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 이유 6조목2019.09.17 AM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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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는 1443년에 (훈민정음) 창제되자


다음해인 1444년에 6조목의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였다.


그가 반대한 여섯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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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대대로 중국의 문물을 본받고 섬기며 사는 처지에

한자와는 이질적인 소리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국에 대해서 부끄러운 일이다.


둘째, 한자와 다른 글자를 가진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티베트) 등은

하나 같이 오랑캐들뿐이니,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일이다.


셋째, 새 글자는 이두보다도 더 비속하고 그저 쉽기만 한 것이라

어려운 한자로 된 중국의 높은 학문과 멀어 지게 만들어

우리네 문화수준을 떨어지게 할 것이다.


넷째, 송사에 억울한 경우가 생기는 것은

한자를 잘 알고 쓰는 중국사회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며,

한자나 이두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관리의 자질에 따른 것이니

새 글자를 만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섯째, 새 글자를 만드는 것은 풍속을 크게 바꾸는 일인만큼,

온 국민과 선조와 중국에 묻고 훗날 고침이 없도록 심사 숙고를 거듭해야 마땅한데,

그런 신중함이 전혀 없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으로 졸속하게 추진하고 있고,

상감은 몸을 헤쳐 가며 지나친 정성을 쏟고 있다.


여섯째, 학문과 수도에 정진해야 할 동궁(문종)이

인격 성장과 무관한 글자 만들기에 정력을 소모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최만리의 상소에 대한 세종의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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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과 함께 한글 창제를 도운 집단이

 

당시 집현전 대제학 정인지와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

 

집현전의 학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현전의 학자 출신인 최만리의 반대는

 

세종에게는 충격이었다.

 

세종은 최만리를 일시 옥에 가두었으나 인재를 아끼는 마음으로 바로 풀어 주었다.


그의 상소에 대해서 세세히 답변하지는 않았지만


다만, 아래와 같이 개괄적인 글을 내렸다.


설총이 백성의 글자 생활을 돕기 위해 이두를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을 탐해서가 아니라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만드는 중대한 나랏일임을 밝혔다.


세부적으로는


넷째 의견에 대해서 사리를 모르는 속된 선비의 생각이라고 비판했고,

여섯째 의견에 대해서 한글의 중요함에 비추어


동궁이 관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http://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31647&page=1&menuId=0&bc=0

 

1443년(세종 25) 세종은 새로 우리 글 28자를 창제하였다. 1443년 12월 30일 실록의 기록에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訓民正音》.]”고 기록하고 있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은 무엇보다 창제 동기가 밝혀져 있는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적으로 으뜸가는 문자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용되지 않으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을 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한 자가 많다. 내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새로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써서 날로 사용함에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矣]”고 그 창제 동기를 밝혔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최만리였다. 1444년(세종 26)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최만리는 먼저,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裁)하시옵기를 바랍니다.[臣等伏覩 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라고 한 후 구체적인 반대 이유를 열거하였다. 첫 번째는 문자를 만드는 것이 중국을 사대(事大)하는데 잘못이 된다는 점이었다.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준행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이어서 최만리는,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서하(西夏)·여진·일본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라고 하여, 중국 글자가 아닌 고유 문자가 있는 나라는 모두 오랑캐 민족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어조(語助)에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서리나 복예(僕隷)의 무리에 이르기까지라도 반드시 익히려 하면, 먼저 몇 가지 글을 읽어서 대강 문자를 알게 된 연후라야 이두를 쓰게 되옵는데, 이두를 쓰는 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의거하여야 능히 의사를 통하게 되기 때문에, 이두로 인하여 문자를 알게 되는 자가 자못 많사오니, 또한 학문을 흥기시키는 데에 한 도움이 되었습니다.[新羅薛聰吏讀, 雖爲鄙俚, 然皆借中國通行之字, 施於語助, 與文字元不相離, 故雖至胥吏僕隷之徒, 必欲習之。 先讀數書, 粗知文字, 然後乃用吏讀。 用吏讀者, 須憑文字, 乃能達意, 故因吏讀而知文字者頗多, 亦興學之一助也.]...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으므로, 아무리 되풀이하여 생각하여도 그 옳은 것을 볼 수 없사옵니다.[今此諺文 不過新奇一藝耳, 於學有損, 於治無益, 反覆籌之, 未見其可也.]”라고 하여, 이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이어서 최만리는 세종이 “형살(刑殺)이나 옥사에 임하여 한글을 쓰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若曰如刑殺獄辭, ...今以諺文直書其言, 讀使聽之, 則雖至愚之人, 悉皆易曉而無抱屈者]”라고 한 것에 반박하여,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다.[刑獄之平不平, 在於獄吏之如何, 而不在於言與文之同不同也]”는 점을 지적하였다. 또한 “언문은 할 수 없어서 만드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변하여 바꾸는 큰일이므로, 마땅히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백료(百僚)에 이르기까지 함께 의논하되, 나라 사람이 모두 옳다 하여도 오히려 선갑(先甲) 선경(先庚)하여 다시 세 번을 더 생각하고, 제왕에 질정하여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상고하여 부끄러움이 없으며, 백세(百世)라도 성인을 기다려 의혹됨이 없은 연후라야 이에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儻曰諺文不得已而爲之, 此變易風俗之大者, 當謀及宰相, 下至百僚國人, 皆曰可, 猶先甲先庚, 更加三思, 質諸帝王而不悖, 考諸中國而無愧, 百世以俟聖人而不惑, 然後乃可行也]”라고 하면서 지나치게 빨리 한글을 시행하는 데 따른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마지막으로 최만리는 한글에 대해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諺文縱曰有益, 特文士六藝之一耳, 況萬萬無一利於治道, 而乃硏精費思, 竟日移時, 實有損於時敏之學也]”라고 하여 한글이 정치하는 도리나, 정신의 연마에 전혀 유익하지 못한다고 비판하였다. 세종은 최만리의 상소문을 보고, 다음과 같이 조목조목 지적하였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겠느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겠느냐?[上覽疏, 謂萬理等曰: 汝等云: ‘用音合字, 盡反於古。’ 薛聰吏讀, 亦非異音乎? 且吏讀制作之本意, 無乃爲其便民乎? 如其便民也, 則今之諺文, 亦不爲便民乎? 汝等以薛聰爲是, 而非其君上之事, 何哉? 且汝知韻書乎? 四聲七音, 字母有幾乎? 若非予正其韻書, 則伊誰正之乎? 且疏云: ‘新奇一藝。’ 予老來難以消日, 以書籍爲友耳, 豈厭舊好新而爲之? 且非田獵放鷹之例也, 汝等之言, 頗有過越。 且予年老, 國家庶務, 世子專掌, 雖細事固當參決, 況諺文乎? 若使世子常在東宮, 則宦官任事乎? 汝等以侍從之臣, 灼知予意, 而有是言可乎]


세종은 무엇보다 한글이 백성들에게 편리한 글임을 강조하면서, 최만리의 비판 상소를 적극적으로 반박하였다. 백성을 최우선으로 한 세종의 정신은 한글 창제와 더불어 나타난 『농사직설』과 『향약집성방』의 간행이나, 측우기, 자격루와 같은 과학 기구의 발명에서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댓글 : 6 개
  • Ezrit
  • 2019/09/17 AM 09:35
교과서 최고 오류 중 하나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한글 창제' 파트죠.
실제론 세종대왕 셀프메이드...;

뭐 집현전 학자들의 세종대왕 분노게이지 올려 활활 불타오르게 만든게 도움이라면 도움일까요.ㅎ;
그것도 세종더그레이트가 생각했던 부분 아닐까합니다
뭐만하면 반대하는 그 대신들도 왕의 신하이며 공존해야하는 관계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저정도 대단한 글자를 무슨수로 혼자 만들어 했는데
점점 밝혀지는 내용들은 ㄷㄷㄷ
이런 성군이 다시 나타나길 염원해봅니다
한글 혼자 만든 것도 대단한데 내부에 적이 득실대는 상황이었던 것도 기가 막힘
한글을 창제함에 있어서 대신의 도리로서 걱정하는것은 맞는것이기도함
하지만 왕으로서 해야할일도 있는데 그뜻을 헤아리지 못한게 흠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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