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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일기]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절망에 지지 않는 삶2015.05.22 PM 03:56
290쪽의 대답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울한 뉴스들을 생각한다면, 선생님은 놀라울 만치 낙관적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선생님한테 희망을 주는 겁니까?" (p.10.)
1992년 가을,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에게 청중이 물었습니다. 날카롭고, 그만큼 대답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일흔을 넘긴 역사학자는 대답을 대신해서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썼습니다. 그의 답변을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내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 나는 희망을 고집한다. (p.22.)
의문이 뒤따릅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하워드 진은 자신의 경험을 재료로 삼아 설명합니다. 그건 혼자만의 잡담이 아닙니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에 관한 이야기이며 또한 역사를 만들었던 무수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2차대전에 폭격수로 참전했던 그는 종전 후 대학교수가 됩니다. 당연히 강연을 하고 종종 책을 썼겠죠. 하지만 더불어 흑인 인권운동,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 참여합니다. 연설을 하고 시위를 하고 지명수배자가 되고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는 동안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대개 패배하고 좌절하고 다시 힘을 모으고 가끔씩 승리합니다. 하워드 진은 그 속에서 희망을 찾아냅니다.
시위가 끝난 후 참가자들과 함께 한 하워드 진 (가운데 밝은 색 코트)
어떤가요? 너무 뻔하고 진부한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기적과도 같고 불가능한 이야기인가요?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릅니다. 너무 평범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 만약 그런 생각이 든다면, 우리가 지금 도무지 말도 안 되지만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왜 우리는 평범한 걸 불가능하다고 믿고, 어처구니없는 걸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걸까요?
감옥에서 보낸 편지
"이토록 현실이 엉망인데도 어떻게 당신은 희망을 품을 수 있나요?"라는 의문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가끔씩 마음 속에서 그런 회의가 생겨납니다. 다행히도 하워드 진이 훌륭한 대답을 남겼기에, 저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추천하고 또 다시 읽습니다. 그리고 여기 의지가 되는 또 한 명이 있습니다.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치열하게 실천하라, 정도의 뜻이겠죠. 안토니오 그람시의 신조로 알려진 문구입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혁명가라고들 하지만 어쩌면 수감자, 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50이 채 안 되는 짧은 생애 가운데 11년을 옥살이했고 결국 (실질적으로) 감옥에서 죽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람시는 절망하지 않았고 감옥 안에서 열심히 글을 썼습니다. 그가 남긴 글들은 훗날 <<옥중수고>>라는 책으로 묶였죠. 비록 그람시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헤게모니'라는 개념을 비롯, 그의 사상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좌절감이 쉽게 가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무솔리니에 맞서 싸운 그람시나 반전 운동에 앞장섰던 하워드 진의 이야기는 너무 멀고, 특출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드니까요. 그럴 때는 더 가까운 곳으로 눈을 돌리면 어떨까요.
가장 아름다운 계절
4월과 5월, 6월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하지만, 반민주에서 민주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1960년 4월 19일, 1980년 5월 18일, 1987년 6월 10일. 늦봄과 초여름. 그날들은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민주화운동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항쟁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꽃이 지고 잎이 무성해지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광개토대왕이나 세종대왕, 이순신과 같은 영웅들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학생들이었고,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단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었죠. 이제 다시는 그런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적이고, 게다가 조선인은 시기심이 많기에, 쓰레기통에서는 장미가 피어날 수 없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곳은 발끝만 바라보며 걷는 대신, 고개를 들어 앞을 또 뒤를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다면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몇 백년 전의 까마득한 역사도 아닙니다.
1987년 7월 9일, 고 이한열의 영결식에 참석한 학생과 시민들
우리는 가끔 착시현상을 겪습니다. 이제는 누구든지 적당히 나이를 먹으면 시장을, 도지사를, 국회의원을,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죠. 이게 아주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입법부의 구성원들과 선출직 공무원들을 직접 선출하게 된 것은, 3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십대 후반인 셈이죠. 아니,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생긴 것 자체가 100년에서 한참 모자랍니다. 해방, 전쟁, 독재, 민주주의. 전부 우리가 평범하게 나이를 먹으면 도달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영원한 절망은 없어요. 패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일본제국도, 종신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이승만도,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던 군사독재도, 마침내 모두 졌으니까요. (군사독재가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는 동안 제국주의의 망령이 꿈틀거리고 있지만요.) 한국의 현대사는 불의와 폭력의 역사이지만, 또한 동시에, 불의에 맞서고 폭력에 저항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 날에는 절망과 희망이 공존합니다. 무엇을 선택하여 다가올 날을 향해 밀고 가야 할까요?
결론을 대신하여, 영원히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세상이 좋아진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더 나은 세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그걸 사람들과 나눠야 해요. 서투르게 말하자면, 역사를 공부하고,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는 데에서 출발할 수 있을 겁니다. 좀더 시야를 넓히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임과 단체들이 있습니다. 부담스럽다면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도 괜찮겠죠. 이 이상은, 글쎄요, 저도 뭐라 말하기 어렵네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좀더 자세한 글을 더 쓰고 싶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견 표출을, 덜 극단적이고 더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가진 강력한 표현의 도구들을 어떻게 하면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까요?)
2015년 4월 17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
하지만, 하지만, 세상은 영원히 바뀌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우리를 좌절시키는 사건들이 터집니다. 정권을 바꾼다 해도 국민들은 다시 실망하고, 점점 더 시민들은 무기력해질 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절반 가량은 계좌에 더 많은 돈이 쌓인다면 독재가 되풀이되어도 상관없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이들을 설득하고 이해시키려 노력해야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고, 결국 실패하게 될 수도 있겠죠. 너무 허망하고 무책임한 말인가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를 길게 인용하며 대답과 결론을 대신하겠습니다.
그렇다. 인종간 증오와 성차별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만연해 있고, 전쟁과 폭력은 여전히 우리의 문화를 타락시키며,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하층계급은 엄청나게 많고, 다수 국민은 현재 상황에 만족하며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점만을 본다면, 역사적 관점을 잃어버리게 되어 마치 어제 태어난 사람처럼 오늘 아침 신문과 오늘 저녁 텔레비전 뉴스의 우울한 소식들만 알게 된다. [...] 우리가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 장기적인 변화를 반드시 응시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관주의는 자기충족적인 예언이 된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 의지를 무력하게 만듦으로써 자기 자신을 재생산한다.
우리에겐 지금 이 순간에 보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금세기에만도, 갑작스러운 제도의 몰락과 사람들 사고의 비상한 변화, 폭정에 맞선 반란의 예기치 못한 분출, 결코 무너뜨릴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권력 체제의 신속한 붕괴로 인해 얼마나 자주 놀라게 되었는지를 잊고 있다.
나쁜 일은 줄곧 벌어져온 나쁜 일들 -- 전쟁, 인종주의, 여성 학대, 종교적, 민족적 광신주의, 기아 -- 이 반복되는 것이다. 좋은 일은 예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 평범한 사람들은 얼마간은 겁을 먹을 수 있고 농락당할 수 있지만 가슴속 깊이 상식을 지니고 있으며, 조만간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도전할 길을 찾게 된다.
사람들은 비록 그렇게 만들어질 수는 있지만, 자연적으로 폭력적이거나 잔인하거나 탐욕스럽지 않다. [...] 혁명적 변화는 한 차례의 격변의 순간(그런 순간들을 조심하라!)으로서가 아니라 끝없는 놀람의 연속, 보다 좋은 사회를 향한 지그재그꼴의 움직임으로 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 거대한 영웅적 행동에 착수할 필요는 없다. 작은 행동이라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반복한다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잔혹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우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을 본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파괴할 것이다. 사람들이 훌륭하게 행동한 시대와 장소들 -- 이러한 사례들은 무수히 많다 -- 을 기억한다면,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적어도 이 팽이 같은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행동을 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며,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현재를 산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승리가 될 수 있다. (pp.286-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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