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은 일기]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 어쩌면 멀리 있는 가능성2014.01.10 AM 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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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는 토미 더글러스의 전기입니다. 생소한 이름입니다. 마이클 무어의 <<식코>>에서 언급된다고 하는데요, <<식코>>를 보지 못했으까요. 그래서 짧고 편리하게 소개하자면, 토미 더글러스는 '캐나다 무상 의료의 아버지'이며 '북미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의 대표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토미 더글러스의 일대기이자 그가 몸담았던 CCF(Co-operative Commonwealth Federation, 협동연방당)의 분투기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재밌는 책은 아닙니다. 토미 더글러스가 재치를 발휘하는 몇몇 일화를 빼면 연도와 숫자, 인명과 지명이 난무하거든요. 뭐, 이건 취향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과장이나 허풍 없이 차분하게 쓰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마음에 밟히는 대목들이 있습니다.

적대적인 정부와 언론은 노동자들을 비난했다. 언론은 [...] 이를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떠들어 댔다. 겁에 질린 대중의 눈에는 노조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것, '외부 선동자'가 있다는 사실만이 부각되었고, 저임금이나 열악한 작업 조건 같은 문제는 가려졌다. (p.81)

얼마 전의 철도 파업을 연상시키는 서술입니다. 캐나다의 에스테반 광산 파업에 대한 것인데요. 한국이나 캐나다나 비슷하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헌데 저건 1931년에 벌어진 일입니다. 만감이 교차합니다. 1945년에 광복, 1953에 휴전. 한국이 그만큼 뒤처진 걸까요?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의 저항을 헐뜯는 게 너무 쉽고 편하기에, 새로운 수법을 고안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요?

은행가들과 자본가들, 전국의 신문들이 CCF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양의 탈을 쓴 공산주의자들이며, CCF 정부가 수립되면 부동산과 보험증권과 은행계좌를 몰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토미와 그의 당은 공산주의자라는 비난과 나치당원이라는 비난까지 모두 들었다. (p.127)

1940년대 캐나다의 '나치몰이'에 2014년 대한민국의 '종북몰이'가 오버랩됩니다. 답답하지만 절망적이지만은 않습니다. "토미와 그의 당"은 거센 반발을 뚫고 주정부에서 집권하고, 나아가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하니까요. 그렇기에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겠죠.

한 가지 더, CCF가 국영 기업의 설립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가는 과정 또한 인상깊습니다.

어떤 이들은 캐나다와 한국의 상황은 다르고, 캐나다의 경제력 덕분에 무상 의료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절반은 맞습니다. 캐나다는 2차 대전 종전 이후의 호황기에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진실은, CCF는 대공황 시기에 성장한 정당이라는 겁니다. 이 책의 해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무상 의료는 부자 나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 한국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쿠바, 베네수엘라, 코스타리카도 유사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반면, 세계 최고의 부자 나라인 미국은 무상 의료 제도가 없다. (p.251)

한국은 1995년에 국민 소득 1만 달러에 도달했고 현재는 2만 달러이다. 영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1만 달러가 된 것은 1987년이지만 무상 의료 체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스웨덴의 1인당 국민 소득이 1만 달러가 된 것은 1977년이었지만 이미 1955년에 국민 모두에게 무료나 다름없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가 시작됐다. 캐나다의 경우만 보더라도 서스캐처원에서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했을 때 서스캐처원은 캐나다의 주 가운데 가장 가난한 주였다. (pp.251-252)


'보편적 복지'가 철지난 유행가처럼 들리고 '경제민주화'가 조기 종영된 드라마 같아 보이는 요즘입니다만, 빈곤과 착취가 되풀이 되지만 그에 맞서는 저항도 그치지 않으며, 때때로 승리하기도 한다는 걸 <<또 다른 사회는 가능하다>>는 알려줍니다. 그럼에도 너무 먼 옛날의, 너무 먼 나라의 일 같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걸까요.

국민의 경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 저는 배가 고픈 자가 영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또한 치통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미(美)나 선(善) 같은 것을 생각할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토미 더글러스, 1982년의 대화 중에서 (p.7)


마지막으로! 토미 더글러스는 <<24>>의 잭 바우어로 유명한 키퍼 서덜랜드의 외할아버지랍니다.
댓글 : 2 개
국민의 경제 조건를 개선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 솔직히 이거 이해되네요.
사실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낙수이론은 이제 사장되어야함이 옳은 것 같아요.
맞아요 맞아요.
참 가슴에 와닿는 말이죠.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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