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반도의 퍠기 넘치는 문관들2011.10.24 PM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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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문관)

물론 고려시대에 문무관 구분이 적었다곤 하지만 엄연한 문관 출신..



조선시대에는 문무관 구별이 뚜렷해지지만 여전히 패기 넘치는 문관이 등장하는데..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 이성계의 아들이란 탓인지..무관적이미지가 강하고. 왕자의 난을 이끌고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다니는등.. 무관적 기질도 보여주지만..엄연한.. 문과 급제자

어떤 책에서..어이없게.. 성적이 낮았따고 까는데..고시에 일단 합격하면 괴물임..-.-;;



김종서

항상 장군으로 불리고 사극에서도 항상 장군으로 불리는 인물..6진개척의 공 탓에

무관같아 보이지만 엄연한 문관.. 제 기억으로 성균관 유생 출신으로 알고 있는데..

기록을 찾을수가 없네요



권율

역시 문관.. 이항복의 장인.. 행주대첩의 공에다가 문관출신 배경탓에..임진왜란의 총사령관 역활을

수행한다.. 원균에 대해 약간 오해를 받고 있다는게 좀 그럼..



김덕령

의병이고 힘이 쎗다는 기록 탓에..무관같아보이지만 역시 유생 출신..



곽재우

역시 유생 출신.게다가 남명의 외손녀 사위..김덕령이 죽은 탓에 은둔했다고 하지만

스승인 조식의 영행도 있을듯.. 그리고 은둔후에도 중요한 사인에는 상소를 올리며(영창대군의 사사등)

유생의로써 역활을 했음..





그리고.......................................





단재 신채호

이분 무려 성균관 유생 출신..



그런데..이분이 쓴 조선혁명 선언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의 민중을 불러 일깨워 강도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민족의 신생명을 개척하자면 양병(養兵) 십만이 일척(一擲)의 작탄(炸彈)만 못하며 억천장(億千張) 신문잡지가 일회 폭행만 못할지니라. 민중의 폭력적 혁명이 발생치 아니하면 끝이려니와, 이미 발생한 이상에는 마치 벼랑끝에서 굴리는 돌과 같아서 목적지에 도달하지 아니하면 정지하지 않는 것이다.

앞에서 이승만을 무지 깐 내용이 있지만 패스 하고................



이제 폭력 - 암살, 파괴, 폭동 - 의 목적물을 대략 열거하건대,

1.조선총독 및 각 관(官) 관리

2.일본천황 및 각 관 관리

3.정탐노(偵探奴), 매국적(賣國賊)

4.적의 일체 시설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이다.

..

패기넘쳐......

댓글 : 5 개
책으로 사람 때려죽일 기세.
일단 강감찬대에는 무관은 군대 총사령관을 못 맡았습니다.
고려초중기까진 군의 총지휘권은 무조건 문관이 맡아야한다는
원칙이 있었고 무관은 진급에도 한계가 있었을뿐더러 아예
무과도 없었습니다(공양왕때 생겨서 사실상 없었다고 봐도 됨).

조선왕조에도 문관 우대정책은 계속 이어졌는데 가장 큰 이유는
유학을 배운 문관의 충성심이 못배운 무관보다는 났다는게
가장 큰 이유죠.

그리고 의병장들 대다수가 지역유생인건 지방에서 게릴라전이라도
펼칠만큼 사람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지역 유지급들 대다수가
유생들이었기 때문이구요. 지역 양반들이나 유생들의 발언권이
약화되고 부농층 발언권이 세지는건 왜란 한참 후입니다.

조선후반의 교조화때문에 유학자의 인상이 매우 나쁘고 백면서생의
이미지가 강합니다만 원래 제대로 된 유학자라면 병서도 익혀야 함은
물론이고 궁술과 기마술정도는 해줘야 합니다.

조선시대 무관도 사서삼경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가줘야 자격이 나는것과
비슷한 케이스라 보시면 됩니다.
책도 둔기입니다 0ㅅ0
김종서는 이징옥 때문에 강경토벌정책을 주장할 수 있었기에 문관이라 생각이 됨.
  • Emile
  • 2011/10/24 PM 08:24
흠좀문무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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