금의 딸바보 세대를 낳은 원조 게임> 

 

마초의 시대에 여캐가 사는 법 

1990년대 게임 기술이 발전하면서 게임 속 성대결이 시작됐다. 특히 극단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게임과, 이에 맞서 여성의 힘을 과시하는 게임들이 맞붙었다.  

 

FPS는 남성위주의 게임이다. 그것도 남성성이 극대화된 마초들의 게임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게임 속 주인공은 여자보다 남자가 더 어울린다. ‘둠’, ‘듀크뉴캠3D’, ‘퀘이크’ 등 초창기 FPS 시장을 이끈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자다. 전부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는 마초들이 주인공이다. 

 

듀크뉴캠.jpg

<전형적인 마초적 영웅상을 보여준 듀크뉴켐 3D> 

 

특히 ‘듀크뉴켐3D’의 주인공은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여기며 시종일관 음담패설을 늘어놓기 일쑤다. 과거 게임은 '백마 탄 왕자'들의 최소한의 예의라도 있었다. 그런데 여긴 그런 것도 없다. 

 

눈앞에 보이는 전부를 도륙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초창기 FPS는 1980년대 '람보', '코만도' 같은 액션영화처럼 남성의 마초성이 미덕인냥 여겨졌다. 그 속에 연출된 감정 없는 폭력은 수많은 여성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마초들의 세계에서 여성은 무시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캐릭터’이기 전에 ‘볼거리’의 역할을 해야 했다. 섹시하든 청순하든 여성캐릭터는 볼거리다. 그런데 FPS는 1인칭 시점에서 진행하는 게임이라 주인공의 모습이 드러나질 않는다. 

 

아무리 섹시한 여성도 화면에 비치지 않으면 매력이 떨어진다. 이는 마치 제임스 본드와 본드걸의 관계와 같다. 본드걸이 아무리 잘 싸워도 제임스 본드가 될 수 없다. 본드걸이 1인칭 주인공이 되는 순간 흥미는 떨어진다.  

 

그래서 FPS에선 여자 주인공이 별로 없다. 여성 캐릭터는 보는 존재가 아니라, 보이는 존재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듀크뉴캠여성.jpg

<난 돈을 줄테니 넌 무엇을 줄래? 듀크뉴켐 3D의 여성비하적 표현은 당시 FPS의 서사적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마초적 설정에 반기를 든 게임이 나왔다. 툼레이더는 캐릭터성과 볼거리를 동시에 갖춘 히로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스팩은 완벽하다. 인디아나 존스의 지성미, 람보의 강인함, 제임스 본드의 시크 한 매력까지 멋진 남자들의 요건을 모두 아우른 여성캐릭터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젊고 부유한 영국 귀족이라는 독특한 개인사를 배경에 깔았다. 38-22-36(실제 공개된 라라의 몸매 사이즈)의 비현실적인 몸매는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다. 

 

툼레이더.png

<툼레이더 라라 크로프트. 강한 여성 캐릭터를 내세웠지만 결국 풍만한 바스트에 잘록한 허리를 내세운 볼거리 위주로 전락했다> 

 

제작진은 여성과 남성의 매력을 조합해 기존에는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툼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다. 제작사는 라라를 부각시키기 위해 아예 게임에서 남자 주인공을 빼버렸다. 

 

남녀의 능력을 모두 갖춘 이 매력적인 캐릭터에게 거추장스러운 남친 따위는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그녀 혼자면 충분했다. 그녀는 또 한명의 ‘여성 마초’였다. 남자 캐릭터에 대응하려면 그들보다 강해야 한다. 라라 이후 수많은 여성 캐릭터가 남자보다 더 남자다워지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녀 또한 볼거리로써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게임의 시점부터 그렇다. 툼레이더는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자신의 시점으로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의 시점으로 캐릭터가 보여 진다. 

 

그녀가 화면 속에서 아무리 터프한 행동을 해도 플레이어의 눈은 끊임없이 라라의 몸매를 훑고 지나간다. 핫팬츠를 입은 그녀의 엉덩이는 남자들의 시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만약 툼레이더가 당시 유행이었던 FPS 장르로 나왔다면 크게 성공하진 못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 앞에 그녀의 매력도 떨어졌다. 툼레이더가 혁신의 기로에서 늘 멈칫거린 이유도 볼거리로써의 라라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그저그런 언니 캐릭터로 연명했다. 

 

라이즈오브더툼레이더.jpg

<최신작 라이즈 오브 툼레이더. 사람들은 더 이상 그녀를 섹스어필하는 여성 캐릭터로 보지 않는다> 

 

툼레이더는 새롭게 리부트 됐다. 첫 단계는 정체성을 바꾸는 것이다. 제작진은  “라라 크로프트가 섹시한 캐릭터가 되는 일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억지로 남자를 닮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살렸다. 

 

외모는 물론 내면의 모든 것이 딴 사람이 됐다. 넘어지고, 아파하고,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그녀의 모습이 처음엔 낮설었다. 낭떠러지를 구르고, 늑대에게 물리고, 악당에게 쫓기며 공포에 떨고, 상처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게임 속 그녀는 우리가 알고 있던 폴리곤 덩어리 여전사가 아니었다. 

 

이제는 그녀의 몸매가 아닌 표정연기에 더 끌린다. 

 

툼레이더 리부트는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었다. 시리즈는 다시 부활했다. 최신작 ‘라이즈 오브 툼레이더’에서는 성장한 그녀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마초의 시대에서 남성보다 강한 캐릭터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녀가 다시 자신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모습과 마주하게 됐다. 

 

툼레이더캐릭터.png

<툼레이더 라라 크로프트 역대 시리즈 캐릭터들. 전형적인 마초들의 게임판에서 여캐가 살아남는 법을 보여준다>  

 

여성상위시대, 남캐가 사는 법 

게임 속 남캐의 사정도 예전만 같지 않았다. 남자라고 무조건 게임에서 우대받는 시대는 지났다. 더 이상 힘으로 여성을 누를 순 없다. 터프한 매력을 발산하는 마초 캐릭터는 구시대적 유물이다. 여성상위시대, 남캐들도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다. 

 

연애시뮬레이션에선 현실적인 남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화이트 앨범’은 일본 리프사의 성인용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은 거친 매력으로 여성의 마음을 차지하는 그런 남자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을 붙잡으려고 애쓰는 주인공의 안쓰러운 순애보를 담았다. 

 

화이트앨범.jpg

<화이트 앨범. 유명 아이돌인 히로인과 평범한 일반인인 남자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다뤘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여자, 달라졌다. 유명가수로 데뷔를 해버린 것이다. 그녀는 점점 유명해지고, 처다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됐다. 

 

주인공 같은 찌질한 남자보다 훨씬 멋진 녀석들이 주변에 널렸다.그녀는 바쁜 스케줄 때문에 좀처럼 만날 수가 없다. 언제 날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리고, 간신히 만나더라도 몇 분 정도. 

 

그렇다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그녀를 책망할 수는 없다. 다행인 것은 남자에 대한 여자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명 아이돌인 여자는 여전히 별 볼일 없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큰일 난다. 어찌됐든 그녀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자책할 수 밖에 없다.    

 

주인공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녀를 계속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주제에 맞지 않는 사랑을 택한 대가로 어떤 상처도 감수할 자신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여자를 만나 안전하게 사랑을 유지할 것인가. 화이트앨범은 이러한 엇갈린 남녀관계를 감성적인 터치로 그렸다. 

 

화이트데이.jpg

 

 

연애시뮬레이션의 고전 ‘동급생’도 마찬가지다. 게임 속 주인공은 잘난게 없다. 다른 게임의 주인공처럼 잘빠진 근육에 천재적인 두뇌, 부와 명예로 여성들을 유혹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하숙생이다. 여성들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변변찮은 주인공이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동급생의 연애조건에선 돈과 스펙이 전부가 아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느끼는 고민이 무엇인지, 그런 아픔을 어떻게 위로해 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게이머들의 연애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동급생의 재미다. 

 

결국 그녀들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주인공의 화려한 스펙도, 경제적인 조건도 아닌 진심과 열정이다. 상대를 기쁘게 하는 대사를 고르려고 노심초사하고,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분초를 다투는 연애게임 속 남성의 모습은, 최강보스를 맞아 무기를 정비하는 용사의 모습처럼 간절하다. 

 

강인함 대신 배려심을, 막강한 무기 대신 따뜻한 말 한마디를, 여성상위시대 남캐가 사는 법이다. 

 

동급생2.jpg

<변변치 않은 남자 주인공이 여성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을까?> 

 

남캐와 여캐, 같은 곳을 보다 

이제는 게임 속 남녀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시대가 왔다. 어느 한쪽이 우월하거나 열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서로가 대립하는 사이도 아니다. 남녀가 똑같은 입장에서 서로 돕는 장면도 많다. 

 

스타크래프트의 남녀관계가 그렇다. 시거를 씹어대며 거친 농담을 주고받는 마린은 강한 남성의 상징한다.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메딕은 여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마린 혼자서 상대를 감당 할 수는 없다. 

 

뒤에서 항상 메딕이 보조 해주어야 한다. 강력한 배틀크루저가 움직이려면 여성이 조종하는 발키리가 주변을 엄호해야 한다. 남녀가 완벽히 조화를 맺었을 때 최강의 전력을 뽑아낼 수 있다. 

 

‘스타크래프트2’에선 여성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의료선, 해방선, 벤시 같은 공중 지원 유닛은 대부분 여성 캐릭터가 운전한다. 종족간의 치열한 전쟁도 결국 주인공 ‘레이너’와 ‘캐리건’의 사랑이야기로 마무리 된다. 남녀의 조화는 스타크래프트의 핵심적 정서다. 

 

레이너_캐리건.jpg

<스타크래프트2 주인공 레이너와 캐리건. 게임 속 남녀는 똑같은 위치에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이밖에 남녀가 힘을 합쳐야 클리어 할 수 있는 게임은 많다. ‘바이오하자드’ 시리즈는 남녀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편에선 ‘질’과 ‘크리스’가 2편은 ‘클레어’와 ‘레온’, 5편은 ‘크리스’와 ‘쉬바’ 늘 주인공은 남녀조합니다. 이들 남녀는 서로를 도와가며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PS2게임 ‘이코’도 남녀가 함께하는 게임이다. 남자 주인공 ‘이코’가 ‘요르다’라는 여자를 만나 서로 도와가며 미궁에서 탈출하는 게임이다. 게임 속 남녀는 항상 손을 잡고 움직여야 한다. 

 

만약 손을 놓쳐서 한쪽이 죽게 되면 게임은 자동적으로 끝난다. 요르다는 이코의 도움을 받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코의 목숨을 구하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두 주인공은 서로 손을 맞잡고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간다. 

 

바이오하자드2.jpg

<바이오하자드2의 주인공 레온과 클레어. 두 남녀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도우며 게임을 풀어나가야 한다> 

 

GTA에서 여자 주인공을 볼 수 있었으면... 

언제부턴가 한국 온라인게임에서 '여캐는 강해질수록 옷을 벗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일단여성 캐릭터는 벗어야 눈길을 끌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요즘 게임들이 대부분 그런것 같다. 

 

하지만 과연 그런 캐릭터가 오래 갈 수 있을까. 라라 크로프트는 옷을 입으면서 전성기때의 인기를 다시 찾았다. '화이트앨범'의 유키는 굳이 벗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도여전히 게이머들의 마음속 히로인으로 남아 있다. 이제 게임에서도 남녀 관계를 다시 써야 할 때가 왔다. 

 

대립이 아닌 공존의 관계로 말이다. 

댓글 : 0 개
친구글 비밀글 댓글 쓰기

user error : Error.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