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안타까운 인물 대원군 2013.01.30 PM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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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는 많이 나아진듯 하지만 여전히 대원군은 쇄국 정치로 나라를 망친 인물로 알려져 있죠

왜 인지 모르지만 그와 더불어 개화정책을 편 명성황후랑 대비되기도 하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제쳐두고라도 대원군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죠. 그러나 이러한 평은 상당히 안타깝습니다.

흔히들 정조가 오래살았으면 이라는 가정을 많이 하는데, 대원군과 정조의 정치방향은 상당히

비슷하고 많은 부분에서 정조보다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여져요. 특히 호포법은 대단한 거 였죠.

양반이 늘어나고 삼정의 문란등으로 나라의 살림이 어려워졌죠. 권리만 있고 의무는 없던 양반에게

최초로 세금을 부여한것은 대단한 겁니다. 삼정의 문란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많은 왕들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으려 했지만 성과를 보지 못했고 (개혁군주라고 물리는 영조나 정조까지도)

그 외에도 비변사 폐지, 서원 철폐등 많은 부분에서 그의 리더십과 뚝심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솔직히 대한민국의 많은 정치인 중에 개혁적인 법안을 이렇게 뚝심있게 밀어부친 인물이 있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히 성공적이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왜 그런걸까요? 바로 그 시대의 한계라고

보여집니다. 정조나 대원군 실학까지도 모두 성리학에 기초한 사상이었습니다. 무려 500년이상 그들을 지배한

성리학을 버린다는것은 거의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대원군이나 정조 모두 그들이 원하던 정치상은 세종시대 였습니다.

성리학이 실용적인 것과 어울려 (초기 훈구파) 역동적인 조선을 꿈꾸었죠. 그러나 이미 그러한 사상으로는 서양에

맞써 싸울수 없었습니다. 청국의 등장으로 성리학 적 우월감이 더욱더 강해진 조선에게 역성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있어야 했죠. 성리학에 기반한 보수가 아닌 어느정도 외부에 대한 정보도 있는 개혁적인 지도가 나타나 내전에 준하는

싸움을 거치후 뚝심있게 개혁을 밀어부쳤어야 한다고 봅니다.





댓글 : 13 개
대원군도 처음부터 쇄국정책을 펼치진 않았습니다.
처음엔 제너럴 셔먼호를 바탕으로 증기선을 만들어 보려고도 하고 기본적으로 서양인들의 통상 요구는 거부할지언정 죽이진 않았고 돌려보내는 선에서 그쳤는데 서양 상인들 중 오페르트(독일인?)이 대원군 부모의 묘를 도굴한 사건이 일어난 후로 철저한 쇄국정책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잘 못 알고 있는 게 있는데 쇄국정책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심지어 이 말을 만들어낸 일본에서도요)
나라를 굳게 걸어잠군다는 소리인데 그 당시에 치열한 외교전쟁이 있었는데
무슨....
MIREADE_MK2//그래서 요새 역사교과서같은데선 통상수교거부란 식으로 기술함
진정한 보수는 이사람 아닐까 싶음....
역사에 IF는 없다지만 대원군이 있었다고 해서 역사가 변하진 않았을듯 합니다.
다만 초기의 외세친화적인 모습이라던지 친화적 천주교 정책에의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문호개방의 성공이 있었다면 역사는 크게 변했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프랑스 선교사들 거부가 결국 우리나라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Ps. 생각해보면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상한 놈들임!!
통상의 기본 조건이 선교허용인데 허용해주겠으니 통상하자는 대원군을 그냥 무시했으면서 나중에 프랑스가 들어올때 선교를 문제 삼았으니 말이죠..
대원군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긴장감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은 신부들을 통해 프랑스에 외교적으로 도움을 청하려고 하였지만,
프랑스도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맺고 있어서 도움을 줄 수 없었지요.
유럽 내 강력한 파트너였거든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구한말 당시의 국내 정치상황으로 유생층과 조정대신 등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천주교는 공자와 예수를 동급으로 보는데다가 미신이라 하여 '제사'를 거부한 점이 가장 큰 요인이었습니다.
국내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천주교를 박해하였고 이것이 병인박해입니다.
프랑스는 병인박해때 살해당한 프랑스인 신부를 복수한다며 쳐들어왔구요. 병인양요이지요.

이후 오페르트의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묘 도굴사건과 미국의 신미양요 등 일련의 사태가 이어지며 대원군은 서양세력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와의 통상수교는 단순한 외교관계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옛말에도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프랑스의 많은 도움이 문제가 아니지요. 프랑스와의 수교가 이루어지지 못했기에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으며 또한 이후의 외세 미국, 독일등의 수교도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통상수교 거부를 했다는 점에서 볼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죽일 놈들임
체사레 보르지아 님의 말씀이 틀린점이 있는것은 아니나
초기에 대원군의 정치적인 파워는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또한 초기의 천주교에 대한 유생들과 조정대신의 문제재기는 대원군을 좌지우지 할만한 힘이 있었던 상황은 아님니다. 그리 했기에 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들과 다리를 놓으려고 했었구요.
만약이라는 단서가 붙었을 경우에 프랑스와 통상 수교을 했다면 최소한 일본에 대한 굴욕적인 침탈은 막을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이득이기에.
당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 혹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은 조선에게도 큰영향을 주었지만 일본에게도 큰영향을 주었지요.
그래서 사실 쉽게 도발하지 못하고 있었구요.
추가로 말을 더하자면 초기의 조정대신들과 유생들의 반발은 적었습니다만
프랑스 선교사들의 거부로인한 대원군의 정책의 전환으로 인한 적극적인 수교거부와 함께 2번의 호란으로 인해 민심이 왜세에서 돌아섰으며 독일놈의 도굴사건 (시킨놈은 미국놈이지만)으로 인하여 유생들의 반발이 극심해졌죠.
음. 일본의 침략은 병자수호조규(일명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점을 잡고 있습니다.대원군은 당시 하야한 상태였구요. 일단은 미국이 일본을 침략할때 써먹은 페리 제독의 방법을 그대로 조선에게 사용합니다. 일본도 쉽게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만...

당시 국내의 정치실권을 쥐고 있는 민비가 좁은 소견으로 빨리 응해버리지요.
바로 대원군이 복귀할 구실을 줄까봐입니다. 대원군하야 후 어렵게 잡은 권력을 놓치기 싫어서죠.
체사레 보르지아님의 말씀이 100번 옳습니다.
일본의 침략은 병자수호조규(일명 강화도 조약)으로 시작점이라는 점은 동의 합니다.
다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IF라고 가정하고 이야기 하는것이라 프랑스와의 수교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면 대원군의 하야는 없었다고 이야기할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2번의 호란으로 인하여 민들의 삶이 더 피폐해졌고 거기에 경복궁 중건으로인한 당백전 남발등으로 더욱 민심을 돌기게 만드는 일이라던지 양반을에게
무리수를 두면서 까지 돈을 받아내지 않았겠지요.
또한 대원군이 하야하더라도 일본이 쉽게 조선을 노리지 못했다고 생각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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