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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타트] 아무르타트 - ch1. 그림자 경주 (19)2014.10.24 PM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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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치가 떠나고 일과가 크게 달라진 제미니와 달리, 리타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과를 보냈다. 트랩해체는 다 끝냈고 한동안 패잔병이 계속 올 수도 있기 때문에 트랩 설치는 후일로 미뤘다. 대신 타이번의 오기 전처럼 숲의 관리를 한 다음 성에 들렀다가 타이번을 돕는 일을 했다. 오늘도 패잔병이 몇 명 도착했기 때문에 여전히 성은 바쁜 것 같았다.
한창 바쁜 와중에 하멜집사는 리타에게 어떤 물건을 전해주었다. 리타는 그것이 캇셀프라임이 남긴 물건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멜은 뒤늦게 생각났다며 미안해하며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농담했으나 리타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리타는 방에서 물건을 꺼내 보았다. 하멜이 예상한대로 캇셀프라임과 다과회를 할 때 사용했던 다기와 찻잎이 아주조금 들어있었다. 리타는 복잡 미묘한 심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드래곤의 선물이라는 거창한 명함이 있지만 물건 자체는 그저 평범한 다기일 뿐이다.
리타는 이내 따뜻한 물을 가져와 주전자에 붓고 찻잎을 전부 넣었다. 드래곤이 준 선물을 마시면서 드래곤을 생각한다. 사람이라면 감성에 젖을만한 일이지만 리타는 그저 맛있었던 차를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드래곤을 생각하는 것과 그 차를 마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녀를 오래토록 잡고 있었던 것은 캇셀프라임과 디트리히에 관한 것이었다. 샌슨과 이야기를 나누기 적당한 주제도 아니었고, 죽음을 본 상대에게 물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남과 나누기엔 그녀의 생각이 너무도 정리되지 않았었다.
캇셀프라임과의 대화. 디트리히의 친밀함. 그녀의 변화와 죽음. 그의 예상된 죽음. 자신의 후회. 마련된 운명 속에 짜여진 시간.
이 모든 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서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난생 처음 겪어 볼 정도로 가슴은 답답하고 머리는 무겁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무엇도 이 심연과도 같은 상념 속에서 손을 뻗어 주지 않는다.
리타는 적당히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이 들자 차를 잔에 따랐다. 은은한 정취가 서린 향이 코로 스며든다. 바이서스에서는 흔히 보기 힘든 투박하고 곡선적인 잔에 하얀 차가 천천히 채워진다. 리타는 차를 음미하기 위해 손을 가져가다가 멈추었다.
하얀색?
살면서 한 번도 하얀색의 차는 본 적이 없었고 듣지도 못했다. 캇셀프라임과 마셨던 차도 진한 홍색이었다. 캇셀프라임이 전혀 새로운 차라도 준 것이란 말인가.
하얀색 차는 잔에 파문을 만들어냈다. 막 한방울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작고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파문이다. 하지만 리타는 지금 찻잔에 손을 대지도 않았다.
파문은 점점 커졌다. 조그만 잔속에서 일어난 파문이라기엔 생각보다 큰 모습이었다. 리타는 놀라서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번뜩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하지만 주전자에 담긴 차는 붉은빛이 도는 것이다.
찻잔에서 생긴 파문은 어느덧 찻잔보다도 더 높이 튀어오를 정도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한 방울도 밖으로 튀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그저 찻잔 안에서 높게 튀어 오르고 낮게 가라앉았다. 리타는 그 파문과 들고 있는 주전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찻잔에는 충분한 정도의 차를 따랐지만 지금 이는 파문을 보면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리타는 주전자에 남이 있는 차를 천천히 잔에다 부었다. 주전자에서 떨어지는 차는 놀랍게도 파문에 바로 흡수되어 더 큰 파문의 일원이 되었다. 리타는 남김없이 차를 모두 따랐다.
찻잔은 그 크기로는 담지도 못할 차가 파문을 일으키며 담겨 있다. 파문은 파동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넘실거린다. 하지만 넘치는 것이 당연한데도 넘치는 것은 없다. 리타는 주저앉듯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그 광경을 계속 지켜보았다.
한 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파문은 점차 잦아들었다. 하지만 찻잔 안에서 잦아들지는 않았다. 찻잔에서 리타의 팔 하나 정도는 될 만큼 파문은 치솟았었는데 그 최고점에서 파문이 잦아드는 것이다. 놀랍게도 차는 찻잔에 담기지 않고 허공에서 원을 그린다.
하얀색 액체로 된 그것은 이윽고 완전한 구체가 되었다. 문득 리타는 추위를 느꼈다. 창문은 닫혀있고 집안은 아직도 훈훈하다. 그러면 전신을 감싸는 이 서늘한 냉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쩌적
하얀 구에서 나는 소리다. 그것은 서리가 끼듯 구체 주변이 번쩍이는 하얀색으로 채워졌다. 리타가 느낀 냉기는 바로 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냉기는 점차 강하게 뿜어져 나왔고 어느덧 리타의 몸은 추위로 인해 떨고 있었다.
서리 같았던 것은 점점 얼음으로 화해갔고 이내 하얀 구는 얼음으로 된 공이 되었다. 얼음이 완벽하게 하얀 구를 뒤덮자 갑자기 냉기가 사라졌다. 서늘한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리타의 몸도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리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구체를 응시했다.
쩡!
처음 냉기가 나올 때보다 더 큰 소리가 얼음의 공에서 들린다. 얼음의 공은 눈으로도 확인 가능한 균열이 생겼다.
쩌적. 쩌저적!
균열이 퍼진다. 한 곳에서 시작된 균열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알에서 새끼가 세상을 향해 몸부림치는 흔적이 새겨지는 것처럼 얼음은 깨지기 위해 갈라진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알처럼 한 가운데 얼음이 톡 하고 떨어지면서 구멍이 생겼다.
하얀색의 얼음공은 새로 생긴 구멍과 그 주변의 균열부터 시작해서 점점 붕괴되어 갔다. 구멍에서 하얀 무엇인가가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것은 잠시 세상과 조우하고 다시 구멍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동작으로 인해 구멍과 균열은 커졌다.
균열의 심화와 구멍의 확장. 마치 부화하는 것 같다는 느낌에서 정말 부화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얀 얼음의 알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며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것이다.
얼음에 꽤 심한 균열이 생기고 구멍도 커졌다. 안에 있는 생물은 본능적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것은 약해진 껍질을 사정없이 깨트렸다.
푸르르
하얗고 작은 머리가 껍질을 깨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껍질을 깨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 노력은 금방 효과를 발휘해서 껍질은 대부분 깨졌다. 이윽고 하얀 날개가 뻗어 나오며 껍질은 완전히 부서졌다.
“웜링(해츨링)?”
리타는 알을 깨고 나온 생물을 보고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것은 사람의 손바닥만한 몸을 가진 주제에, 세상 그 무엇보다도 큰 생물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어떤 티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새하얀 몸에 앙증맞게 솟은 뿔과 성체에 비해 과하게 큰 눈, 마치 어린 소녀의 인형같이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모습이다.
갓 부화한 생물은 우아하게 날개짓을 시작했다. 허공에 떠 있는 알에서 부화해서인지 태어나자마자 공중에 떠있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갓 태어나서 날개짓을 할 수 있는 난상생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물론 드래곤의 생태를 관찰해서 남긴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경우가 어떤 것인지 판단할 기준 자체가 없지만.
날개는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펄럭거렸으나 자그마한 몸은 안정적으로 공중에 떠 있었다. 그것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는 검은 한 쌍의 눈을 발견했다. 그것의 크고 하얀 눈동자가 선명하게 그녀를 담았다.
“인간의 예법으로는 어떻게 인사해야 한다죠?”
하얗고 조그마한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놀랍게도 인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음성은 바이서스어는 아니었지만 듣는 순간 리타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얀 눈을 깜박거리며 그것은 리타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리타는 웜링으로 짐작되는 그것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가 가장 많이 쓰이는 표현입니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리타의 눈앞까지 날아온 하얀 물체는 어린 아이와 같은 앳된 목소리로 인사했다. 몸체에 비해 크고 앙증맞은 머리를 살짝 숙였다. 리타는 마치 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놀라움을 선사해준 그 존재에게 여상스럽게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인사에 이어 묻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어떤 것부터 질문해야 할지 몰라서 리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하얀 생물은 리타의 인사를 받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에요. 며칠이라도 지났으면 영영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해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하얀 그것은 리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어난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늦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금도 늦었다에요. 많은 기억이 소실되었다해요.”
“소실?”
리타의 반문에 그것은 웃는다고 생각되는 표정이 되었다. 드래곤이 웃는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을 풍긴다. 그것은 날개짓하기 피곤했는지 리타의 무릎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조그마한 얼굴을 들어 리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전히 이상한 말투로 말이다.
“본체가 죽은 순간부터 기억은 소실되기 시작한다에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본체의 기억은 나에게 전송되지 못하는 것이다에요. 중요하지 않은 기억부터 차츰 사라지고 결국에는 모든 기억이 다 사라지고 만다해요. 지금은 본체가 죽고 일주일 정도 지난 거 같은데, 거의 대부분의 기억은 사라지고 단편적인 것만 남아있다해요.”
“많이 사라졌습니까?”
“대부분은 사라진 것 같다에요. 본체가 나를 태어나도록 준비해둔 마법은 열흘이 한계다해요. 본체가 죽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열흘정도가 걸린다해요. 열흘이 지나면 기억도 없고 나도 태어나지 못했을 거다에요. 지금은 아마도 이틀이나 사흘 정도의 기억만 남아있다해요.”
리타는 그것의 말을 토대로 정체를 유추해 보았다. 본체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가지 정황상 캇셀프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웜링이라고 보기에 그것의 말과 행동이 이상하다. 새로 태어난 생명이지만 새끼라고 할만한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캇셀프라임이 당신을 태어나게 한 이유가 기억납니까?”
작은 그것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개를 한번 펄럭이며 자세를 바로 잡은 그것의 하얀 눈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확실하진 않다에요. 몇 가지는 기억하지만 비어있는 것들도 있다해요.”
“기억나는 것들은 무엇이죠?”
“리타를 만나 레어까지 안내해줄 것. 리타의 목적을 방해하지 않고 도울 것. 리타의 친구가 될 것 이다해요.”
“그렇군요.”
리타는 그것의 대답을 머리로 정리하면서도 그것이 올려다보는 모습이 불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선 손으로 들고 테이블에 옮기거나 침대에 둔다 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 확실치 않은 상태에서 실례를 범하긴 싫다. 대신 그녀는 침대에 기대듯이 누우며 눈높이를 최대한 낮추었다.
하얀 그것은 리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슴께로 기어오더니 그대로 엎드렸다. 가슴을 푹신한 쿠션 삼아 편안한 자세가 된 그것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마도 당신이 리타다 하요. 나는 당신의 손에서만 태어나도록 안배되어 있으니까에요. 본체가 나에게 목적으로 부여한 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겠다하요. 목적은 아니지만 감정의 기억이 느껴진다해요. 당신을 지켜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해요.”
“캇셀프라임이 저를 지켜보고자 했다는 말이군요.”
“그런 거 같다에요. 그래서 나를 남겼겠다에요. 그리고 당신이 아닌 존재에 대한 감정도 있다해요. 대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내가 특별히 어떤 것을 행할 필요는 없는 감정이다해요.”
리타는 캇셀프라임에게 있어 어떤 존재가 그런 생각을 품게 만들 수 있을지 떠올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디트리히 할슈타일에 대한 것인가요?”
“이름은 모른다에요. 하지만 그 이름을 듣고 내가 느끼는 감정을 보면 맞는 거 같다해요. 그 존재를 위해 제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 수 있다해요.”
리타가 품었던 상념 중 커다란 것 하나가 떨쳐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캇셀프라임은 라자의 생명까지 끌어안고 죽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리타는 생각의 알고리즘을 끝내기 위해 질문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로 유추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캇셀프라임의 분신인가요?”
“맞다에요. 완전한 분신이라고 할 순 없지만, 본체의 생명력과 기억을 떨어트려서 만들어낸 존재다 해요.”
“본체가 죽었다고 해도 캇셀프라임이라는 존재가 죽은 것은 아닌 건가요?”
“그건 확실치 않다해요. 지금의 내가 캇셀프라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닌 거 같다해요. 하지만 캇셀프라임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겠다에요.”
“하하하……”
리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의 흉부에 누워있던 캇셀프라임의 분신은 웃음소리에 맞춰 들썩거렸다.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리타의 가슴을 건들었으나 리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웃음을 계속 흘렸다.
인간에게 물들어버린 캇셀프라임은 마침내 자신을 나누었다. 핸드레이크의 말은 드디어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드래곤마저 드래곤 라자를 통해 자신을 나누도록 만든 것이다.
캇셀프라임은 리타와의 대화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발견했다. 드래곤은 오롯이 드래곤으로서만 존재하며 나라는 존재를 단수로 밖에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인간의 드래곤과 디트리히의 드래곤으로 자신을 확실히 나누고 있었다. 망각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을 나눌 수 없고, 단수로만 존재하기에 단수여야 한다는 그 틀이 부서진 것이다.
그녀의 인간화는 스스로를 나눌 수 있는 지경이 돼버렸다. 디트리히를 위해 그녀를 나눈다. 캇셀프라임의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나눠진 자신만으로도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으로서는 확실히 죽어버리지만 디트리히를 살릴 수는 있다. 환영마법이나 분신마법과는 완전히 성질이 다른 마법, 자신을 분리하는 마법을 이용해 그녀를 리타에게 남겼다.
리타는 어째서 그 대상이 자신이 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디트리히를 살리고자 했으면 아무에게나 맡겨도 충분할 터다. 그러다 캇셀프라임의 분신이 말한 목적 중에 한 가지가 생각난다. 캇셀프라임의 레어에 가는 것.
아무르타트가 보석금을 내라고 할 것을 예상한 것인지, 아니면 리타에게 남기고자 하는 무엇이 있어서인지, 그녀가 레어에 가길 원한다. 그 인간에게 물들어버린 드래곤은 리타에게서 무엇을 보길 원하는 것일까.
리타는 허무하게 웃는 것을 그만두었다. 흰색의 큰 눈이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캇셀프라임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점이 많군요.”
“나는 이름이 없다해요. 나는 캇셀프라임이자 캇셀프라임이 아니니까 에요. 어떤 것으로 불리면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겠다 해요.”
캇셀프라임의 분신은 어딘지 모르게 알 수 있는 우울함을 잔뜩 내뿜었다.
리타는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기대어 있던 캇셀프라임의 분신은 굴러 떨어질 뻔 하였으나 리타가 손으로 잡아주었다. 리타는 양 손으로 그것을 잡은 채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애정이 서려있었다.
“카피는 어떤가요?”
“카피? 카피…… 카피! 캬하하하하!”
“좋은 이름이죠?”
리타는 싱긋 웃었다. 카피는 드래곤의 모습을 한 주제에 배를 잡고 웃었다. 캇셀프라임의 귀여운 라자가 지어준 귀여운 별명. 캇셀프라임을 따르면서도 캇셀프라임과는 다른 그것은 정말이지 명쾌했다. 분신으로서의 자존감을 충족하기에 그것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카피는 그 별명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것인지 마구 웃었다. 유쾌하다!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가 되어서야 카피는 웃음을 멈추었다. 카피는 자신을 잡고 있는 리타의 손에 얼굴을 비볐다. 이것이 애정표시라는 것을 리타는 알 수 있었다.
“멋진 이름이다에요. 마음에 든다해요.”
“마음에 든다니 기쁘네요.”
“고맙다해요. 그러면 카피는 너를 어떻게 부른다해요?”
“그냥 리타라고 불러주시겠어요? 카피의 목적은 제 친구가 되는 것이었잖아요. 우리는 친구끼리 이름으로 불러요.”
“좋다에요, 리타.”
“나도 좋아요, 카피.”
둘은 마주보며 웃었다.
*
타이번은 사람들이 기겁하는 소리에 덩달아 기겁하는 통상적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 시간에 사람들을 기겁하게 만들 수 있을만한 게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했다. 발자국 소리와 기척으로 보아서 지금 산트렐라의 노래 안으로 들어오는 존재는 리타임이 분명하다. 다소 상식이 부족한 그녀가 무슨 해괴한 꼴이라도 한 것일까? 타이번은 추측은 뒤로하고 여상스럽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군.”
“좋은 밤 보내셨나요, 타이번.”
리타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눈인사를 하고 타이번의 앞자리에 앉았다. 그녀를 뒤따라온 인물도 옆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타이번은 그 기척이 처음 느끼는 것임을 알았다.
“주변이 시끄러운 걸 보니 허우대 멀쩡한 남자 하나라도 데려온 건가?”
“쿡. 그건 저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아쉽게도 아니에요. 인사해요, 카피.”
“안녕하세요. 카피라고 한다해요.”
카피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그녀의 흰 머리가 움직임에 맞춰 스르륵 흘러내린다. 카피는 한 손으로 우아하게 귀 뒤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타이번은 카피의 목소리를 듣고 여성임을 알아챘다.
“타이번이라 한다네. 이거 아가씨께 실례했군. 미안하네. 이 늙은 장님을 용서해 주겠는가?”
“장님?”
카피는 알지 못하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젯밤의 대화를 통해 카피에게 세상에 대한 지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리타가 설명했다.
“눈이 멀어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뜻합니다.”
“오, 알았다에요.”
타이번은 대화를 통해 리타가 새로 데려온 존재가 범상치 않음을 알았다. 펍 안의 사람들이 기겁했던 이유도 이 독특한 어미를 구사하는 아가씨 때문이리라.
“모르긴 몰라도 꽤 어여쁜 아가씨로군. 사람들이 너나할 거 없이 놀라는 걸 보면 말이야.”
“외모는 물론 복장도 놀랍죠.”
리타는 카피의 옷을 보며 말했다. 카피는 옛 동화에서 나오는 공주처럼 하늘하늘한 드레스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외모는 캇셀프라임이 폴리모프한 모습과 똑같으나 정신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 보인다. 원래 폴리모프한 모습도 가녀린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드래곤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나이를 훨씬 들어보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분위기가 사라진데다 원래의 이미지와 순수한 모습이 합쳐 더 어린 느낌을 자아냈다. 십대 중반에서 많아봐야 십대 후반정도로 보인다.
카피를 집에 놔두고 나올 수 없었던 리타는 그녀를 데리고 마을로 왔다. 처음엔 웜링의 상태였지만, 아무르타트와 캇셀프라임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는 마을에서 그 모습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다. 인형인척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마침 카피는 폴리모프하는 방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본체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량의 마나가 남아있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기껏 해보아야 폴리모프나 기본적인 빙계 마법 정도지만 말이다.
카피는 마을에 들어서기 전 폴리모프를 사용했는데, 복장이 그것밖에 없었는지 치렁치렁한 드레스 상태로 변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가 번거로웠던지라 리타는 잠시 마을에 있을 동안만 그 상태로 돌아다니기로 했다. 그 결과 마을 사람들이 의문의 귀공녀에게 놀라게 된 것은 예상한 바다.
타이번은 카피의 복장을 볼 수도 없고 기척으로도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남이 숨기지 않는 것에 대해 굳이 궁금증을 혼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럼 이 늙은이에게 복장이 어떻기에 사람들이 놀라는지 설명해줄 수 있겠는가?”
“옛 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공주를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마왕이나 드래곤에게 잡혀가는 것을 취미로 삼는 공주 말이에요.”
“그래? 이런 마을에 그런 복장을 하는 아가씨가 있었는가. 아니, 그거보다 그런 복장을 할 수 있는 아가씨조차 없을 텐데.”
“확실히 모든 소녀가 꿈꾸는 드레스라지만, 이곳에서 저런 것을 입고 돌아다닐 정도로 낯이 두꺼운 여성은 없겠죠.”
“무슨 말이다에요?”
자신을 두고 나누는 리타와 타이번에 말에 카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마을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계속해서 느껴왔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당연히 타이번과 리타의 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드래곤 라자가 온 이후부터 왠지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자주 맡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리타의 머리를 스친다.
“지금 카피가 입은 옷은 이 마을 사람들이 입는 옷과 달라요. 그런 드레스는 이곳보다 훨씬 번화한 곳의 부유한 몇몇 이들만 입는 것이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카피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엄청 비싼 옷이라서 살 수도 없어요. 설령 구했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는 더렵혀지기 쉽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것이라 잘 안 입으려고 하는 것이죠.”
“시선이 왜 문제다에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것에 대한 경계심이 있어요. 이 마을에서 입을 일도 없고 필요도 없는 옷을 입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일이에요. 적대적인 감정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이란 것에서 어긋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배타적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은 그 경계심어린 시선에 부담감을 느끼기 때문에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 알았다에요. 역시 리타는 똑똑하다해요.”
“요즘 잘 듣지 못한 칭찬이군요. 고마워요.”
리타는 미소 지으며 카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피는 그녀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얼굴 한가득 웃음꽃을 피웠다. 펍 안의 사람들은 그림으로만 보면 제미니보다 카피가 더 여동생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화가 끝나는 것을 기다린 타이번이 말했다.
“아가씨의 궁금증이 충족되었다면 이번에는 내 궁금증을 충족시켜도 되겠는가? 아마도 아가씨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는 궁금증이기도 할 걸세.”
“마을 사람들의 대변자가 되겠다는 말이군요.”
“이들의 궁금증과 나의 궁금증은 별반 다를 게 없을 테니까 말이지. 그래, 아가씨는 어디서 온 건가?”
“북해에서 왔다해요.”
“북해?”
타이번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었기에 반문하고 말았다. 카피는 뭐라도 말하려고 입을 오물 거렸지만 머릿속이 안개 낀 것 같아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리타는 카피를 쓰다듬는 것을 멈추며 타이번을 바라보았다.
“저에게 볼일이 있다는 목적으로 해두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타이번과 상담할 일이 있습니다.”
타이번의 흰 눈이 리타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는 이 마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리타가 타인에게 상담이라는 것을 요청한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안다. 늙은 마법사는 그 자신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욕구가 있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알겠네. 나도 언젠가 자네와 제대로 이야기를 한 번 나누어 보고 싶었다네. 무슨 결심을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다는 건 꽤 중요한 것인 거 같군.”
“감사합니다.”
“아닐세. 나도 자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하지 않았나. 피차 서로에게 궁금한 걸 알아보기 좋은 시간이지. 그래, 여기서 할 텐가?”
리타는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이제 막 얼굴을 완전히 내민 태양이 밤바람에 식은 대지를 데우기 시작하는 참이다. 하루는 길고 하루 동안 해야 할 일은 많다. 마무리 지어야 할 것은 제대로 정리하고 나서 이 문제를 꺼내는 게 좋겠지.
“오후에 하도록 하지요. 오늘은 트랩을 손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트랩이라면 패잔병들 때문에 나중에 하자고 하지 않았나?”
“나중이라는 게 오늘일지 내일일지 알 수 없는 말이지요.”
타이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노려보기 위해서가 아닌 그 감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습관이다. 그는 리타의 말에서 그녀가 확실히 어떤 결단을 내렸음을 깨달았다.
그의 하얀 눈에 비치는 검은 눈동자는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 타이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딸은 공평하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타이번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고 리타와 카피도 그를 따랐다. 펍 안의 사람들은 리타를 찾아왔다는 카피의 정체에 대해서 추측을 하느라 그들을 제대로 배웅하지 못했다. 덕분에 멀리 걸어가던 카피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도 알아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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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캐의 등장입니다. 신캐라고 하긴 애매하지만요... 외모적인 모티브는 챠이카에서 따왔습니다.
말투까지 따라하면 이상할 거 같아서 조금 특이하게만 바꾸었어요.
그나저나 전 편에서 리타는 안 떠나냐고 댓글이 달릴줄 알았는데 없어... 시무룩
아, 다음편이 16장인데, 이걸 한번에 올릴까요? 너무 많을 거 같아서 끊을까 고민입니다.
그럼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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