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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한국사] [ #글림킴 ] 생생한 동북아시아 역사 ③ BC 222 ~ BC 209 ( 동북아, 고조선, 진시황, 진나라, 진승과 오광의 난 )2021.08.09 PM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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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고조선(古朝鮮)과 비교하여 중국의 주나라(周)부터,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까지 있었던 사상가들(思想家)의 이야기와
행정체계(行政體系), 고대 무기들(古代武器)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오늘은 지난 이야기에 이어서 진시황(秦始皇) 의 전국통일(全國統一)
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진시황은 조나라(趙國)와 연나라(燕國)를 멸망시킨뒤 목표를 바꿔서 초나라(楚)에 대한 맹공세를 시작
하게 되는데..
진나라의 영웅 왕전(王翦)과 이신(李信), 몽염(蒙恬) 장군과 항우(項羽)의 할아버지, 명장 항연(項燕)간의 2차 전쟁을 통해 초나라가 멸망하는 과정
과, 진시황(秦始皇)은 전국통일(全國統一)후, 어떤 행정 체제로 전국을 통치하였을까? 에 대한 이야기와 몰락과정에 대한 이야기등을 상세하게 핵심
만 뽑아 제작해보았습니다.
Q : 통일된 진나라의 인구는 2000만 ( 400만 호 이다. )
A : 통일된 진나라의 인구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 팩트입니다. 그나마 기록을 통해 대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중국의 고 문헌
Q : 왕전(王翦)의 60만 대군은 사실일까?
A : 이때문에 왕전(王翦)의 60만 병력이 사실인가? 물론, 저 역시 전국시대 말에 동원되었던 수십만의 병력은 다소 과장이 있다고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설은 진시황이 전국통일하던 시대의 중원 전체 인구를 약 2000만 ( 400만 호 ) 언저리로 이미 왕전(王翦)이 출정하기 전
이미 이신(李信)의 정예병 ( 기록상으론 20만이라고 하나, 당시 인구와 수차례 전쟁을 한 정황상 정상적인 병력으로는 수십만을 절대 동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보니, 수십만의 병력은 아마 수만 정도의 병력이거나, 과대로 포장된 정예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 이 항연에게 격파당한 사건이 진시황
이 보기에도 매우 큰 사건이였기 때문에 이후에 왕전에게 사정 사정하여 출정시킨 것이 때문에 정상적인 병력이었다기보단 백성들이 다수 참여된
머릿수만 채운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그 증거로, 함곡관(函谷关)에 다다르자 나서서 싸우기 보단, 요새를 쌓고 항연군에 맞써 방어전만 치루며, 음식과 술을 배풀며 안정화를 시키고
투석전과 멀리뛰기와 같은 군사적인 훈련을 시키며 시간을 벌었던 이유와, 항연이 요새가 뚫리지 않자 반대로 유인계를 택하여 이끄는 전략으로
변화를 준 것을 고려해 볼 때, 왕전의 부대는 급조된 병력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됩니다.
Q: 진시황은 초전에 흉노에게 털렸는가?
A: 앞써,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중국은 고대부터 하나의 체계화된, 선진화된 국가로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다릅니다.
중국의 상나라(商)이나 주나라(周)를 마치 하나의 거대한 나라라고 착각들을 많이 하시는데, 상나라는 "씨족제" 원시 국가이며, 주(周)는 혈연주의를
바탕으로 봉건제를 시행하던 국가이므로 막 원시 문화를 탈피하던 시기로 오늘 날 처럼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민으로 이해하면 안되며, 이후에
주왕실이 붕괴되며 형성된 200여개 국가들 ( 춘추시대 ) 역시 분열이 아닌 원래 그 지역을 독립적인 세력들이 통치하고 지배하던 범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주왕실의 힘은 미약하여 지방까지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
이후에 강력한 7개 국가가 대립을 하며 행정과 사상이 발전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진나라가 유일하게 체계화된 군현제(郡縣制)를 바탕으로 거푸집에
철을 찍어내는 대량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체계화된 군대로 형성되며 모래의 한줌과도 같은 부실한 행정체계를 유지했던 6개국을 점령하여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내니 이것이 통일된 진시황의 진나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진나라 역시도 진시황의 지방 죽이기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분서갱유 ( 지방의 기록물들을 수거하고 역사가들을 생매장 하는 정책
) 과 지방의 부호 ( 왕족이나 귀족 ) 의 12만호 ( 약 6만여 명 ) 이 진나라의 수도 함양(咸陽) 지역 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 장성을 제외한 지방의 보루
들을 철거를 하고 도로를 건설하며 중앙인 함양에서 변방까지 잇는 도로까지 만들며 하나의 사상으로 통제된 국가로 만들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
과정에서 여러 반발 ( 진시황 암살 사건 ) 등이 발전된 것읊 볼 때 진나라 역시도 매우 혼란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나라의 인구의 10% 이상 약 12-14% 이상, 300만명 가량이 진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사치적인 건축물등을 건설되는데 희생되는 상황
( 실질적으론 노동이 가능한 건장한 청장년들이 다 동원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 에서 흉노의 소수의 기마대한테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하고
철저하게 집밟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당시 중원의 말들과 만주나 유목지대(스탭지역)의 말들의 차이는 매우 컸는데, 변방의 말들은 거친 초원과 사막, 평지, 산맥지대를 뛰어다니면서
거친 풀들을 먹고 자란 말들이었기 때문에 사료도 가리지 않았으며 어떤 경우는 호랑이를 걷어차 쫒아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선천적으로 거친
말들일 뿐만 아니라 중원과 다르게 어떠한 상황에도 말이 울지 안도록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기 때문에 만주의 명마(名馬)나 흉노의 천리마(千里馬)
는 중원의 말(中原馬)과의 갭차이는 매우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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