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글쓰기] 사랑하기에 모자란 키 – 1/32019.05.06 PM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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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하기에 모자란 키 – 1/3

글쟁이: 게도영

 

 

 

 

 말쑥한 차림의 남자가 벤치에 앉는다. 가방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낸다. 그리고 가방을 받침대 삼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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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꿈을 만나면 어떡할까? 내 경우에는 걱정했다. 꿈이 엄마, 아빠를 힘들게 하지 않을지. 그래서 반짝이는 꿈을 만났을 때, 엄마에게 달려가서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나는 머리만 웃자란 쓸데없이 셈이 빠른 아이였다. 바보였다. 꿈을 꾸든 말든 미래는 크게 바뀌지 않았을 텐데. 아무튼 어렸을 때는 누가 대놓고 지적하지 않아도 가난 때문에 항상 주눅이 들었다. 가난에 눌려서 그랬는지 내 키는 또래보다 작았다.


 중학교 1학년 때, 피부가 하얗고 키 큰 소녀가 짝꿍이었다. 얌전하게 생겼으면서 남자애들과 시비가 붙으면 주먹으로 끝장을 보는 왈가닥이었다. 나는 키가 작았는데 키 큰 여학생과 짝이 되어서 반에서 놀림감이 됐다. 키로 자리를 정하는 것은 차별이니 합리적으로 제비뽑기로 정하라고 말씀하신 선생님이 미웠다.


 그 무렵 나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우리 집에는 컴퓨터도 오락기도 학원비도 없었기 때문에 책 이 내겐 돈은 적게 들면서 시간은 잘 가는 취미였다. 하루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데 짝꿍인 J가 다가왔다. J가 뭐하냐고 물었고 나는 책 본다고 답했다. 다시 책 좋아하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J는 옆에 앉아서 말없이 들고 온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닭 보는 소처럼 눈을 깜빡이고는 읽던 책을 마저 읽었다. 사실 여학생 옆에서 책을 읽는다는 게 창피했지만, 그것 때문에 자리를 옮기는 건 더 창피해서 못 움직였다.

 

 그 뒤 우리는 종종 도서관에서 마주쳤고 나란히 앉아 말없이 책을 읽었다. 시간이 지나며 읽은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게 됐다. 서로 좋아하는 책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얼렁뚱땅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내가 J에게 물었다. 키 작은 사람도 괜찮으냐고 묻자, 남자애들은 금방 자라니까 걱정 말라며 그녀가 싱긋 미소 지었다.

 

 J의 말처럼 내 키는 불쑥 자랐다. 목소리가 변했고 수염이 났다.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J를 많이 따라잡았다. 그녀와 내 키 차이가 딱 1cm로 줄었다. 거기서 멈춰서 더 자라지는 못했다. 아쉬워도 도리가 없었다.

 

 졸업 후 그녀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친구 삼촌이 운영하는 공장에 들어갔다. 열심히 갚았어도 남아 있는 빚을 갚느라 애쓰는 부모님을 돕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달리 꿈이 있는 동생을 지원하고 싶었다. 공장에서 일해서 저축만 잘하면 동생 학비를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장에서 하는 일은 기계를 조립하는 일이었다. 완성품은 발권기였다. 한 자리에 서서 같은 속도 같은 동작으로 기판에 정해진 부품을 꽂는 일만 하면 되었다. 하루 9시간씩 일했고 주 1회 쉴 수 있었는데 고단했지만 버틸 만했다. 주말에는 서울에서 본가로 내려오는 그녀와 데이트를 했다. 성인이 되니까 학생 때보다 좋은 점이 있었다. 일해서 번 돈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었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극장에 가거나 멋진 레스토랑에 갔다. 돈이 없을 때는 도서관에서 책 읽다가 김밥왕국에 갔다. 그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좋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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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연필과 종이를 내려놓고 가방을 연다. 안에서 주섬주섬 봉지를 꺼낸다. 봉지 안에서 빵과 우유가 나온다. 빵을 먹으려고 포장을 뜯는데 어디서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남자의 발치에 내려앉는다. 보고 있자니 까치가 깡총 거리며 다가왔다가 멀어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빵을 뜯어 부스러트린 후에 던진다. 그러자 어디선가 까지 한 마리가 또 날아온다. 먼저 온 녀석과 친구인지 다투지 않고 나누어 먹는다. 나중에 온 녀석은 왼쪽 발가락이 하나 없다. 두 마리의 모습을 조용히 보다가 빵을 뜯어서 또 한 덩이 던진다. 먼저 온 까치가 커다란 덩어리를 물고 날아오른다. 뒤에 온 까치가 따라간다. 두 마리가 난간 너머 같은 하늘로 날아간다.

 

 새들이 가고 나서 남자는 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낸다. 엄지손가락으로 튕겼다가 잡고 한숨을 쉰다. 확인해보니 앞면이 나온다. 또 동전을 던졌다가 받는다. 이번에는 확인하지 않고 도로 주머니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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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좋았는데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J가 내게 정장을 한 벌 선물했다. 서울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샀다고 했다. 그렇게 비싼 옷은 처음이라 치수는 맞았지만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는 답례로 당시에 유행했던 백을 그녀에게 선물하고 싶어 백화점에 갔다. 가격을 모르고 사러 간 것이 낭패였다. 두 달 치 월급을 합쳐야 살 수 있는 가격이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여직원에게 내 한 달 월급의 절반 가격으로 살 수 있는 백이 있는지 물었다. 여직원은 탐탁잖은 표정으로 물건을 가져와서 포장은 정성스럽게 해 줬다. 그리고 다음 주말에 선물을 건넸다. 그녀는 포장을 뜯고 내가 선물한 백을 보더니 정말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J는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사귄 지 9년째 되는 날. J가 밤늦게 전화를 했다. 한참 말이 없다가 미안하다고 하기에 나는 이유를 물었다. 그녀는 그냥 미안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 뒤 계속 연락이 되지 않았다. 본가에 찾아가 봤지만,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공장 반장님께 사정을 말하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후에 휴가를 썼다. 평일에 서울로 올라가서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로 향했다.

 

 J가 사준, 아까워서 모셔뒀던 정장을 입고 정문에서 한참 기다렸다. 수업이 끝났는지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인파 속에서 나는 하얀 학들 사이에 끼인 닭이 된 기분이었다. 그녀를 금방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개를 쭉 빼고 계속 두리번거렸다. 그때 누군가 내 등을 두드렸다. J였다. 그녀는 못 본 사이 머리를 짧게 잘랐고 전보다 맵시 있는 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차 마시자며 말하고 고개를 돌려 앞서갔다. 먼저 가는 여자친구의 오른쪽 귀에 못 보던 귀고리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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